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육사·의사·성폭력상담사가 말한다, 내게 글쓰기는 ○○다
‘2023 올해의 저자’는 나이는 30~60대 , 직업은 학자·사육사·의사 등으로 다채롭다. 이들은 ‘글쓰기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글을 길어 올리게 한 삶의 조각을 저마다 꺼내 보였다. 키워드는 일상(강명관)·사랑(고명재)·실천(김보화)·신념(송영관)·행복(이꽃님)·기여(최지혜)·명상(정희원).
누구에게나 있을 이 조각들은 각자의 ‘루틴(일련의 습관)’과 맞물리면서 빛을 발한다. 나를 빛나게 만든 삶의 조각은 무엇인가. 일상 속 어느 귀퉁이에 숨어 있는가. 저자 7명이 스스로 생각하는 ‘나’를 이야기했다.
◇방대한 古書를 들춰내 조선 역사 새롭게 해석
노비와 쇠고기
푸른역사 | 704쪽 | 3만9000원
강명관 부산대 명예교수
낡은 고서 더미를 뒤지며 허를 찌르는 새로운 통찰을 통해 역사를 다른 시각으로 해석할 수 있게 한다. ‘우리 시대의 고전학자’ 중 한 명으로 꼽히는 강명관(64) 부산대 명예교수는 올해 낸 ‘노비와 쇠고기’에서 성균관 주변 ‘반촌’에 현미경을 들이대 조선 음식 문화의 중심에 쇠고기가 있었고 그것을 팔던 노비들이 왕조의 버팀목이 됐음을 밝혔다.
2년 전 일찍 퇴직하고 서울 북한산 자락으로 이사한 그는 “농부가 농사짓듯이 내게 책 읽고 글 쓰는 일은 일상적이고 당연한 일”이라고 했다. 숲과도 같은 방대한 문헌의 세계에서, 그의 눈에만 보이는 꽃과 물과 바위를 남에게 알려주는 게 소업(所業)이라는 것이다. 새벽 4~5시에 일어나 읽고 쓰는 일에 매진한 뒤 산책하고 돌아와 다시 작업하고 저녁 9시쯤 잠자리에 드는 일상을 이어가고 있다.
◇”펜 들면 사랑이 샘솟아” 첫 시집 1만부 팔렸다
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
고명재 시집 | 문학동네 | 108쪽 | 1만원
고명재 시인
고명재(36)의 첫 시집은 따뜻한 눈 같다. 죽음과 사랑, 이질적인 것들이 만나 생기는 순간에 얼굴을 파묻고 싶게 만든다. 작년 12월 출간돼 약 1만부를 찍었다. 2020년 등단한 신인의 이례적 성공. 그는 “사랑하는 마음이 글을 쓰면 샘솟아 난다”고 했다. “떠난 사람들을 다시 만나는 건 불가능하지만, 시나 글로 쓸 때에는 이것들이 가능한 것들로 전환돼 아름다워요. 글쓰기라는 최대치의 자유를 손에 쥔 채로, 사랑을 잘 해내고 싶어요.”
시인은 “올해는 어느 곳에서든 쓰는 것을 연습하고 있다”고 했다. 이름이 알려지면서 활동이 많아진 탓. “글을 마음과 몸 가까이에 두르고 다니면서, 일상 속에서 시의 얼굴을 마주 보려고 해요. 그럼 마치 꽃다발을 들고 일상을 살아가는 기분이 들어요.”
◇성폭력 상담 경험으로 성범죄 전문 로펌 추적
시장으로 간 성폭력
휴머니스트|392쪽|2만1000원
김보화 젠더폭력연구소장
김보화(43) 젠더폭력연구소장의 이 책은 2006년부터 성폭력 피해자 상담 지원을 해온 김 소장의 2021년 이화여대 여성학과 박사 학위 논문을 바탕으로 했다. ‘n번방 사건’ 이후 성범죄 피의자들의 여성 단체 후원 움직임이 가속화됐는데, 배경에는 감형을 노리고 이를 부추기는 성범죄 전문 로펌들이 있다는 주제를 풍부한 현장 사례로 떠받치며 치밀하게 연구했다.
김 소장에게 글쓰기란 ‘실천’. “페미니스트가 되기로 한 날부터 여성의 삶을 고민하며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글을 썼다”는 것이다. 그는 “예리한 통찰을 담은 글을 읽었을 때, 시급한 개입이 필요한 사회문제를 알게 되었을 때의 울림을 메모로 남긴 것이 글쓰기로 연결될 때가 많았다”면서 “세상의 많은 글과 사건이 글쓰기의 시작과 목적이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푸바오 일상 남기고파 문예창작과 만학도로
전지적 푸바오 시점
위즈덤하우스|248쪽|2만2000원
송영관 에버랜드 사육사
직업적 ‘신념’으로 글을 쓰는 사람. ‘송바오’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송영관(44) 에버랜드 사육사 이야기다. 푸바오의 시점에서 푸바오의 일상을 담은 그의 에세이는 지난달 출간돼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예스24 에세이 부문 연간 베스트셀러 3위에 올랐다.
송 사육사는 이 책을 쓰려고 문예창작과에 진학해 주경야독하고 있다. “야생동물의 이야기를 대중에게 호소력 있게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글감을 찾기 위해 집중할 시간을 차 안에서 벌었다. 출퇴근 시간 운전하며 글감을 고민하고, 떠오른 아이디어를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주차장에 도착하자마자 차 안에서 메모하고 정리한다. 그는 “한창 책을 쓸 땐 생각의 흐름이 끊기는 게 싫어 목적지에 가까워졌지만 일부러 주변을 더 돌면서 드라이브를 하곤 했다”고 말했다.
◇가족 간 상처를 위로한 청소년 문학계의 스타
여름을 한 입 베어 물었더니
이꽃님 소설 | 문학동네 | 192쪽 | 1만2500원
이꽃님 소설가
이꽃님(34)은 최근 청소년 문학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소설가다. ‘여름을 한 입 베어 물었더니’는 청소년들이 가족에 얽힌 상처를 딛고, 자신의 삶과 화해하는 소설. 올해 이를 포함해 소설 두 권을 발표하며 그 자리를 공고히 했다. 지난 5년 사이 판매된 책이 약 50만부. 영화나 드라마 제작을 앞둔 작품도 다수여서 전 연령의 독자가 앞으로 그를 만날 수 있을 테다.
이꽃님은 글을 쓰는 이유로 ‘행복’을 꼽았다. “글을 쓰는 일은 나를 활기차게 만들고, 나를 빛나게 하고, 나를 가장 나답게 해요. 독자에게 즐거움이나 위로를 주기 위해서도 쓰지만, 글을 쓰는 것이 행복하기에 씁니다.” 꾸준함이 그의 글을 빛나게 한다. “작업실에서 따뜻한 두유라테를 한 잔 먹으며 글을 써요. 세 시간 내에 하루 분량을 다 해내는 편입니다.”
◇죽음을 맞이하기 전… ‘건강한 노화’ 화두 던져
당신도 느리게 나이 들 수 있습니다
더퀘스트|288쪽|1만7800원
정희원 서울아산병원 교수
한동안 ‘웰다잉’ 열풍이 불었다. 정희원(39) 서울아산병원 노년내과 교수는 죽음 이전에 ‘어떻게 나이 들 것인가’라는 화두를 던졌다. 노년을 맞이하는 태도가 아닌 신체 변화의 측면에서, ‘가속 노화’라는 개념을 통해 건강한 나이 듦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개인의 행복뿐 아니라 빠르게 고령화하는 한국의 사회적 비용과도 직결되는 문제다.
정 교수는 “집중해서 글을 쓰면 달리기를 하고 ‘러너스 하이’를 느낄 때처럼 도파민이 분비되고 스트레스가 풀린다”고 했다. HWP 기본 글꼴로 A4 용지 한 쪽을 꽉 채웠을 때, MS워드와는 다른 고유의 느낌이 든다고 한다. ‘지속 가능한 나이 듦’(2021)에 이어 올해 초 이 책을 펴냈고, 최근 ‘감속 노화’ 실천법을 담은 ‘느리게 나이 드는 습관’으로 저술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1920년대 백화점에서 경성 사람의 삶을 탐구
경성 백화점 상품 박물지
혜화1117|656쪽|3만5000원
최지혜 근대건축재현 전문가
‘딜쿠샤, 경성 살던 서양인의 옛집’(2021), ‘영국 장식미술 기행’(2013), ‘앤틱 가구 이야기’(2005)…. 근대건축 실내 재현 전문가 최지혜(51)가 그간 낸 책이다. 이번 책에선 1920~1930년대 조선 근대화의 상업적 최전선으로서 경성의 백화점을 해석한다. 경성 여러 백화점에서 발행한 층별 안내도를 참고해, 경성 사람들의 문화와 생활을 미시적으로 탐구한다.
그는 “역사학의 ‘마이너리티’인 내 연구 분야 결과물이 어딘가에서 쓰임이 있길 바라며 글을 쓴다”면서 “저출산 시대에 사람 대신 책으로라도 기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집에서 도보 7분 거리인 연구실에 아침 9시쯤 출근해 커피를 내리고, 논문 등 자료를 바탕으로 오후 4시 반쯤까지 쓴다고 했다. 5시에는 반드시 퇴근. 가족의 식사 준비를 위해서다.
[누가 선정했나]
북칼럼 필진 박소령 퍼블리 대표, 우석훈 경제학자, 이수은 독서가, 장강명 소설가
서점 MD 구환회·유한태·이주호·최지은(유아)·최지은(과학)·한재국·한지수(교보문고), 김유리·박은영·손민규·안현재(예스24), 김효선(알라딘)
도서관 사서 고정원(구산동도서관마을) 외 47명
문화부 기자 곽아람, 유석재, 이영관, 이태훈, 채민기
(총 69명·가나다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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