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스트레이디에게 무대가 아닌 장소는 없다”
대통령 ‘無冠의 최측근’… 국정변수 되는 배우자들
“퍼스트레이디에게 무대가 아닌 장소는 없다.”(워싱턴포스트)
지난달 말 미국은 전직 퍼스트레이디의 코트 한 벌에 들끓었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부인 로절린 카터 여사의 장례식에 멜라니아 트럼프 여사가 프랑스 명품 디올이 만든 풍성한 드레스 스타일의 회색 트위드 코트를 입고 나온 것. ‘장례식 복장’의 정석인 올 블랙으로 나온 힐러리 클린턴, 로라 부시, 미셸 오바마와 질 바이든 여사 등 전·현직 퍼스트레이디와 달리 눈에 확 띄는 차림이었다. 이 코트는 ‘이단아’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백악관 복귀 가능성을 두고 가뜩이나 긴장하던 미 정가에 불을 질렀다.
진보 진영에서 “고인에 대한 예의보다 ‘난 당신들과 다르다’는 메시지를 앞세운 것” “품격 없고 무례하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과거 멜라니아가 텍사스 수해 현장에 갈 때 굽 10cm의 뱀가죽 하이힐을 신은 일, 불법 이민자 아동 수용소에 다녀가며 ‘난 사실 상관 안 해, 넌?(I really don`t care, do you?)’라고 적힌 재킷을 입었던 일명 ‘재킷 게이트’까지 소환됐다.
이에 보수는 “옷밖에 눈에 안 보이나” “자신을 무시하는 기성 정치권이라는 사자 굴에서 고개를 쳐든 것뿐”이라고 반박했다. 뉴욕타임스는 회색 코트를 “퍼스트레이디 역할에 대한 양가적 감정, 남들 기대대로 행동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라고 해석했다.
국가 정상의 배우자는 일거수 일투족이 심판대에 오른다. 특히 여성은 조금만 잘해도 관심과 찬사를 받지만, 옷차림이나 처신 하나가 대중의 기대에 약간이라도 어긋나거나 허점을 보이면 순식간에 악마화된다. 그 평가가 최고 공직자의 지지율과 소속 진영의 운명에 직결되기도 한다. 여성 배우자의 외모와 행동거지를 정치적으로 문제 삼는 일이 옳건 그르건, 현실이 그렇다.
국내도 마찬가지다. 고(故) 육영수 여사는 한센인과 빈곤층을 챙기고 약자들의 민원 창구를 자처해 국모(國母) 소리를 들었다. 그를 본뜬 김옥숙 여사, 손명순 여사, 김윤옥 여사 등 전통적 현모양처상에서 벗어나지 않는 대통령 부인들은 무난하게 사랑받았다.
반면 자기 주관이나 취향이 뚜렷하고 참여 욕구가 큰 ‘적극적 활동형’은 화제와 논란을 동시에 낳았다. 이순자 여사는 컬러 텔레비전이 나온 1980년대 금박이 박힌 화려한 한복 당의, 명품 시계와 보석으로 시각적 충격을 안기며 권력형 부패에 대한 의심에 불을 질렀다. 서울대, 미국 유학파 출신 여성 운동가였던 이희호 여사는 존경받는 한편 ‘남편만큼 정치를 즐긴다’는 눈총도 받았다.
대중이 ‘문고리·안방 권력’에 민감한 건 은밀한 만큼 강력하기 때문이다. 독신인 박근혜 전 대통령은 개인 살림을 맡아줄 제2부속실을 청와대에 유지했지만 여기 드나든 최순실씨가 국정 농단 사건으로 정권을 몰락시켰다. 김정숙 여사는 초반엔 발랄한 활동형으로 호감을 얻었으나, 대통령 전용기를 타고 혼자 인도를 방문하는 등 예산으로 ‘여행 버킷리스트’를 채운다는 논란, 남편보다 앞장서 걷는 모습이나 천안함 유족을 쏘아보는 표정으로 구설에 올랐다. 본인은 “직접 고치고 재활용해 입는 것” “홈쇼핑 옷을 산다”고 했지만 많은 고급 의상에 대한 현금 지출을 두고 청와대 특활비 전용 의혹도 일었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의 부인 김건희 여사가 좌파 목사와 인터넷 언론의 함정 취재에 걸려 디올 가방을 받았다는 논란을 걸어 야당이 총공세에 나섰다. 이참에 김 여사의 주가조작부터 경력 위조, 대통령 처가의 위법 등 모든 의혹을 다 까보자며 연말 국회에서 초유의 ‘김건희 특검’까지 추진하고 있다. 대통령실과 여당은 특검을 수용하든 거부하든 내년 총선에 큰 악재로 작용할 수 있다며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퍼스트레이디는 공직자가 아니다. 대통령 경호법상 ‘경호 대상을 대통령과 그 가족으로 한다’는 문구 외엔 배우자의 지위나 역할이 어디에도 명시돼 있지 않다. 그러나 사실상 대통령의 제1 참모 혹은 분신, 무관(無冠)의 최측근이기 때문에 권력의 백지수표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윤 대통령은 취임 전부터 “논란의 빌미를 없앤다”며 제2부속실을 폐지하고 영부인이란 호칭도 못 쓰게 했다. 그러나 오히려 그 때문에 김건희 여사 주변이 통제되지 않고 메시지 관리나 언론 대응이 아마추어에게 휘둘린다는 지적도 나온다. 미 백악관은 퍼스트레이디가 국내 정치와 정상 외교에 큰 영향을 끼치는 현실을 감안, 대변인부터 정무·정책·일정 담당 등 전속 조직을 이스트윙에 수십 명 규모로 둔다.
배우자가 신중하게 내조에 전념하면 대통령에게 자산이 되지만, 권력을 나눠 갖는 티를 내는 순간 짐이 된다는 게 역사의 경험칙이다. 낸시 레이건은 “퍼스트레이디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대통령이 고립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라고 했다. 대통령이 미처 못 보는 부분을 돌보고, 안식처가 되면서도 쓴소리를 하되, 자신이 국정 변수가 되도록 나서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전화위복할 기회는 있다. 미국에서 가장 욕 많이 먹은 퍼스트레이디는 힐러리 클린턴이었다. ‘빌보다 똑똑하다’는 말을 듣던 힐러리가 의료보험개혁특위 위원장을 맡아 국정 핵심 과제를 지휘하자 비난이 들끓었다. 그가 이미지를 회복한 건 아이러니하게도 르윈스키 스캔들 때 “남편 곁을 끝까지 지키겠다”고 한 뒤였다. 이후 상원의원과 국무장관, 대선 후보로 자신의 길이 열렸다.
미셸 오바마는 남편의 대선 운동 때 어린 시절 인종차별 당한 일을 들어 “성인이 된 후 처음으로 조국이 자랑스럽다”고 했다가 백인 보수층의 십자포화를 맞았다. 그는 변명하지 않았고, 훗날 “그들이 저열하게 굴 때 우리는 품위 있게 나가자”고 해 박수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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