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는 땀 흘려 일구고, 아낌없이 나눴다

서귀포/조백건 기자 2023. 12. 16. 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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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아너 소사이어티] [1] 보통 사람들로 퍼지는 기부

‘평범한 기부 천사’가 늘고 있다. 농부인 양학량(77)씨와 배준식(70)씨는 각각 1억원을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기부해 ‘아너 소사이어티(고액 기부자 모임)’ 회원이 됐다. 양씨는 귤·망고 농사를, 배씨는 인삼 농사를 짓는다. 2008년 첫해 6명으로 시작한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은 올해 12월 기준 3299명으로 늘었다. 누적 기부액(약정 포함)은 3741억원에 달한다. 국내 최대 규모다. 출발은 성공한 기업인 중심이었지만, 최근에는 공무원, 회사원, 농민 등 우리 주변 이웃들의 기부가 대폭 늘었다.

양학량(77)씨는 “받는 건 빚이지만, 주는 건 행복”이라며 활짝 웃었다. /박상훈 기자

◇‘하우스 감귤’ 도입한 양학량씨

농사 비법도 대가 없이 공유… 최근엔 장기 기증 등록도 마쳐

“나누고 비우면 저절로 웃음 나”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운 자리엔 행복이 찾아온다.’

감귤 농부 양학량(77)씨의 제주도 서귀포 자택 대문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지난 12일 만난 양씨는 말할 때마다 웃었다. 수시로 입꼬리가 올라갔고, 검정 뿔테 속 눈은 초승달 모양이 됐다. 양씨는 “최근에 장기 기증 등록을 마쳤다”며 “다 나눠주고 가볍게 가고 싶다”고 했다. 그는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1억원을 기부했다.

양씨는 1988년 국내에 하우스 감귤을 처음 들여왔다고 한다. 그는 “대학 친구를 통해 일본의 하우스 오렌지 재배 관련 자료들을 받아 혼자 연구했다”며 “은행에서 어렵게 300만원을 빌려 집 앞 400평(1322㎡) 감귤 밭에서 하우스 재배를 시작했다”고 했다. 그해 8월 30일 하우스에서 난 감귤 191박스를 서울 가락동 청과시장에 팔았다. 국내엔 처음 나온 여름 감귤이었다. 겨울에 나오는 노지(露地) 감귤보다 10배 이상 비쌌다.

양씨가 하우스 감귤 노하우를 비밀로 했다면 큰돈을 벌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하우스 재배 방법을 주변에 모두 알렸다. 그는 “다 같이 버는 게 좋지 않으냐”고 했다.

그는 1994년 애플망고로 품목을 전환했다. 이 과정에서 양씨는 비싼 수입 벌이 아닌 제주도의 ‘쉬파리’를 이용한 망고 수정법을 개발했다. 첫해 생산 물량은 서울의 한 백화점에서 전량 매입했다. 물건이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 그는 이번에도 ‘쉬파리 수정법’을 다른 농가에 모두 가르쳐줬다.

그가 기부를 결심한 건 10여 년 전이었다. 당시 태풍으로 망가진 애플망고 하우스를 철거하면서 철근에 머리를 맞고 쓰러졌다. 양씨는 “수술을 받고 두 달간 병실에 누워 있으면서 언제 갈지 모르니 나눠주고 비우자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이후 망고 판 돈 일부를 꾸준히 모았다. 가족도 몰랐다. 그는 “농사가 잘된 해와 안 된 해의 매출은 5000만원 이상 차이가 난다”며 “그런데 그 돈이 없어도 사는 데 별 지장이 없다. 그리 생각하니 기부를 할 수 있겠더라”고 했다. 그는 2016년 1억원을 기부했지만 몇 년간 신원 공개를 거부했다. 그는 “아내와 자녀, 손자들에게 미안했다”며 “그런데 나중에 기부 사실을 알고 나선 ‘잘하셨다’고 하더라”고 했다.

양씨는 “받는 건 빚이어도, 주는 건 행복이더라”며 “나눠주면 마음의 응어리가 풀려 웃음이 절로 나고 건강해진다”고 했다. 그는 지금도 등산을 한다. 72세 때인 2018년엔 해발 4000m가 넘는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까지 올랐다.

배준식(70)씨는 “큰 부자만 기부를 하는 건 아니다”라며 미소 지었다. /김영근 기자

◇‘농부 1호’ 아너 회원 배준식씨

단칸방에서 아이들 키우면서도 연탄·쌀 등 작은 나눔 실천해

“누군가에 희망 줄 수 있어 행복”

전북 인삼밭 농부 배준식(70)씨는 충남 금산의 두 칸짜리 오두막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할머니와 부모님, 다섯 남매 등 여덟 식구가 한집에서 살았다. 학비 낼 돈이 없어 배씨와 세 살 위 형은 중학교 진학을 포기했다. 대신 농사일과 막노동 등 집안에 보탬이 될 만한 일거리는 다 했다. 발에 못이 박혔는데도 제대로 치료도 못 받고 일하러 나간 적도 있다고 한다. 어리다는 이유로 일당이 깎이기도 했다. 배씨는 “여유가 생기면 나처럼 없는 사람들에게 나눠주며 살겠다”고 다짐했다.

20대 중반 배씨는 맨손으로 고향을 떠나 전북 김제로 갔다. 김제에 먼저 정착한 외삼촌들이 인삼 농사를 도와달라고 했다. 배씨는 작은 인삼밭을 일구며 아내도 만나 단칸방 살림을 차렸다. 부부는 땅에 땀을 뿌렸다. 먹을 쌀이 부족해 볏짚에서 밤새 낟알을 골라내면서도 ‘농사는 땀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100평 남짓 하던 인삼밭은 30년 만에 12만평까지 늘어났다. 그는 “우리 가족은 물론 이웃들, 함께 일한 분들 덕분에 일군 것”이라고 했다. 아들 셋을 뒀다. 지금은 나이 등을 이유로 인삼 농사를 대폭 줄였다.

배씨는 2012년 막내아들 결혼식을 앞두고 ‘나눠주며 살겠다’는 어린 시절의 다짐을 다시 떠올렸다. 결혼 축의금 등 5000만원을 전북 사랑의 열매에 기부했다. 이후로 5년간 5000만원을 더 냈다. 전국 농부 최초로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이 됐으며, 대기업 없는 전북 지역의 ‘1호 아너’가 됐다. 배씨는 “큰 부자만 기부를 하는 건 아니다”라며 “나눔은 그저 조금 더 가진 사람이 어려운 이웃에게 ‘작은 희망’을 주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가난했던 어린 시절 교회 누나가 두 손에 쥐여준 노트 3권과 연필 2자루의 따스함을 지금도 기억한다고 했다.

배씨의 첫 기부는 1980년대 말이라고 한다. 세 아들과 수해 방송을 보다가 가족 저금통을 깨서 복구 성금으로 7만원을 냈다. 겨울마다 연탄 1만~2만장을 독거노인들에게 나눠줬고, 북한 어린이들이 굶주린다는 얘기를 듣고 쌀 1000가마를 보내기도 했다.

그가 ‘아너’ 회원이 된 이후 가장 보람을 느낄 때는 주변 사람들이 “당신 덕분에 나도 나눔을 시작했다”고 말할 때라고 했다. 배씨는 “각박해진 현대사회에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작은 희망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하다”며 “평생 나누고 베풀면서 살아갈 것”이라고 했다.

※ 아너 소사이어티 가입 문의 080-890-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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