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은 보수의 기본으로 가기를
[장부승의 海外事情] 자유, 공정이 핵심가치… 과연 그 길로 가고 있는가
화면을 보다가 낯이 뜨거워서 꺼버리고 싶었다. 지금이 권위주의 독재 시절인가? 병풍처럼 도열해서 어색한 웃음을 지어가며 평소엔 입에 대지도 않았을 떡볶이를 열심히 먹고 있는, 총 매출 합계 1000조원에 달하는 그룹 총수들의 모습을 보며 든 생각이다.
미국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미국 대통령이 월마트, 아마존, 엑손모빌, 애플, 버크셔 헤서웨이, 구글의 총수들을 한자리에 모아, 핫도그를 먹으면서 서민 코스프레(실제로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그런 사람인 척하는 것)를 하게 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물론 이 바쁜 기업 경영자들을 인위적으로 모으는 것 자체가 가능한 일이 아니지만 만약 억지로라도 그런 일을 벌였다면, 아마 언론은 물론이고 미 상하 양원이 뒤집힐 정도로 비판이 폭발할 것이다.
미국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일본의 최고 권력자는 총리이지만 과연 총리라고 해서 도요타, NTT, 소니, 키엔스, 미쓰비시UFJ은행, 소프트뱅크, 유니클로, 닌텐도 같은 기업 회장들을 모아 놓고 오코노미야키를 먹어가며 지방 도시에 투자하라고 독려할 수 있을까? 과거 군국주의 일본이라면 모를까, 현대 일본에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우리가 이름을 알 만한 서유럽과 북미의 선진 민주국가들 중에 기업인들이 이렇게 병풍 취급을 당하는 나라는 단언컨대 없다. 다른 나라에서는 가능할지 모르겠다. 중국, 러시아, 북한에선 권력자가 기업인들에게 “모여!” 한마디 하면 득달같이 달려와 줄을 서겠지.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정치와 경제는 분리가 원칙이다. 경제인은 정치인의 머슴이 아니며, 정치인 역시 경제인의 하수인이 아니다. 투자는 기업의 냉정한 판단에 따라 자기 책임하에 이루어질 일이다. 기업인의 투자 판단에 권력자의 요구가 개입하기 시작한다면 그때 이미 이 나라 경제는 시장경제를 이탈하여 공산주의 명령 경제로 넘어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후 줄곧 ‘자유’를 강조하며,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중국, 북한 같은 나라들과 우리나라의 차이점을 부각시켜 오지 않았나? 보수 진영의 지도자인 윤 대통령이 ‘자유’를 강조한 것은 사실 당연한 것이다. 자유야말로 ‘보수’의 핵심 가치이기 때문이다. ‘진보’는 추상적인 집단 이익의 관점에서 명령을 통해 경제에 개입하여 일거에 목적을 달성하려 한다. 그러나 보수는 인간의 자발성과 이기적 본성을 최대한 존중해 가면서 시간이 들더라도 인내심을 갖고 법과 제도를 통해 세상을 바꾸려 한다.
그런데 그토록 자유를 강조했던 윤 대통령이 갑자기 기업인들을 줄 세워 떡볶이를 먹여가며 투자를 독려하고 있다. 윤 대통령은 보수를 뭘로 알고 있는 건가?
윤석열 정부의 반(反)카르텔 캠페인 역시 마찬가지이다. 사실 카르텔 엄단이야말로 보수의 가치를 실현하는 핵심 수단 중 하나이다. 카르텔이 판치는 사회에선 소수의 집단이 카르텔을 매개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카르텔 캠페인의 일성이 난데없이 과학기술 예산 일괄 삭감이었다. 카르텔이 문제라면 그것을 퇴치할 정책을 제시해야지, 반카르텔 명분으로 모든 예산을 대폭 삭감하니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그 결과, 과학기술 연구의 최전선에 선 젊은 연구자들은 이제 생계를 위협받을 지경이 됐다. 최근 들어 정책을 수정한다지만, 애초에 왜 반카르텔의 핵심 타깃으로 과학기술계가 지목된 것인지, 예산은 왜 대폭 일괄 삭감했는지, 누구 하나 속 시원히 설명해주는 사람이 없다.
아니 윤석열 정부는 이제 반카르텔에 관심이 없는 것인지 모른다. 방송통신위원장으로 지명된 김홍일 전 고검장을 보니 검찰 퇴직 후 지난 10년간 재산이 12억원에서 62억원으로 늘었다. 삼성전자 사장쯤이면 모를까, 대한민국 월급쟁이 중에 이렇게 재산이 급속히 느는 사람이 있나? 법조 카르텔 덕을 본 것은 아닌지 강하게 의심이 드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홍일 전 고검장은 공정성을 생명으로 하는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으로 지명됐다. 윤 대통령에게 과연 보수란 무엇인가?
의대 정원 문제도 마찬가지다. 지금 윤석열 정부가 의료 서비스 공급 확대 문제를 다루는 방식을 보면 과거 좌파 정부와 무엇이 다른지 알 수 없다. 이미 지난 정부에서 필수 의료 분야 공급 확대를 위해서는 수가 인상과 의사들의 사법 리스크 완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있었다. 의대 정원은 지금 당장 늘린다 해도 효과가 나오려면 10년이 넘게 걸린다. 그러니 의대 정원은 점진적으로 늘려 가면서 일단 수가 인상과 사법 리스크 완화를 도모하는 것이 현재의 의료 서비스 공급 체계를 존중하면서 신중한 변화를 모색하는 보수주의적 해법에 가깝다 할 것이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는 다짜고짜 전국 의대에 정원 확대 수요 조사부터 실시했다. 의대 정원이 늘면 학교로서는 위신 상승에 등록금 수입이 늘고, 저임금으로 활용 가능한 인턴, 레지던트도 는다. 그러니 다들 2배, 3배 늘려 달라고 목청을 높일 수밖에. 하지만 과거 의대 정원을 증원했던 일본도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정원을 늘린 일은 없다. 정원 증원의 파장을 면밀히 고려해 가며 신중하게 점진적으로 증원을 추진했다. 이것이야말로 보수적 해법이다.
이젠 정말 나도 모르겠다. 윤 대통령은 보수주의자인가? 자유와 공정을 핵심 가치로 추구하는 것이 맞나? 윤 대통령은 보수를 뭘로 알고 있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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