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시선] 제2의 리크루트? 재소환된 日자민당 파벌 금권정치
(도쿄=연합뉴스) 경수현 특파원 = "레이와((令和) 시대의 리크루트 사건이다".
일본 야당 중 하나인 국민민주당의 간부인 후루카와 모토히사 중의원 의원이 여당인 자민당 내 각 파벌에서 비자금 의혹이 불거진 뒤 얼마 지나지 않은 지난 7일 정치자금법 규정 강화 등을 논의하기 위해 연 당내 회의에서 내놓은 평가다.
이번 사안이 쇼와(昭和) 시대 말기인 1988년 터진 '리크루트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는 뜻이다.
레이와나 쇼와는 일본에서 햇수를 표기할 때 쓰는 연호로, 일본 왕의 즉위에 맞춰 변경돼 서기(西紀)와 함께 광범위하게 사용되며 시대를 구분하기도 한다. 레이와는 2019년 나루히토(德仁) 현 일왕이 즉위하면서 사용되고 있는 현재의 연호다.
후루카와 의원뿐만 아니다. 약 30년 전의 리크루트 사건이 요즘 일본 언론이나 정가에서 자주 재소환되고 있다.
일본 정가를 흔들어온 파벌과 금권 정치
리크루트 사건은 일본에서 발생한 전후 최대의 정경유착 스캔들로 일컬어진다.
당시 자민당 실세를 중심으로 정·관·재계 유력 인사들이 비교적 신흥 기업이었던 리크루트사로부터 미공개 주식을 뇌물로 받은 사실이 도쿄지검 특수부에 의해 드러난 사건이다.
이 사건 여파로 이듬해 자민당 소속 다케시타 노보루 총리가 이끌던 내각은 총사퇴하고 막후 실력자였던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도 탈당하는 등 엄청난 파장이 일었다.
이에 따라 1990년대 초반 일본 정계는 정치자금 관련 법률 개정 등 정치개혁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그런 상황에서도 1992년에는 정부의 각종 인허가가 필요한 택배업체 사가와큐빈이 정치권에 대규모 자금을 제공한 사실이 드러났고 당시 자민당 내 계파인 헤이세이연구회(현 모테기파) 소속 실력자 가네마루 신 의원이 정계에서 물러났다.
잇단 스캔들이 일본 정가를 강타하자 자민당 의원들마저 흩어지며 신당 창당 붐이 일어났고 자민당이 장기 집권해온 '55년 체제'는 8개 정당의 연립 정부 구성에 의해 1993년 호소카와 모리히로 내각이 출범하면서 막을 내렸다. '55년 체제'는 일본 정치권이 여당인 자민당과 야당인 일본사회당으로 큰 틀을 잡은 정치 체제가 1955년부터 시작된 데 따라 붙여진 이름이다.
정치권이 얽힌 게이트급 사건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멀리는 1970년대 당시 자민당 계파 정치를 이끈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의 퇴임으로 이어진 록히드 사건이 있다. 2004년에는 총리까지 지낸 자민당의 실력자 하시모토 류타로가 일본치과연맹의 정치 헌금과 관련된 비자금 의혹 사건으로 계파 회장에서 물러난 바 있다.
일본 정치권을 강타해온 스캔들의 구조적인 배경으로는 자민당의 파벌과 금권 정치 문제가 꼽힌다.
오랫동안 자민당이 집권하면서 당 총재에 오르면 내각 총리까지 맡게 되는 일본 정치구조에서 자민당의 파벌은 유력 정치인이 당내 총재 선거에서 이기기 위한 핵심 수단이고 소속 의원들은 내각 입각 등 자신의 이해관계를 챙길 수 있는 통로로 작용해왔다.
이런 배경에서 파벌 형성과 계파 운영을 위한 금권 정치의 악습이 자리잡았다.
자민당은 1990년대 초반 정치 개혁 시기를 거치면서 파벌에 의한 정치자금 조달 제한, 각료의 파벌 불참 등을 내세우며 한때 변화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지만 어느 순간 계파 정치 구조는 다시 돌아왔다. 특히 아베 신조 전 총리가 2012년 집권하고서 파벌 구조가 한층 더 공고화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기시다 정권에 닥친 비자금 수사 태풍
애초 이번 사건에 대한 수사는 자민당 내 계파별로 여는 정치자금 모금 행사(파티)의 모금액이 정치자금 수지 보고서에 제대로 기재되지 않고 누락돼있다는 한 교수의 고발에서 시작됐다.
일본 정치자금 관련 법은 정치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여는 행사(파티)에서 20만엔(약 175만원)이 넘는 '파티권'을 구입한 개인과 단체는 이름과 금액 등을 보고서에 기재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나 이를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이에 자민당 각 계파는 여러 의원이 같은 단체나 개인에 파티권을 팔면서 기준인 20만엔을 넘게 된 경우 제대로 합산되지 않은 데 따른 단순한 사무착오라며 은근슬쩍 넘어가려 했다.
하지만 도쿄지검 특수부의 수사 과정에서 아베파의 경우 단순한 기재 누락이 아니라 소속 의원들이 파티권 판매 할당량을 넘어 모금한 돈을 아무런 회계 기록도 남기지 않고 의원들에게 되돌려주는 방식으로 조직적으로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가 불거졌다.
비자금 의혹은 이달 초 일본 언론을 통해 보도되기 시작해 갈수록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다.
수사 초기 아베파가 2018∼2022년 5년간 비자금화한 돈은 1억엔(약 8억9천만원)을 넘는 수준으로 알려졌으나 현재는 5억엔(약 45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여기에 할당량 초과분을 넘겨받아 비자금화한 아베파 의원들은 소속 의원 대부분이라는 보도도 나왔다.
장기간 조직적으로 불법이 자행됐음을 시사하는 내부 증언도 나왔다.
아베파 소속 미야자와 히로유키 의원은 지난 13일 기자들에게 "파벌로부터 3년간 140만엔을 받으면서 정치자금 수지보고서에 기재하지 않았다"고 사과하고서 "기재하지 말라는 지시가 있었다"고 말했다.
결국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지난 14일 여론의 압박에 밀려 아베파 출신 의원들을 내각과 주요 당직에서 방출하는 물갈이 인사를 했다.
이에 따라 아베파 소속 각료 4명과 차관인 부대신 5명, 차관급인 정무관 1명이 물러났다.
아베파는 소속 의원이 99명으로 자민당 내 최대 파벌이다. 아소파(56명)와 모테기파(53명)가 그 뒤를 잇고 있으며 기시다 총리한 속해있던 기시다파는 46명(기시다 총리 포함 기준)으로 4번째 규모다. 기시다 총리는 이번 사건이 불거진 뒤인 지난 7일 총리 재임 기간에는 계파에서 탈퇴하겠다고 밝혔다.
그 뒤를 잇는 파벌로는 니카이파(40)와 모리야마파(8명)가 있다. 나머지 77명의 자민당 의원은 특정한 파벌에 소속되지 않았다.
아베파는 아베 신조 전 총리가 전후 최장 기간 집권하면서 당내 1강 체제를 굳혀왔다.
기시다 총리는 아베파 후계자가 마땅치 않은 가운데 여러 파벌 도움을 받아 총리에 올랐지만 국정 운영 과정에서도 최대 파벌인 아베파를 배려하면서 정권을 운영해왔다. 차기 총재 선거에서 재임하려면 아베파의 협력이 필수적인 구조에서는 불가피한 측면도 있어 보인다.
역사는 반복되나…향후 전개는 안갯속
초대형 뇌물, 독직 혐의가 얽혀있는 과거 리크루트 사건과 비교하면 이번 정치자금 사건은 현재까지 드러난 사실로만 보면 상대적으로는 규모가 작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1990년대 정치 개혁을 거치면서 정치 환경도 많이 바뀐 점에 비춰보면 가벼운 사안은 결코 아니다. 리크루트 사건 여파로 일본의 정치 환경은 선거구제가 당내 파벌 경쟁을 심화시킨 중선거구제에서 소선거구제로 바뀌었고 기업의 정치인에 대한 직접 지원을 막는 대신 정당 교부금은 대폭 늘어났다.
당시와 유사한 점도 여럿 보인다. 우선 도쿄지검 특수부가 주인공으로 등장했고 파벌 정치라는 배경도 비슷하다.
당시 다케시타 총리는 지지율이 추락하는 가운데 개각을 통해 정국 안정을 기하려 했다. 하지만 하세가와 다카시 신임 법무상이 임명된 직후 리크루트 사건 연루 소식이 드러나 임명 사흘 만에 물러나면서 여론은 더욱 악화해 다케시타 내각의 총사퇴를 초래하는 요인이 됐다.
기시다 총리는 이번 각료 인사 때 의혹의 정점에 있는 아베파는 아예 배제했다. 하지만 수사가 본격화하면서 불똥이 어디로 튈지는 불확실성이 큰 상황이다.
게다가 기시다파도 자금 회계처리가 부실하다는 의혹이 이미 제기됐다.
아사히신문은 지난 13일 "기시다 총리가 회장을 맡았던 기시다파에서도 부실 기재 의혹이 부상했다"며 "대응에 따라서는 여당 내에서 나오기 시작한 총리 퇴진론에 박차가 가해지고, 치명상이 될 수 있다"고 보도한 바 있다.
자민당 입장에서 다행이라면 정권을 빼앗을 강력한 야당이 없다는 점이다.
NHK방송이 지난 8∼11일 18세이상 시민 1천212명을 설문 조사한 결과를 보면 자민당의 지지율은 29.5%로 전월보다 8.2%포인트나 하락해 자민당이 민주당으로부터 정권을 되찾은 2012년 12월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을 기록했다.
그럼에도 제1 야당 입헌민주당의 지지율은 7.4%에 불과한 것으로 조사됐다.
ev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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