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상징 ‘용두산’, 왜관 시절 일본인들이 붙인 이름이라네[박종인의 ‘흔적’]
[박종인 기자의 ‘흔적’] 용두산공원에 얽힌 코미디 같은 역사
부산 중구 ‘용두산공원’에는 부산을 상징하는 조형물이 있다. 용(龍)이다. 기단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여기는 이 나라의 관문 국토의 정기가 서려 맺힌 곳/ 백두산 힘차게 뻗어 내린 금정산맥 앞바다 푸른 물결 태평양 맞물렸네.’ 1973년 이은상이 지은 시다. 제목은 ‘부산탑 찬가’다. 지금 부산타워라고 부르는 부산탑은 그해 용두산공원에 건립된 높이 120m짜리 탑이다.
공원 입구에 용두산공원 안내문이 있는데, 이렇다. ‘옛부터 소나무가 울창하여 송현산(松峴山)이라 불렀고, 초량소산(草梁小山)이라고도 하였다. 산의 형세가 용이 백두대간을 타고 내려와 바다를 향해 뻗어가는 용의 머리에 해당하여 용두산이라고 불렸다.’ 글이 이어진다. ‘1957년에 이승만 대통령의 호를 따서 우남공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1960년 4·19 혁명 후 다시 용두산공원으로 환원되었다.’ ‘부산탑 찬가’, 용 조형물과 같은 맥락이고, ‘독재자’ 이승만 흔적을 제거해 본명을 되찾았다는 내용이다.
하나 더 보자. 한국학중앙연구원이 펴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산세가 용 모양이어서 침범해 오는 왜구들을 삼켜 버릴 기상이라 하여 용두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자, 결론부터. 공원이 있는 이 산 이름, ‘용두산(龍頭山)’은 백두대간이고 뭐고 아무 상관이 없다. 용은 ‘왜구를 삼킬 기상을 가진’ 용도 아니다. 용두산은 19세기 그 산기슭에 살던 바로 그 ‘왜구’, 일본 대마도 사람들이 지은 이름이다. 용두산은 조선 후기 초량왜관 시절 일본인이 지은 이름이고 용두산공원은 식민 시대 부산 거류 일본인들이 만든 공원이다. 따라서 4·19 이후 ‘환원’했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아래 주요 내용은 한국지명학회 수석부회장 이근열의 ‘일본 전관 거류지 용두산, 용미산 지명 변천 연구’(지명학 38호, 한국지명학회, 2023)에서 인용했다.
우남공원에서 용두산공원
1955년 12월 22일 용두산에서 ‘충무공 동상 제막식’이 있었다. 대한민국 육군 제2군관구 사령부 창설 1주년 기념식도 이날 열렸다. ‘우남공원비 제막식’도 함께였다.(1955년 12월 22일 ‘부산일보’) 해방되고 10년이 되던 해였다. ‘우남(雩南)’은 대통령 이승만의 호다. ‘이대통령 탄신 경축 부산위원회’라는 조직이 주도해 만든 사업이었다.(1955년 3월 10일 ‘조선일보’) 서울 남산에도 그 해에 이승만 동상이 건립됐다.
1960년 4·19가 터졌다. 4월 26일 대통령 이승만이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다음날 이승만은 국회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바로 그날 부산에 거주하는 노인 8명이 ‘부산일보’에 건의문을 냈다. 이들은 ‘우남공원에는 이충무공 동상이 서 있을 뿐 아니라 권력에 아부하는 부패인들에 의하여 우남공원이라고 불리어진 것이니 제2의 민주해방을 맞아 충무공원으로 개칭돼야 한다’고 주장했다.(1960년 4월 28일 ‘부산일보’)
5월 21일 부산시는 부산시의회 66회 임시 의회에 우남공원 개명을 요구했다. 부산시 또한 “이승만 박사 제80회 탄신 기념 행사 때 독재 정권에 아부하던 기관장들에 의해 우남으로 명명됐다”고 주장했다.(1960년 5월 21일 ‘부산일보’)
6월 16일 대한민국 국회에 ‘독재 정치색 일소 건의안’이 야당에 의해 제출됐다. 내용은 ‘각종 공공 시설 등에 명명된 우남회관, 우남공원 등 명칭을 고쳐 사회의 공기 일신’이었다. 8월 8일 부산시의회 결의에 따라 우남공원이 ‘용두산공원’으로 개명됐다. 9월 21일 ‘우남공원비’ 비문이 갈려나가고 그 자리에 ‘용두산공원’ 다섯 글자가 새겨졌다.(이상 해당 날짜 ‘부산일보’)
초량왜관과 어디에도 없는 용두산
용두산이 있는 광복동은 대마도 사람을 중심으로 일본인 거주지인 초량왜관이 있던 곳이다. 초량왜관은 1678년 음력 4월 23일 ‘역군 50여 만명’과 ‘수군 월 200명’을 차출해 1년 2개월 만에 완성한 대마도민 집단 거류지다.(1677년 2월 12일 ‘숙종실록’, ‘왜관이건등록(倭館移建謄錄)’) 1678년 당일 오전 임시로 사용 중이던 두모포왜관에서 거주민 454명이 초량으로 이사했다. 규모는 11만평이었다.
왜관 외부에는 두꺼운 벽이 설치됐다. 출입은 철저하게 통제됐다. 허가 없이 외출하는 일본인은 처형한다는 법도 정해졌다. 정기적으로 왜관 입구에서 장이 설 때 조선인과 일본인 거래가 이뤄졌다. 왜관 내부에서 벌어진 대소사는 왜관장인 일본인 관수(館守) 소관이었다.
초량왜관이 설치되고 34년 뒤 숙종이 묻는다. “청나라 사람은 개시(開市) 뒤에 즉시 돌아가지만 왜관은 어느 해 창설된 것인지도 알지 못하겠고 크게 집을 지어 다른 나라 사람을 항상 머무르게 하니 진실로 괴이한 일이다.”(1712년 4월 22일 ‘숙종실록’) 자기가 설치를 허가해 주고 완공까지 본 왕이 그 존재를 괴이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중앙정부는 무관심했다.
1840년에 김정호가 만든 대동여지도에는 초량왜관이 네모로 표시돼 있다. 위 안내문에 나오는 ‘송현산’은 왜관에서 북서쪽에 표시돼 있다. 안내문은 여기서부터 틀렸다. 조선과 실질적으로 격리돼 있는 왜관 내부 지형이라 표시가 돼 있지 않다. 간혹 왜관 내 산을 ‘초량소산’이라고 언급한 기록은 눈에 띈다. 하지만 용두산으로 표기한 고지도나 문헌은 없다.(이근열, 앞 논문)
최초의 용두산, 조선귀호여록(朝鮮歸好餘錄)
1876년 일본 후쿠시마현 출신 한학자 이시바타 사다(石幡貞)가 쓴 ‘조선귀호여록(朝鮮歸好餘錄)’에 용두산이 처음 등장한다. ‘왜관 안에 산이 두 개 있다. 하나는 용두(龍頭)고 하나는 용미(龍尾)다. 바다로 돌출된 용미산에는 괴석이 많다. (여기에서 공부했던) 대마도 학자 아메노모리 호슈가 말한 용대(龍臺)가 오륙도인 듯하다. 용두산과 용미산은 이 용대에서 얻은 이름이리라.’ 이와 함께 책에는 용두산과 용미산을 포함한 왜관 일대 그림이 수록돼 있다.
지금 간척 사업으로 사라진 ‘용미산’은 1874년 사카다 모로토(坂田諸遠)가 쓴 ‘항한필휴(航韓必携)’에 처음 나온다. 원래 왜관 일본인들이 요부사키야마(呼崎山·호기산)라고 부른 언덕을 이 책에서 처음으로 ‘용미산’이라고 표기했다. ‘호기산’은 ‘앞에 지나가는 배를 부를 수 있는 언덕’이라는 뜻이다.(이근열, 앞 논문)
1899년 확정된 ‘용두산’ ‘용미산’
1678년 초량왜관 설치와 함께 용두산에 변재신사(辨才神社), 도하신사(稻荷神社), 금도비라신사(金刀比羅神社)가 설치됐다. 용미산에는 옥수신사(玉垂神社)가 설치됐다. 훗날 옥수신사에는 가토 기요마사도 합사됐다. 1899년 2월 4일 부산거류지회 결의에 따라 금도비라신사를 ‘거류지신사(居留地神社)’로 명칭을 바꿨다. ‘거류지신사’는 5개월이 지난 1899년 7월 8일 ‘용두산신사’로 다시 한번 명칭을 바꿨다. 용미산 옥수신사도 ‘거류지신사’로 개칭했다가 ‘용미산신사’로 다시 바꿨다.(’龍頭山神社史料'(龍頭山神社事務所, 1936). 김승, ‘개항 이후 1910년대 용두산신사와 용미산신사의 조성과 변화과정’, 지역과 역사 20, 부경역사연구소, 2007, 재인용)
신사에 이름이 붙은 ‘용두산’을 두고 식민 시대 일본인들도 의문이 많았다.
‘초량왜관 시대에 일본인은 용두산을 중산(中山)이라고 부르거나 또는 호기산(呼碕山)이라 불렀는데 이것을 용두산, 용미산이라 부르게 된 것은 1899년 5월 용두산신사의 개축 공사가 끝난 때부터다. 그런데 조선의 사적에는 모두 이 산을 송현산(松峴山)이라 지칭하고 있는데, 용두라는 이름으로 된 것은 과문한 탓이겠지만 아직 그 서적이 있다고 듣지 못하였다. 용미산은 원래 용두산과 이어졌기 때문인지 혹은 특별히 작은 언덕이었기 때문인지 현재로서는 아직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조선의 서적에는 무명의 언덕이다. 이 부근 지명 중 고서 가운데에서 용(龍)이라는 글자를 사용한 지명으로는 오직 우암포 가까이에 있는 용동(龍洞)이 발견될 뿐이다’(부산 갑인회, ‘일선통교사(日鮮通交史)’ 부부산사근대기(附釜山史近代紀) 제8장 종교(1916). 이근열, 앞 논문 재인용) 고문헌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식민지를 접수한 일본인 기록이니 왜곡’이라고 배척할 수 없는 구체적인 기록이다.
일본이 만든 용두산공원
용두산공원 조성은 천황 즉위를 기념하는 ‘어대전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부산상업회의소에서 제기하면서 시작되었다. 1915년 7월 22일 부산상업회의소 중역 회의에서 중역회 회두 하자마 후사타로(迫間房太郞)가 부산에 공원을 만들자고 제안해 시작됐다. 부산부(부산시)와 상업회의소가 각각 행정과 자금을 출연해 그해 11월 10일 공원 공사가 시작됐고 이듬해 10월 15일 준공됐다.(김승, 앞 논문) 용두산공원은 1944년 1월 8일 조선총독부 고시 제14호에 의해 공원으로 공식 지정됐다.(용두산공원 안내문)
1960년 4·19 직후 대한민국을 휩쓸며 부산에 닥친 ‘우남’ 이름 지우기 열풍은 우남공원 역시 개명시키고 이를 용두산공원으로 ‘환원’시켰다. 그런데 이미 본 바와 같이 ‘용두산’은 왜관 시대에 대마도 사람들이 갖다 붙인 산 이름이고, 거기에 공원을 만들어 용두산공원으로 명명한 주체 또한 ‘용두산신사’를 만들고 공원을 만든 일본인들이다. ‘우남공원 명칭회복 추진위원회’라는 단체를 만든 시민 활동가 정성문은 “일본 잔재인 이름을 왜 놔두는가”라고 반문했다.
일본의 용 전설이 ‘왜구 격퇴’로
용두산공원은 ‘일제 잔재’가 아니라 총체적인 일본 문화다. 위 신사들 가운데 변재신사에 있는 신 변재천(辨才天)은 재물의 신이다. 힌두신 사라스바티가 불교에 변용된 여신이다. 일본 전설에 따르면 변재천은 ‘용왕과 결혼한 여신이라 용이 공격하지 않는다’. 그래서 일본 도처에 있는 변재천 신사 주변에는 용과 관련된 지명이 자주 나온다. 물과 관련된 자연재해를 변재천과 친한 용이 막아줄 수 있다는 민간 신앙이 투영된 지명이다.(이근열, 앞 논문)
용미산은 ‘바다로 돌출돼 있다’. 용두산은 육지 속 왜관에 있다. 이름만 보면 용이 바다에서 육지로 들어오는 형국이다. 그러니 ‘산세가 용 모양이어서 침범해 오는 왜구들을 삼켜 버릴 기상’이라고 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왜곡을 넘어 날조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우남공원’은 독재자가 명명한 이름이라고 폐기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산 이름 자체가 19세기 어느 시점 일본인이 지은 이름이다. 그런데 또 알고 보니 공원도 식민 시대 만든 공원이다. 이걸 그 ‘독재자’를 추종하는 패거리가 독재자 호를 따서 개명했다면서 식민 시대 이름으로 돌려놓았다. 거기에다 ‘왜구 격퇴하는 용’이라는 창작까지 덧붙여서. 코미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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