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아에서 이집트·그리스 거쳐 고대 로마 통해 전세계로 와인 퍼져/조지아서 8000년전 신석기 와인유적 발견/땅속에 묻어 고정한 토기 크베브리서 껍질·씨 함께 발효·숙성/인류 최초의 와인은 크베브리 와인/화이트 르카치텔리·므츠바네 레드 사페라비 아로마 뛰어나
하얀 눈이 덮인 장엄한 캅카스(코카서스) 산맥. 그 위로 펼쳐진 눈이 부시게 파란하늘은 한 점 티끌 없이 가시거리를 무한대로 펼쳤다. 뭉게구름 떠가는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 올라간 이국적인 사이프러스 나무와 순수·열정을 모두 품은 백만송이 장미꽃밭. 그 뒤로 곱게 단풍든 포도밭까지 어우러지는 풍경은 마치 순정 만화의 한페이지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하다. 와인의 발상지 조지아. 프로메테우스·디오니소스의 신화와 8000년 와인 역사는 지금도 땅속에 단단하게 묻힌 크베브리(Qvevri)에서 살아 숨쉰다.
◆신석기에 탄생한 와인 발상지 조지아
그리스·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프로메테우스. 아마 그가 없었다면 인류는 쉽게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제우스에게 불을 훔쳐 인간에게 선물로 준 신이 바로 프로메테우스다. 하지만 ‘신들의 신’ 제우스가 가만 둘리 없다. 자신의 상징과도 같은 불을 훔친 죄로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토스를 시켜 절대 끊어지지 않는 쇠사슬로 프로메테우스를 높은 산꼭대기 절벽에 묶어 버린다. 날마다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는 형벌을 받게 된 프로메테우스. 하지만 신의 몸을 지녔기에 간은 금세 회복됐고 죽지도 못한 채 끊임없는 고통을 받는다. 사실 그는 앞을 내다보는 뛰어난 능력을 지닌 ‘예지의 신’. 자신이 형벌을 받을 줄 뻔히 알면서 불을 훔친데 서 인간을 향한 아낌없는 사랑을 엿볼 수 있다. 신화속에서 프로메테우스가 형벌을 당한 곳이 바로 ‘와인의 발상지’ 조지아 북쪽 코카서스 산맥 카즈베기(Kazbegi)산이다. 조지아인들은 ‘스테판츠민다(Stepantsminda)’로 부른다.
와인을 얘기할 때 또 한명의 신을 빼놓을 수 없다. 제우스가 인간 세멜레와 바람피워 낳은 디오니소스(바쿠스)다. 제우스 아내 헤라의 꾐에 넘어가 휘황찬란한 제우스의 본 모습을 본 세멜레가 불에 타버리자 제우스는 세멜레 뱃속 아기를 꺼내 자기 허벅지 심어 키운 뒤 헤라의 눈을 피해 소아시아 니사산의 요정들에게 맡겨 키운다. 디오니소스는 나중에 전세를 돌며 포도 재배와 와인 양조 기술을 퍼뜨리는 ‘와인의 신’으로 성장한다. 니사산이 어디인지 알수 없다. 다만 시리아, 이집트, 인도, 에티오피아라는 다양한 가설이 존재하는데 그중 한 곳이 조지아다.
이유가 있다. 와인은 조지아에서 시작해 그리스와 이집트를 거쳐 고대 로마로 전파된 뒤 세계로 퍼져 나갔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기 때문이다. 실제 조지아 남동부 신석기 유적지 가다칠리아 고라(Gadachirili Gora)에서 기원전 5800∼6000년전에 살던 부족들이 와인을 만든 흔적이 발견됐는데 전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와인 유적이다. 특히 와인을 양조하는 포도인 비티스 비니페라(Vitis Vinifera)종의 흔적이 같은 시기에 조지아 동부와 서부에서 모두 발견됐다. 조지아를 와인의 발상지로 보는 이유다. 1989년 휴 존슨이 자신의 책에 조지아가 와인의 요람임을 밝혔고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패트릭 맥거번 교수도 1998년과 2003년에 조지아를 방문한 뒤 그의 책 ‘고대 와인(Ancient Wine)’에서 코카서스 산맥이 와인의 고향임을 밝혔다.
◆조지아 최대 와인 산지 카헤티
카즈베기에서 코카서스 산맥을 따라 남쪽으로 이동하면 조지아 최대의 와인 산지 카헤티(Kakheti)를 만난다. 조지아 수도 트빌리시에서는 차로 2시간 거리다. 원산지보호지정(PDO Protected Designation of Origin)을 받은 곳은 모두 25곳이며 그중 카헤티가 최대 생산지로 2022년 기준 조지아 와인의 76.7%가 이곳에서 생산된다.
볼레로앤컴퍼니(Bolero&Company) 와이너리로 들어서자 마케팅 매니저 티나틴 엔델라제(Tinatin Endeladze)가 창고처럼 생긴 ‘마라니(Marani)’로 안내한다. 그는 “조지아 전통방식 와인을 만드는 크베브리가 보관된 곳을 마라니로 부르며 조상 대대로 이곳을 신성하게 여긴다”고 귀띔한다. 안으로 들어서자 우리나라 김장독처럼 생긴 크베브리가 땅속에 깊이 묻혀있다. 둥근 윗부분만 살짝 노출돼 있는 정도다. 1927년에 설립된 볼레로는 이런 크베브리 224개에서 전통방식 와인을 소량 생산한다. 와이너리 마당에는 지금은 사용하지 않지만 철길이 놓여있는데 예전에 크베브리 와인을 철도를 이용해 운반했다고 한다.
조지아 와인이 특별한 것은 바로 이 크베브리 덕분이다. 보통 화이트 와인은 양조할때 바로 포도를 압착해 즙을 빼내고 껍질과 씨는 버린다. 색상과 탄닌이 필요한 레드 와인은 껍질과 함께 발효하지만 발효가 끝나면 역시 포도즙만 남긴다. 껍질과 씨를 제거하지 않고 오래 담가두면 탄닌이 과도하게 추출되고 씨의 쓴맛까지 우러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크베브리는 이런 양조 상식을 완전히 뒤집는다. 오히려 껍질과 씨를 제거하지 않고 그대로 넣은 채 보통 3∼6개월동안 발효와 숙성을 거친다. 효모는 당연히 껍질에 묻어있는 자연효모만 쓴다. 이렇게 만드니 보통 화이트 와인에는 없는 떨떠름한 탄닌이 녹아든다. 껍질때문에 색도 맑고 투명한 보통 화이트 와인과 달리 볏짚색에서 호박색, 진한 오렌지색을 띠는 앰버(Amber) 와인도 만들어 지며 필터링도 하지 않는 경우도 많아 약간 탁한 와인이 탄생한다.
이런 크베브리 양조 방식은 전세계에서 조지아가 유일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유럽에서 크베브리와 비슷하게 생긴 토기 ‘암포라(Amphora)’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전혀 다르다. 암포라는 땅속 묻지 않고 세워놓고 사용하며 껍질과 씨를 제거한 와인을 숙성하는 용도로만 주로 사용한다. 하지만 크베브리는 한번 땅속에 묻으면 깨져서 사용할 수 없을 때까지 꺼내지 않는다. 따라서 100년 넘게 사용하기도 한다. 땅속에서 묻힌 크베브리는 항상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며 양조가 끝나면 국자처럼 생긴 도구로 일일이 와인을 떠서 옮긴다.
땅속에 묻혀 있는데 청소는 어떻게 할까. 양조가 끝나면 사람이 직접 안으로 들어가 솔로 크베브리 바닥과 벽을 박박 문질러 청소한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입구가 작아 성인이 들어가기 쉽지 않아 보인다. 함께 와이너리를 찾은 조지아 와인 전문가 마카 타라슈빌리는 “작은 사이즈는 성인 남성이 들어갈 수 없어 체구가 작은 여성이나 아이들이 들어가 청소했다. 질식사고의 위험이 있어 청소하는 동안 계속 노래를 불러 주위에 문제가 없음을 알리게 했을 정도로 극한작업이었다”고 설명한다. 실제 볼레로 마라니 벽에는 크베브리에 들어가는 남자의 조각작품이 걸려 크베브리 와인양조의 애환을 전한다. 지역 마다 크베브리에 담는 껍질과 씨의 비율이나 기간은 다르지만 카헤티 지역 방식을 크베브리의 양조방식의 원형으로 삼는다.
◆크베브리에서 탄생한 ‘신의 물방울’
탄닌이 들어간 화이트 와인이라니. 과연 맛은 어떨까. 볼레로에서 대표 품종 르카치텔리(Rkatsiteli)를 비롯해 무츠바네(Mtsvane), 키시(Kisi), 히흐비(Khikhvi) 등 다양한 화이트 품종을 시음했는데 충격적이다. 한번 맛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강렬한 인상으로 또렷하게 뇌리에 기억된다. 르카치텔리는 복숭아로 시작해 시간이 지나면서 말린 살구와 사과, 오렌지 마말레이드 등 굉장히 집중도 좋은 과일향이 비강을 가득 채우고 나중에는 꿀향도 살짝 올라온다. 산도가 뒤에서 잘 받쳐져 질리지 않고 밸런스가 좋다. 여기에 탄닌까지 더해지고 껍질과 씨앗에 추출된 다양한 맛과 향이 복합미를 선사해 묵직하게 입안을 채운다. 키시는 사과, 복숭아, 살구와 달콤한 마른 과일향이 도드라지고 탄탄한 질감을 자랑한다. 히흐비는 마른 과일향이 좀 더 풍부하고 야생화향도 더해진다. 므츠바네는 배, 꽃향이 매력적인 아로마틱한 품종으로 미네랄이 뛰어나다.
크베브리로 만들지만 탄닌은 과하지 않다. 이유가 있다. 크베브리는 아래쪽으로 갈수록 뾰족한 모양이다. 발효를 마치면 껍질과 씨가 맨 아래로 갈아 앉으면서 탄닌 추출이 저절로 멈춘다. 맨 위쪽은 효모로 덮여 산화도 어느 정도 막아준다. 모든 양조 과정을 자연에 맡기니 진정한 ‘신의 물방울’이다. 아마도 인류 최초의 와인은 이런 크베브리 와인이었으리라. 크베브리 와인 한잔에 8000년 역사가 담겨 있다고 생각하니 감개무량하다.
◆현대 기술 접목한 크베브리 맛집 실다
크베브리는 이처럼 오랜 전통이 담긴 양조방식이지만 단점도 있다. 바로 온도조절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포도즙은 발효과정에 열이 나는데 크베브리는 이를 통제할 수 없다. 온도가 너무 높아지면 탄닌 등이 너무 과하게 추출돼 와인을 망칠수도 있다. 이를 현대 기술로 극복한 곳이 2014년에 킨즈마라울리 마을에 설립된 실다(Shilda) 와이너리. 크베브리가 묻힌 마라니로 들어서자 한쪽 구석 땅에 묻힌 독특한 기계장치가 눈길을 끈다. 다른 와이너리 마라니에서 볼 수 없는 냉각장치로 냉각 파이프를 땅속으로 크베브리와 연결해 온도를 조절, 원하는 만큼 최적의 온도에서 색과 탄닌을 뽑아낸다. 특히 온도를 조절할 수 있으니 낮은 온도에서 와인의 맛과 향을 추출하는 저온침용, 콜드 마세라시옹(Cold Maceration)도 가능하다. 이렇게 하면 좀 더 신선한 과일향과 맛을 뽑아낼 수 있다. 실다는 특히 5일동안 저온 침용해 신선한 과일맛을 지닌 매력적인 와인을 만드는데 집중한다. 보통 크베브리에서 길게는 6개월까지 발효와 숙성을 하지만 실다는 화이트 와인의 경우 낮은 온도에서 20∼23일 정도 발효한다. 레드 와인은 더 짧아서 젖산발효가 끝나면 2주만에 곧바로 크베브리에서 와인즙만 분리한다. 크베브리에서 발효만 하고 숙성은 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니카 페라제(Nika Peradze) 실다 와이너리 CEO는 “사실 옛날 크베브리는 내벽과 외벽이 있어 그 사이로 물을 흘려보내는 방법으로 발효때 온도를 낮출수 있었다. 하지만 후대에 만들어진 크베브리는 이중벽으로 만들지 않는다. 따라서 발효때 온도가 올라가는 것을 막을 수 없다. 크베브리의 온도가 너무 올라가면 와인의 향을 너무 많이 잃을 수 있기 때문에 온도를 떨어뜨리는 현대적인 냉각장치를 조지아에서 처음으로 개발해 설치했다. 껍질과 너무 오래두면 탄닌이 과도하게 배출될 수 있고 껍질이 산도를 흡수해 산도는 없고 탄닌만 가득한 와인이 만들어 질수 있기 때문에 너무 오래 크베브리에서 침용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크베브리로 만들지만 현대 기술을 접목해 신선한 과일향에 집중하니 와인들이 전반적으로 산뜻하다. 또 실다는 포도나무 수령도 25년 이상된 올드바인을 사용하는데 보통 15년이 지나면 포도의 품질이 눈에 띄게 좋아진다.
12세기 조지아 유명한 시인의 이름에서 와인 이름을 가져 온 루스타밸리(Rustaveli)는 이처럼 신선한 실다 크베브리 와인들의 매력을 잘 느낄 수 있다. 특히 올드바인으로 만든 키시 앰버와 사페라비가 돋보인다. 집중도가 좋으면서 신선한 과일향과 산도를 잘 잡았다. 카카바제(Kakabadze)는 유럽방식으로 만든 와인으로 르카치텔리와 사페라비 품종이 글로벌 시장에서도 통하는 선호도 높은 스타일로 빚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실다는 유럽방식으로 양조하지만 수확을 전통방식으로 아주 특별한 와인, 키르케(Kirke)를 생산한다. 레이블엔 소파에 앉은 우아한 여성이 그려졌고 왼쪽 하단에 ‘Dark Harvest 2022’라 적혔다. 반드시 어두운 밤에 여자만 포도밭에서 들어갈 수 있으며 보름달이 떴을 때 시작해 일주일동안 지속된다. 밤에 수확하는 이유는 포도의 신선도를 잘 유지하기 위해서다. 즙을 짜 탱크까지 넣는 작업을 태양이 뜨기 전에 마쳐야 하기에 반경 50km 지역 포도만 수확해서 만든단다. 레드 키르케는 사페라비(Speravi)로 만들며 나파레울리(Napareuli) PDO 지역 생산 포도를 사용한다. 화이트 키르케는 4개 품종을 섞어서 만든다. 안타깝게도 올해는 키르케 와인을 만들지 못했다. 9월28일 보름달이 떴지만 날씨가 너무 안좋아 수확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사페라비로 만든 달콤한 주정강화와 브랜디 차차도 맛볼 수 있다. 보통 차차는 와인을 만든 찌꺼기를 재발효해 증류해서 만들지만 실다는 와인을 바로 증류해서 만들기 때문에 순도가 매우 뛰어나다.
◆슈미에선 “소원을 말해 봐”
카헤티 치난달리(Tsinandali) 마을에선 슈미(Shumi) 와이너리를 만난다. 작지만 알찬 와인박물관이 있어 조지아 와인 역사를 가볍게 둘러보기 좋다. 와이너리로 들어서자 파란색 조지아 전통 복장을 멋지게 차려입은 남성 4중창단이 춤을 곁들인 아름다운 화음으로 전통 민요를 들려주며 일행을 맞는다. 푸른 하늘과 포도밭이 어우러지니 마치 천상의 노래가 울려 퍼지는 듯하다. 박물관에는 조지아에서 와인이 전파된 경로도, 슈미 와이너리가 직접 복원한 기원전 1200년 크베브리, 기원전 1800년 와인잔 등 다양한 유물이 전시돼 있다.
작은 물레방아가 힘차게 물살을 돌리는 야외정원에는 와이너리 로고에 사용하는 신화속 동물 조각상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귀에 대고 조용히 소원을 얘기하면 들어 준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카헤티 지역 와이너리를 찾는 여행자들에게 슈미 와이너리가 인기가 높다. 작지만 소중한 소원 하나 빌어본다. 조각상 옆 야외 테이블에선 여행자들이 슈미의 다양한 음식과 와인을 즐긴다. 한국 여행자도 있는 걸 보니 꽤 소문이 났나보다. 와인숍도 갖춰 나들이하기 좋다.
슈미는 고대 조지아어로 ‘최고의 와인’ ‘순수한 와인’이란 뜻. 놀랍게도 카헤티에선 유일하게 크베브리에서 숙성한 스파클링 쇼빌리(Shobili)를 생산한다. 치누리와 므츠바네 카후리(Mtsvane Kakhuri ·카헤티 지역에서 생산되는 므츠바네를 구분하기 위해 므츠바네 카후리로 부른다)를 크베브리에서 2∼3개월 발효한 뒤 샴페인과 똑같이 병에서 2차 발효와 숙성을 거치는데 살짝 탄닌감이 느껴지고 크베브리가 주는 깊은 맛과 풍부한 이스트향이 쭉쭉 올라오며 식욕을 돋운다. 조지아 전통 만두 힌칼리, 튀긴 가지 안에 호두, 마늘, 양파를 갈아서 만든 소를 넣은 니그브지아니 바드리자니 함께하니 잊을 수 없는 맛에 미소가 저절로 지어진다. 쇼빌리는 조지아말로 ‘다시 태어난다’는 뜻. 생동감 넘치는 산도와 버블, 효모향이 잘 어울리는 쇼빌리 한모금 마시니 이름처럼 오랜 여행이 지친 몸과 마음이 리셋되는 듯, 활기를 찾는다.
슈미 이베리울리(Iberiuli)는 프리미엄 시리즈로 화이트 와인을 크베브리와 일반 유럽방식 모두 만든다. 레이블에 크베브리를 그려 구분이 쉽도록 했다. 카헤티 대표 화이트 생산지인 치난달리(Tsinandali) PDO 지역 와인도 빼어나다. 유럽 방식으로 만드는 치난달리는 르카치텔리를 주품종으로 므츠바네 카후리를 최대 15%까지 섞는데 바디감이 있으면서 살구, 복숭아, 꽃향이 상큼하게 잘 어우러진다. 크베브리에서 만드는 히흐비, 키시는 적당한 탄닌과 풍성한 과일향이 돋보인다.
레드 와인은 살로메(Salome)는 슈미의 플래그십으로 아주 잘 만든 사페라비가 어떤 매력을 지니는지 잘 보여준다. 오크에서 발효와 숙성을 거친 사페라비 100% 와인으로 우아한 향수를 뿌린 듯한 아로마가 정신을 혼미하게 만든다. 레드체리, 다크체리 등 검붉은 과일향과 매끄러운 질감의 탄닌이 돋보이고 산도가 잘 받쳐주면서도 시간이 흐르면 다양한 아로마가 풀어 헤쳐진다.
추비니 와인 셀라(Chubini Wine Cellars)는 넓은 정원에 글램핑 시설을 갖춰 여유있게 와인을 즐기기 좋다. 한쪽구석에서 포도 나뭇가지 장작에 올린 꼬치구이 므츠바디가 맛있게 익어가고 있다. 마당에는 커다란 크베브리가 코카서스 산맥을 배경으로 놓인 풍경이 아름답다. 장인 정신 아주 소량 생산하는 곳으로 짙은 오렌지 빛이 도는 크베브리 숙성 르카치텔리 앰버 와인을 즐길 수 있다.
◆사페라비 챔피언 트빌비노
트빌비노(Tbilvino)로 들어서자 끊임없이 펼쳐진 거대한 양조 스틸탱크가 마당을 가득 채우고 있다. 탱크 위로 올라갈 수 있도록 보행시설을 만들어 놓았다. 조지아국립와인청 홍보담당 마리암 메트레벨리(Mariam Metreveli)를 따라 꼭대기에 올라서니 태양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탱크와 파란하늘, 장엄한 코카서스 산맥과 어우러지는 경이로운 풍경을 만난다. 조지아 최대 생산량을 자랑하지만 가족경영 와이너리다. 1962년 와이너리를 처음 시작할때 트빌리시에서 설립해 이런 이름을 지었다. 1999년부터는 2세대인 주라브 마그벨라쉬빌리(Zurab Margvelashvili)와 조르주 마그벨라쉬빌리(Giorgi Margvelashvili) 형제가 이끌고 있다. 트빌비노는 2009년 조지아 와인 수출 1위 와이너리로 성장했고 2012년 카헤티에 새 와이너리를 오픈했다.
현재 와이너리 2곳에서 연간 750만병을 생산하며 카헤티 대표적인 사페라비 생산지인 무크자니(Mukuzani)와 킨즈마라울리(Kindzmarauli) 등 카헤티 6개 지역에 분산된 포도밭 405ha를 보유하고 있다. 2013년 이탈리아 와인메이커들을 영입했고 2020년 사페라비 와인이 유명한 와인경진대회인 영국 런던 국제와인챌린지(IWC)에서 레드 와인 챔피언으로 선정되는등 디캔터, 베를린 와인 트로피 등 여러 대회에서 다양한 메달을 수상하면서 명성을 떨치고 있다.
조지아 대표 화이트 품종인 르카치텔리와 므츠바네 품종의 매력을 잘 살린 점이 돋보인다. 두 품종을 섞는 치난달리 PDO 지역 와인 역시 마찬가지다. 조르주는 “르카치텔리는 기후변화에 굉장히 강하다. 어떤 기후에서든 매우 신선하고 상큼한 맛을 내고 산도도 높다. 여기에 므츠바네를 섞으면 풍부한 과일향과 아로마를 보충해 준다. 사실 조지아 와인들은 향이 강렬한 품종은 아니다. 입안에서 훨신 더 맛있고 여운이 길게 이어지는 스타일인데 므츠바네는 예외적으로 아로마가 굉장히 강렬한 품종”이라고 설명한다. 트빌비노 므츠바네 단일 품종 와인은 6∼7일동안 포도즙을 위 아래로 골고루 섞는 펌핑오버와 발효전 껍질과 함께 저온 침용한다. 또 발효를 마친 효모앙금과 함께 숙성해 보다 풍부한 향을 더했다. 조르즈는 “서울에 두번 다녀왔는데 한국 소비자들의 와인 지식이 굉장히 풍부하고 특히 젊은층이 와인을 잘 알고 있어 놀랐쪽다”고 한국 와인시장의 수준을 높게 평가했다.
크베브리로 만드는 르카치텔리와 므츠비바니(Mtsvivani)도 놀랍다. 이름이 비슷하지만 므츠바네와 므츠비바니는 전혀 다른 품종이다. 트빌비노는 므츠비바니를 1.2ha 정도 소량재배한다. 조르주는 “르카치텔리가 훨씬 더 구조감과 바디감이 있으며 마른 사과과 허브향 살짝 난다. 므츠비바니는 약간 더 우아한 스타일이이고 상큼한 산도가 매력적인 와인”이라고 설명한다. 키시 품종으로 만든 앰버와인도 크베브리에서 만들지만 신선한 과일향과 산도가 돋보인다. 조르주는 “보통 크베브리에서 발효와 숙성을 하면 껍질 성분이 많이 우러나 묵직하고 강한 화이트 와인이 만들어진다. 하지만 이 앰버 와인은 스틸 탱크에서 숙성해 산뜻하다. 이런 앰버 스타일을 내가 고안했다”고 설명한다.
트빌비노의 사페라비는 IWC 챔피언에 올라 와이너리의 명성을 가져온 품종이다. 조르주는 “과육조차 붉은 사페라비는 조지아에서 가장 우수한 품종은 아니지만 조지아의 정체성이 담겼고 조지아 와인의 명예를 만든 시그니처 품종”이라고 치켜세운다. 스틸 탱크와 크베브리에서 숙성한 사페라비 모두 품종의 특징을 아주 달 담았다. IWC 챔피언은 세계 최고의 와인임을 뜻한다. 골드를 받은 와인들을 따로 심사해 트로피 와인을 선정한 뒤 이 트로피 와인들을 대상으로 다시 한번 경쟁해 우승하면 챔피언으로 선정된다. 트빌비노 사페라비가 최고의 수준이라는 사실을 잘 알수 있는 대목이다.
◆이메레티 유일 PDO 스비리 화이트
크베브리 양조방식은 조지아 동부와 서부가 조금 다르다. 서부 이메레티(Imereti)에서는 크베브리를 추리(Curi)라고 부르며 껍찔과 씨는 3분의 1정도만 넣도 발효기간도 한달 정도로 짧은 편이다.
이메레티의 유일한 PDO가 스비리(Sviri). 르트벨리시(Rtvelisi)는 카헤티의 와이너리이지만 스비리 와인도 생산한다. 스비리 화이트는 치츠카(Tsitska), 촐리코우리(Tsolikouri), 크라후나(Krakhuna)를 섞는다. 치츠카는 와인의 골격인 바디감과 구조감을 만들고 배, 레몬, 멜론, 꿀향이 매력적이다. 촐리코우리는 조지아에서 르카치텔리 다음으로 많이 재배하는 품종으로 시트러스, 화이트 풀럼, 노란과일, 꽃 풍미를 지니며 치츠카와 연인처럼 찰떡궁합이다. 크라후나는 힘과 신선함, 꿀향을 더해준다.
◆장미꽃밭 펼쳐진 동화세상 바지수바니
바지수바니 에스테이트(Vazisubni Estate)로 들어서자 순백의 장미와 불타는 빨강 장미가 조지아 사이프러스 나무, 포도밭과 어우러지는 동화같은 풍경에 탄성이 터진다. 나이가 지긋한 조르지 무슈비도바제(George Mshvidobadze) 수석 디렉터이자 CEO가 “여러분들을 환영하기 위해 어제 부랴부랴 심었다”며 너스레를 떤다. 사실 포도밭에 가면 장미꽃을 쉽게 볼수 있다. 포도나무는 병충해를 미리 감지하는 지표식물이기때문이다. 하지만 이처럼 아름다운 장미정원을 조성한 와이너리는 처음이다.
바지수바지는 와이너리 이름이지만 와인산지 이름이기도 하며 ‘포도나무 구역’이란 뜻이다. 그만큼 카헤티 산지를 대표하는 와이너리.
1891년에 조지아의 젊은 귀족 술칸 차브차바제(Sulkhan Chavchavadze)가 설립한 와이너리로 13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한다. 설립당시 포도밭 20ha와 크베브리 30개에서 와인 1만8000ℓ를 생산했다. 1800년대 후반 차브차바제 가문의 빚을 견디지 못해 아름다운 궁전과 와이너리를 매각했고 소비에트연방시절 국유화되는 부침을 겪었다. 다행히 현재 수석 와인메이커를 맡고 있는 라도 우주나쉬빌리(Lado Uzunashvili)가 2013년 사업가이자 정치인 마무카 카자라제(Mamuka Khazaradze), 바르디 자파리제(Badri Japaridze)와 함께 바지수바니 에스테이트를 설립해 포도밭을 복구하고 18세기 궁전도 8년에 걸쳐 복원했다.
바지수바니는 35ha 규모 자가 포도밭의 포도만 사용해 연간 30만병을 생산하고 18개국에 수출한다. 바지수바니, 로열 크반츠카라(Royal Khvanchkara), 조지아 선(Georgian Sun) 등 3개 와이너리가 ‘조지안 와인 그룹’을 이룬다. 9번치(9Bunshes)는 바지수비니의 열정이 고스란히 담겼다. 포도나무 한 그루에 포도송이 9개만 남길 정도로 가지치기를 통해 생산량을 통제한다. 덕분에 맛과 향이 응축된 레드 와인이 탄생했다. 9번치 화이트는 키시 40%, 무츠바네 25%, 히흐비 20%, 르카치텔리 15%를 섞었다. 카헤티를 대표하는 화이트 품종 4종이 망라된 카헤티 화이트 와인의 정수로 평가받는다. 시트러스 과일로 시작해 복숭아와 열대과일까지 화려한 과일향이 펼쳐진다. 9번치스 레드는 사페라비와 사페라비 부데슈리를 절반씩 섞었다. 떼루아를 그대로 순수하게 보여주기 위해 오크숙성을 하지 않았다. 크베브리 사페라비 와인들은 30∼40일 정도만 크베브리에서 숙성해 적당한 탄닌을 유지한다.
바지수바니는 휴가를 즐기기 좋은 곳이다. 창밖으로 펼쳐진 코카서스 산맥과 포도밭을 즐기는 아름다운 부띠끄 호텔 객실, 미쉐린 가이드 스타 빰치는 레스토랑, 럭셔리한 야외 수영장까지 갖춘 완벽한 리조트 와이너리다. 따뜻한 햇살 쏟아지는 풀사이드 테이블에 앉는다. 무츠바네 카후리, 키시, 히흐비를 섞은 크베브리 앰버 와인 한잔하니 온 세상을 다 가진 행복감이 밀려든다.
최현태 기자는 국제공인와인전문가 과정 WSET(Wine & Spirit Education Trust) 레벨3 Advanced, 프랑스와인전문가 과정 FWS(French Wine Scolar), 뉴질랜드와인전문가 과정 등을 취득한 와인전문가입니다. 매년 유럽에서 열리는 세계최대와인경진대회 CMB(Concours Mondial De Bruselles) 심사위원, 소펙사 코리아 소믈리에 대회 심사위원을 역임했고 2017년부터 국제와인기구(OIV) 공인 아시아 유일 와인경진대회 아시아와인트로피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보르도, 부르고뉴, 상파뉴, 루아르, 알자스와 이탈리아, 호주, 독일 체코, 스위스, 조지아, 중국 등 다양한 국가의 와이너리 투어 경험을 토대로 독자에게 알찬 와인 정보를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