두 남자와 한 여자···사랑에서 ‘셋’은 늘 비극[책과 삶]
“쓸 수밖에 없는 것, 사랑”
광인
이혁진 지음 Ⅰ민음사Ⅰ680쪽 | 1만9000원
사랑에서 ‘셋’은 늘 비극이다. 플루트와 피아노를 치는 남자 준연과 준연에게 플루트를 배우는 해원은 둘 다 이제 갓 40대가 됐다.
돈 안 되는 음악을 싫어하는 어머니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준연과 아버지에게 폭력을 당하는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공부하고 회사를 상장까지 시킨 해원은 서로 통한다. 둘은 위스키를 좋아한다는 공통점도 있다. 예술은 체험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준연의 ‘음악관’에 해원은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준연의 어머니가 자궁암이라는 소식을 듣고 해원이 아무 대가 없이 1000만원을 빌려줄 정도로 둘의 우정은 깊다.
준연의 친구 하진은 국내 위스키를 만드는 당찬 여자다. 음대 유학을 갔다가 위스키를 배워온 하진은 교통사고로 죽은 아버지의 증류소를 이어받아 자신만의 위스키를 만들어간다. 위스키와 음악이라는 취향을 공유하는 세 명은 친구가 된다. 해원은 첫 만남부터 하진이 눈에 들어온다. “미치지 않고서야 사랑에 빠지기 어려운 나이” 41세에 해원은 하진을, 하진은 해원을, 서로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하진 옆에는 준연이, 그것도 위태로운 준연이 있었다.
전작 <사랑의 이해>가 드라마로 제작되면서 원작 소설도 역주행하며 인기를 끈 이혁진 작가가 신작 장편소설 <광인>을 출간했다. 작가는 다시 한번 ‘사랑’이라는 주제에 정면 도전한다. <사랑의 이해>가 사랑과 계급·신분 갈등을 풀었다면 <광인>은 해원의 시선을 통해 ‘사랑’ 그 자체의 본질적이고도 미친 감정을 시작부터 끝까지 끈질기게 좇는 작품이다.
작품의 주된 화자는 해원이다. 서울에 집도 있고 상당한 주식도 가진, ‘다 가진’ 남자 해원의 시선을 통해 ‘사랑은 무엇인가’를 찾아간다. 해원은 준연 때문에 망설이다 하진에게 고백한다. 해원은 사랑을 ‘화분 키우기’에 비유한다. “화분 같다고 생각을 해. 키우고 기르는 거, 상처도 입히고 잘못도 하지만 계속, 같이 가는 거지. 최선을 다하면서. 우리 다 실수하고 잘못하니까. 그럴 수밖에 없으니까. 뭘 몰라서, 서툴러서. 우리도 화분 속 화초처럼 아직 크는 중이니까.”
‘가진 게 없는’ 준연은 사랑을 시작할 수 없다. 준연은 사랑하기 쉽지 않은 요즘 젊은이의 표상이다. ‘여사친’ 하진이 맘속에 들어왔지만 그는 가난했고, 또 어머니가 우선이었다. 최우선은 음악이 하고 싶은 ‘나 자신’이었다. 자궁암이라는 어머니를 지방에 홀로 두고 올라오면서 준연은 자기가 하고 싶은 걸 우선에 둔다. 어머니가 ‘혼자 있고 싶다’고 했지만 사실 이기심이 앞섰다. 우연히 돈 많은 후원가의 지원을 받게 된 것. 더 이상 자신의 인생을 어머니에게 저당 잡히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어머니는 빌린 돈과 받을 돈이 적힌 수첩 한 장을 남기고 자살한다. 어머니로선 아들 준연을 사랑해서 한 행동이었지만 준연에게 남은 건 죄책감뿐이었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준연은 음악도, 인생도 놓는다. 세 사람의 관계가 틀어져 버린 순간이었다. 하진은 ‘남사친’ 준연을 도울 수밖에 없었다. 친구니까. 준연 옆에 내 여자 하진이 있는 걸 그저 참고만 있던 해원은 결국 폭발한다. 애지중지하는 화초 옆에 ‘잡초’가 자라기 시작한 이상 해원은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잡초를 제거해야만 했다. 불안한 남자의 심리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하진은 증류소에 투자를 받아 공장을 증설해 대량 생산·판매로 사업을 키우자는 제안을 거절하고 스스로 헤쳐나갈 만큼 단단한 여자다. 해원이 사귀자고 했을 때 진심으로 좋아했고, 그가 투자를 제안했을 때도 사랑하니까 돈으로 얽히기를 원치 않아 거절한다. 어머니를 잃고 음악도 잃은 ‘남사친’ 준연 옆에 있어줘야 한다고, 그럼에도 해원을 사랑하는 마음은 변치 않는다고 또렷하고 분명하게 목소리를 낸다.
소설은 흔한 주제일 수 있는 세 명의 남녀, 돈과 예술, 부모와 자녀 이야기를 섬세하고도 낯설게 그려낸다.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 연인 간의 사랑, 친구와의 사랑 등 여러 색깔의 사랑이 광기 어린 모습으로 변해가는 과정은 서늘하기도 하다. 전작 <사랑의 이해> 속 남자주인공 상수의 ‘찌질함’ 묘사가 탁월했듯이 <광인>도 사랑하는 여자를 옆에 둔 남자의 광기와 진동을 고스란히 느끼도록 치밀한 심리 묘사를 이어간다. 모두를 파국으로 이끄는 그 남자의 사랑은 결국 완성된 것인지 소설을 덮고 나면 물음표가 찍힌다. 하진은 사랑하는 남자 해원이 광기 어린 모습으로 변해갈 때 그것을 몰랐을까. 궁금한 대목이다.
소설이 사랑과 광기 사이를 줄타기할 때마다 등장하는 건 위스키와 음악이다. 중요한 소재이자 배경이 된다. 특히 위스키의 맛과 향에 관한 묘사는 와인 만화 <신의 물방울> 위스키 버전이라고 할 정도로 화려하다. 빌 에번스의 재즈 등 선율도 소설 곳곳에서 흐른다.
이혁진 작가는 전화 인터뷰에서 위스키를 마시며 증류 과정을 고찰하게 됐다고 했다. 그는 정제하고 분리하는 증류의 과정을 거친 위스키를 보며 인간의 욕망과 사랑을 떠올렸다. 그는 “사랑이 인간의 여러 욕망 중 가장 순수하고 강렬하며 가장 일상적인 욕망이라고 생각했다”며 “사랑만큼 인간을 인간답게, 인간을 다른 것들과 차별화하는 것도 없다”고 했다. 그는 이어 “사랑에 관해서 쓸 수밖에 없다”며 “소설의 주제는 인간이 될 수밖에 없고, 인간에 대해 쓴다면 가장 강력하게 인간을 움직이는 건 사랑”이라고 말했다.
책은 상당히 길다. 두 권으로 나눠도 될 만한 680쪽이다. 길지만 한 번에 읽을 수밖에 없는 몰입감을 안겨준다. 저자는 이 소설을 “큰 이야기를 통째로 다 읽었으면 좋겠다. 한 번에 다 읽어야 하는 이야기”라고 소개했다.
준연은 처음 해원을 만났을 때 이런 말을 한다. “음악이든 그림이든 영화든 소설이든 그게 제대로 된 작품이라면 체험을 만들어내야 해요. 그게 아니라면 뭘 제대로 만든 게 아닌 거죠.” <광인>은 ‘사랑의 광기’를 체험하게 해주는 책이다.
임지선 기자 visi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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