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연배의 이야기와 함께하는 와인] 조선은 와인보다 포도가 먼저였다

박현주 미술전문 2023. 12. 1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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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김명년 기자 = 뉴시스DB. 2023.10.30. kmn@newsis.com


[서울=뉴시스] [변연배의 이야기와 함께하는 와인] 조선은 와인보다 포도가 먼저였다

비니페라 종 포도(이하 포도)가 우리나라에 처음 전래된 것은 고려시대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안압지 등에서 출토된 신라의 와당에 포도넝쿨 무늬가 나타난다. 그러나 이는 도자기나 견직물 등에 사용된 당나라의 포도당초문(葡萄唐草文)이 8세기경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으로, 포도나무가 재배된 증거로 보기 어렵다. 중국 본토에 포도가 들어온 건 기원전 2세기쯤이지만, 확산된 시기는 당 태종 이후다.

조선 시대에 편찬된 고려 말 문헌에는 포도를 재배한 정황을 볼 수 있는 기록이 많이 남아있다. 대부분 고려와 교류가 활발했던 원나라 시기 이후다.

이규보는 정원에 있는 포도가 나무에 감겨 아래로 늘어진 풍경을 묘사했다(‘동문선’ 권66, 통재기(通齋記), 1478).

이색은 사찰의 포도넝쿨이 시렁에 가득 차고(‘동문선’ 권16, 신우숭덕사(新寓崇德寺)), 포도넝쿨이 겹겹이 그늘을 만들었다고 했다(‘동문선’ 권5, 답동암선사(答東庵禪師)). 또 ‘수정포도’(水精葡萄)라는 시도 썼다(‘목은시고’ 권18, 1404).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1347~1392)도 포도를 찬미했다(‘도은집’ 권3, 주필사진사혜포도(走筆謝眞師惠蒲萄), 1406). ‘제신효사식사포도헌’(題神孝寺息師蒲萄軒)에서는 마유포도와 중국 와인의 기원지인 양주(凉州)를 언급했다(‘도은집’ 권3). 그 당시 재배한 포도의 품종이 당 태종이 고창국 정벌 후 가져온 마유포도임을 알 수 있다. 수정포도는 마유포도의 일종이다.

세도가 이인임의 동생인 이인복(李仁復, 1308~1374)도 공민왕 때 추밀원 부사를 지낸 정휘(鄭暉, 1305~?)의 집 포도원 시렁에 가득 열린 포도를 시로 읊었다(‘동문선’ 권11, 정상국휘포도헌차운(鄭相國暉葡萄軒次韻)).

포도는 주로 사찰이나, 고관의 정원, 관청의 뜰에 소규모로 심었다. 조선시대가 돼서도 생산이 많지 않아 아주 귀한 과일이었다. 포도주 양조보다는 주로 식용으로 먹었다. 강원도의 포도와 충청도의 건포도는 조정으로 올리는 진상품이었다(‘세종실록지리지’).

태종 때 동북면 난을 평정하고 나주 김씨의 중시조이기도 한 김정준(金廷雋)이 병상의 태조에게 수정포도를 바치자 태조는 쌀 10석을 하사했다(‘조선왕조실록’ 1398년 9월1일). 쌀 10석은 1440㎏인데, 현재 가치로 300만원 정도다. 조선시대 7간 초가집 가격(50냥)과 맞먹는다. 포도 양이 그렇게 많지 않았을 것으로 보면 꽤 비싼 대가이다. 또 태종은 포도를 바친 신하 박승(朴昇)에게 쌀 5석을 내렸다(‘태종실록’ 권22, 태종11년 8월 갑오).

조선 초기 문신인 정척(鄭陟, 1390~1475)은 자기 집 정원의 수정포도를 따서 세종과 세조에게 바쳤다. 성종과 연산군은 신하들에게 포도를 하사하고 시를 짓게 했다(‘조선왕조실록’, 1492년 8월15일·1500년 10월14일). 그 후 승지들이 승정원에 열린 수정포도를 따서 바치자 이번에는 연산군이 직접 시를 지어 하사했다(‘조선왕조실록’, 1505년 7월25일). 임금이 시를 짓게 할 정도로 포도가 귀했음을 보여준다.

동문선을 쓴 서거정(西居正, 1420~1488), 심수경(沈守慶, 1516~1599), 황섬(黃暹, 1544~1616)은 포도 그림을 보고 시를 지었다.

와인에 관한 문헌은 모두 고려 말 기록을 토대로 한 것이다. 조선시대 포도주에 관한 기록은 많지도 않고, 내용도 모두 쌀누룩 양조법에 관한 것이다.

이색은 포도와 와인에 관해 가장 많은 기록을 남겼다. 포도에 관한 시 외에 기사(紀事, ‘목은시고’ 권3), 술회(述懷, ‘목은시고’ 권10), 도우한평재(塗遇韓平齋, ‘목은시고’ 권11), 영행(詠杏, ‘목은시고’ 권16)에서 포도주에 대해 읊었다.

고려사(1451)에는 원나라가 고려에 와인을 하사한 기록이 6번 나온다. 그 중 3번은 ‘고려사절요’(1452)에도 기록되어 있다. 정자후(鄭子厚, ?~1360)도 ‘영호루’(暎湖樓, ‘동문선’ 권15)에서 이백의 ‘양양가’와 같이 봄 강물을 포도주에 비유했다.

조선시대에는 많은 조리서와 의서가 간행되었다. 그 중에서도 ‘향약집성방’(1433)을 효시로, ‘수운잡방’(1540년경), ‘동의보감’(1613), ‘산림경제’(1715), ‘고사신서’(1771), ‘온주법’(1700년대 후반), ‘해동농서’(1799), ‘리생원책보주방문’(1834년경), ‘임원경제지’(1827), ‘농정회요’(1830), ‘양주방’(1837), ‘군학회등’(1800년대 중반)과 일제강점기에 간행된 ‘조선요리제법’(1917), ‘수세비결’(1929), ‘양조법서’(일제강점기),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1936)에 등장하는 포도주 양조법은 모두 쌀누룩법이다.

역대 임금의 시문을 수록한 ‘열성어제’(列聖御製, 1679)에는 선조가 부마인 동양위 신익성(申翊聖, 1588~1644)에게 쌀누룩 포도주 한 항아리를 하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쌀누룩 포도주를 마신 정황을 분명히 보여주는 유일한 기록이다.

근대 이전의 조선시대에도 우리나라 사람이 외국산 정통 와인을 마신 기록이 없는 것은 아니다.

1636년 통신사 김세렴(金世濂, 1593~1646)은 대마도주가 대접한 레드 와인을 마셨다(‘동명해사록’, 1636).

제주 관헌 2명은 하멜 일행이 건넨 와인 한병을 다 마시고 매우 좋아했다(‘하멜표류기’, 1653년(효종4년) 8월19일자). 스페인 산 레드 와인이었다(틴토 와인으로 추정됨).

표류선 스페르베르(Sperwer)호의 이발사였던 마테우스 에보켄(Mattheus Eibocken)은 귀국 후 동인도 회사 임원인 니콜라스 빗선(Nicolaes Witsen)과의 면담에서 조선의 왕이 와인 비슷한 붉은 빛깔의 술을 직접 따라 주었다고 증언했다. 당시 조선 왕은 효종이다. 쌀누룩 포도주를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일암연기’(一菴燕記, 1720)를 쓴 이기지(李器之, 1690~1722)는 1720년 청나라 수도 연경에서 레드 와인을 마시고 테이스팅 노트를 남겼다.

1748년(영조24년)에는 박경행(朴敬行, 1710~?)과 함께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간 의원 조숭수(趙崇壽)에게 에도 중기 본초학자인 노로 겐조(野呂元丈, 1694~1761)가 아사쿠사의 히가시혼간지(東本願寺)에서 네덜란드 상인이 가져온 와인 한병을 선물했다(노로겐조 저 ‘조선필담’(朝鮮筆談), 1748).

조선시대는 술의 종류만 700가지가 넘는, 곡주의 전성기였다. 와인보다는 포도가 먼저였다.

▲와인 칼럼니스트·경영학 박사·딜리버리N 대표 ybbyu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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