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나한 취기를 깨우는 뜨거운 짬뽕 한그릇
[정동현의 pick] 짬뽕
다리가 저려왔다. 하지만 쉽게 내색할 수 없었다. 좌식 테이블에 앉아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그 시절 신입사원 환영회는 꽤 거나했다. 채용과 교육을 담당한 인사팀 선배들이 주최한 자리였다. 주는 술을 넙죽넙죽 받는 사이 갑자기 모두가 자리에서 엉덩이를 떼고 기립했다. 하이라이트는 인사 담당 부사장이 오면서 시작됐다. 모두 컵에 소주를 따르고 빠르게 비웠다. 그러고는 새벽 안개가 흩어지듯 회식 자리가 홀연히 끝났다. 짧고 굵게. 그것이 인사팀 회식 모토라고 했다. 시냇물에 방생한 금붕어 떼처럼 취한 동기들이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집에 가려고 지하철역으로 향하던 나를 누군가 불렀다. 술에 취한 동기 두어 명과 어쩔 수 없이 자리를 잡은 곳은 명동의 어느 중국집이었다. 초저녁부터 해장을 한다며 빨간 짬뽕 한 그릇이 중간에 놓였다. 빈속에 들이 부운 알코올이 이제야 흡수되는 것 같았다. 그래 봤자 20대였다.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혈기로, 돈을 모을 거다, 열심히 일할 거다, 낯 간지러운 말을 하며 또 잔을 채웠다. 그 와중에 마신 짬뽕 국물은 술이 깰 만큼 농도가 짙고 매웠다. 밖으로는 골이 울릴 정도로 찬 바람이 불었지만 위장에서는, 혈관에서는 뜨거운 기운이 맴돌았다.
농담으로 짜장면이 아니라 짬뽕이 좋아져야 어른이라고 했다. 그러나 알게 된 것은 오히려 짜장면을 먹을 수밖에 없는 것이 어른이라는 사실이었다. 뜨겁지 않아서 빨리 훌훌 비벼 먹고 일어나기에 짜장면만 한 음식이 없었다. 짬뽕은 그에 비하면 훨씬 호기로운 음식이다. 시간에 쫓기지 않고 빨간 국물을 후후 불어가며 먹는다는 것, 이미 그 마음가짐부터가 조금은 다른 음식인 것이다. 그 짬뽕 잘하는 집을 찾기는 어렵지 않다. 예전에는 비법이라 불리던 조리법도 많이 알려졌고 덕분에 어떤 면에서는 상향평준화된 것이 짬뽕이다.
그래도 마음에 드는 짬뽕을 찾자면 마포 ‘현래장’으로 간다. 감시카메라가 줄줄이 달린 마포대교를 건너자마자 보이는 것은 불교방송국이 있는 다보빌딩이다. 여기서 조금만 더 걸어가면 마포역을 끼고 꽤 큰 먹자골목이 나타난다. 이 집은 그 번화함과는 거리가 있는 이 다보빌딩 지하에 사찰 음식점과 이웃하며 널찍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좁은 복도를 따라 벽에는 마치 옛 중국 장수처럼 어깨를 딱 펴고 수타면을 길게 잡은 옛 주인장 사진이 붙었다. 이야기를 들으니 옛 주인장은 몇 년 전 돌아가시고 지금은 나이 든 아내와 그리고 젊은 아들이 가게를 지킨다고 했다.
한바탕 점심시간이 지나고 난 홀에는 자리가 넉넉했다. 자리를 잡고 앉으니 반대편 끝에 넓게 자리 잡은 주방이 통창으로 훤히 보였다. 그 안에서 키가 크고 팔뚝이 굵은 요리사들이 밀가루 반죽을 쿵쿵 내려쳤다. 상앗빛 자기 잔에 물을 따라 마시고 나니 빠르게 음식이 나왔다. 첫 번째로 나온 깐풍기는 마치 주방에서 뛰어나온 것처럼 하얀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깐풍기는 양념 통닭과 다르다. 위에 양념을 끼얹는 것이 아니었다. 대신 중화 냄비, 웍(Wok)에서 뜨거운 가스불을 맞으며 소스와 튀김을 빠르게 돌린 덕에 둘은 겉돌지 않고 완전히 하나가 되어 코팅을 한 것처럼 윤기가 흘렀다. 접시 바닥에는 질퍽한 기름이나 물기가 없었다. 하얀 김을 따라서 시고 매운 기운이 꽃향기처럼 몸을 흔들며 콧속으로 들어왔다. 깐풍기 한 조각을 입에 넣으니 시고 맵고 짠맛이 새끼 고양이들처럼 한데 뒤엉켰다. 세 가지 맛 모두 과하지 않고 비슷한 듯 다르게 서로 균형을 이뤘는데 그 뒤로는 이 모든 기운을 위로 끌어올리는 주방의 열기가 있었다.
이 집에서 직접 피를 빚는 군만두는 한입을 깨물자마자 훅하고 뜨거운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꼭 피가 얇은 만두가 좋지는 않다. 피 자체에도 씹는 맛과 또 풍미가 있는 법이다. 이 집 군만두가 그랬다. 넓적한 면을 먹는 것처럼 입 안에 두고 조금씩 씹어 넘기자 구수하게 익은 밀가루 냄새가 갓 익은 빵처럼 느껴졌다.
이윽고 나온 짬뽕은 한눈에도 빨간 기운이 가득했다. 이제 배달까지 도맡아 하는 젊은 주인장이 그릇을 내려놓으며 “저는 이것보다 더 맵고 짜게 해서 먹습니다”라고 말했다. 국물 맛을 보자 주인장이 먹는 짬뽕 맛이 또 궁금해지는 것이었다. 주인장 버전이 아니더라도 새우, 오징어 같은 해산물이 한 움큼 들어간 이 짬뽕도 충분히 매콤했다. 고문을 하듯이 무작정 날카롭게 매운 것이 아니라 고운 고춧가루에 진득한 육수를 써서 맛에도 손에 잡힐 것처럼 두툼한 양감(量感)이 있었다. 수타로 뽑은 면은 그 국물을 한껏 머금고 공중으로 이무기처럼 솟구쳐 입속에 팔딱거리며 들어왔다. 국물이 옷에 튀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고개를 그릇에 박고 뜨겁고 매운 국물에 땀을 흘리며 젓가락질을 할 뿐이었다. 몸이 점점 더워졌다. 갑옷처럼 두꺼운 겉옷도 벗어던졌다. 살아 있는 음식이, 내려치고 찢고 볶은 그 생생한 근육의 감각이 빨간 국물로 변해 몸속으로 밀려들었다.
#현래장: 깐풍기 3만5000원, 해물짬뽕 1만2000원, 군만두 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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