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東國)의 양법(良法)”? 조선 유생들의 노비제 옹호론
송재윤의 슬픈 중국: 변방의 중국몽 <15회>
한국사의 수수께끼: 왜 조선은 노비제의 나라가 되었나?
지난주 14회 마지막에 소개한 한국 경제사의 석학 이영훈 교수의 질문을 다시 음미해 보자. “조선의 역대 국왕은 왜 모든 백성을 공민(公民)으로 지배하지 못했는가? 왜 그 절반을 사민(私民)으로 삼아서 양반 관료들과 나눠서 소유하려 했던가?”
세종(世宗, 재위 1418-1450)의 아들 중에서 5남 광평대군(廣平大君, 1425-1445)과 8남 영응대군(永膺大君, 1434-1467)은 각각 1만 구 이상의 노비를 갖고 있었다. 왕자가 1만 명이 넘는 인구를 노비로 거느릴 수 있었다면, 그들은 일면 스스로 백성을 거느린 작은 봉국(封國)의 영주(領主)처럼 보인다. 그 점에서 조선의 정치체제는 분명 각자 봉토와 백성을 가진 제후들이 다수 공존하는 봉건 모델의 정부를 닮은 면이 있다.
고대 주대(周代)의 분봉제(分封制)나 도쿠가와(德川) 막부(幕府) 체제만큼은 아니라 해도 조선의 정치체제도 유심히 관찰하면 국가 안에 여러 소국(小國)이 섞여 있는 기묘한 “다자 지배(polyarchy)”의 구조가 엿보인다. 물론 광평군과 영응군은 특별히 많은 노비를 소유한 예외적인 경우였으며, 조선에선 독자적 “지방 무력(武力)”이 형성되지 않았다. 형식상 조선은 봉건제의 국가가 아니었다. 문제는 조선이 중앙집권적 관료제 국가를 표방했음에도 군주의 대민 지배력은 모든 백성에 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조선 국왕은 조선 땅에 살아가던 15~16세기 인구의 사실상 절반만을 공민(公民)으로 거느리고 있었다. 인구의 나머지 절반은 제각기 정부, 왕실, 양반가에 소유된 동산(動産, chattel)이었다. 사적인 백성, 곧 사민(私民)이었다. 다시 말해, 조선 국왕은 전체 국인(國人, 나라 사람)의 절반에 대해서만 임금 노릇했을 뿐, 인구 절반의 노비들에 대해선 사실상의 지배를 포기한 상태였다. 노비들은 왕의 백성이 아니라 타인에게 소유된 예속적 존재였다.
그 점에서 조선의 노비제는 왕족과 양반의 협업(partnership)으로 유지되었던 독특한 ‘백성 나눠 갖기’의 제도였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정부는 노비에 대한 양반의 인신 지배를 법적으로 인정했으며, 국가 행정력을 이용하여 떨어져 사는 납공노비의 신공 수취를 돕고, 양반의 요청에 부응하여 도망간 노비의 추쇄(推刷)에 공권력을 사용했다. 조선 정부는 양반가의 노비 소유를 법적으로 용인했을 뿐 아니라 그 노비제의 유지와 확충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 점에서 조선 노비제는 전근대 동아시아의 다른 나라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기묘한 한국형 신분제, 한민족(韓民族) 고유의 카스트(caste) 제도였다. 왜 한반도에서 그런 특이한 제도가 생겨나 그토록 장시간 유지되었을까? 섣불리 포폄(褒貶)의 칼날을 휘두르기보단 세계사의 큰 맥락에서 조선 역사의 특이성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 왜 동아시아 전근대 다른 지역에선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노비제가 유독 조선에서 그토록 번성했을까?
봉건제 출현의 세계사적 설명
세계사에서 봉건제의 출현은 의외로 쉽게 설명된다. 어떤 국가든 중앙 정부의 행정력이 지방까지 미치지 못하는 상황에선 자연스럽게 지방 세력이 형성된다. 중앙 정부와 강성해진 지방 세력이 권력 다툼에 돌입하면 그야말로 전국시대의 피바람이 불 수밖에 없다. 전쟁을 피하고 공존을 모색하기 위해선 중앙 정부의 권위가 적정 수준에서 유지되어야 한다. 만약 중앙 정부의 무력이 지방 세력보다 훨씬 더 강한 경우엔 관료행정을 지방까지 확장할 수 있지만, 중앙과 중앙을 둘러싼 지방 전체가 군사적·정치적 세력 균형을 이룰 때는 양자 사이에 쌍무적 신사협정이 가능해진다.
고대 중국에선 주나라 분봉제도가 무너지면서 전국시대가 펼쳐졌고, 중세 일본에선 전국시대의 참화 끝에 도쿠가와 막부의 강력한 지도력 위에서 비로소 봉건 질서가 이뤄졌다. 흔히 오해하지만, 동아시아 역사에서 봉건시대란 전국시대가 아니라 그와 정반대로 전국의 상황이 종식된 분권화된 평화의 시기를 이른다. 고전 유학의 정치이론에 따르면, 봉건의 질서가 무너지면 전국시대가 펼쳐지고, 전국시대가 종료되면 봉건의 질서가 확립된다. 바로 그 점에 착안하여 중국 역대의 정치사상가들이 전국시대를 최악의 분열기로 묘사하면서 진(秦) 제국이 아니라 서주(西周)의 분봉제를 이상화했다. 18~19세기 일본 미토(水戶) 학파의 사상가들은 도쿠가와 막부의 봉건 질서가 유가적 이상 질서를 구현했다는 주장을 펼쳤다. 요컨대 봉건제란 중앙권력이 지방 세력을 제거할 정도로 크지는 않고, 지방 세력에 제압될 만큼 약하지 않은 세력 균형의 상태에서 생겨나는 다자 공존의 질서이다.
물론 조선에는 독자적 무력을 갖추고 여러 지역에 할거하는 봉건 영주 따위는 없었다. 통일신라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전근대 한국사는 군현제를 기본으로 하였다. 그 점에서 조선은 봉건제 국가는 전혀 아니었고, 표면상 중앙집권적 행정 체계를 갖추고 있었지만, 정치 제도만으로 한 사회의 실상을 파악할 수는 없다. 교통, 통신, 경제력, 무력 등 모든 면에서 전근대 국가의 권력은 현대 국가에 비할 바 없이 약했다.
산업화 이후 등장하는 근대국가의 군사·행정력 및 대민(對民) 장악력과 비교해 보면, 전근대적 국가의 중앙권력이란 미약한 수준이었다. 중앙권력이 강했던 11세기 이후의 중국은 방대한 대륙에서 군현제를 유지하면서 지방 엘리트의 복종을 유도할 수 있었고, 지방 무력이 상대적으로 강했던 일본은 16세기 말 봉건 질서를 확립하고 거의 300년간 성공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이에 비해 왕권이 취약하고 지방 세력도 강성하지 못했던 조선에선 독특한 노비제가 생겨났다. 쉽게 말해, 국가권력이 약했던 조선왕조는 온 백성을 공적 신민(臣民)으로 지배할 수 없었기에 인구의 절반을 양반 계층과 함께 사민으로 지배했다는 것이다. 양반은 사유재산의 핵심이었던 노비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으며, 국가는 양반을 제압할 정도로 강력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조선 왕실, 정부, 양반 계층 사이에서 생겨난 절묘한 세력 균형이 조선 노비제로 표출되었다고 하면 과언일까?
모화주의(慕華主義)적 자학 사관? 조선 유생 노비제 옹호론
다음 회에 살펴보겠지만, “천생증민(天生烝民),” 곧 “하늘이 온 백성을 낳았다”는 정통 유학의 대전제는 조선의 노비제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그 점을 조선의 유생들은 물론 국왕까지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노비제가 유학의 보편적 인간관에 배치된다는 점을 잘 알았기에 노비를 거느린 조선의 양반 계층은 입만 열면 노비제가 기자(箕子)에서 이어지는 “우리나라(我國)” 고유의 전통이라 옹호했다.
기자는 고대 중국 은(殷)나라 현인(賢人)으로서 주(周)나라 무왕의 명령으로 한반도에 분봉되어 조선에 중화 문명을 전했다고 알려진 전설의 인물이다. <<논어(論語)>><미자(微子)>장에는 은나라 세 현인 중 한 명이었던 기자가 상나라 최후의 독재자 주왕(紂王)에게 미친 척하며 “그의 노예가 되었다(箕子爲之奴)”는 구절이 보인다. 바로 그 기자가 전했다는 팔조법(八條法)의 제3조 “도둑질한 자는 재산을 몰입하고 노비로 삼는다”는 구절은 고려 때부터 노비제 옹호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조선 유생들도 같은 논리로 노비제야말로 동국(東國) 고유의 제도라고 주장했다.
1553년 명종(明宗, 재위 1545-1567) 8년 10월 9일 조선 조정에서 적서 차별의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다음 논쟁을 살펴보자. 명종(明宗)은 서자의 관계 진출을 근원적으로 차단하는 서얼방금법(庶孼防禁法)의 폐지를 시도했다. 이때 조정 대신들은 완강하게 반대하면서 적서(嫡庶), 노주(奴主), 적첩(嫡妾)의 구분은 중국과는 다른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이라는 논리를 펼쳤다. 사간원(司諫院)이 왕에게 다음과 같은 간언(諫言)을 올렸다.
“중국에서는 적서(嫡庶) [차별 없이 인재를] 다 쓸 뿐 아니라 노주(奴主, 노예와 주인) 사이에도 정해진 분수가 없어서 문무(文武)에 능하면 천한 노예라도 벼슬을 할 수 있고, 문무를 제대로 익히지 못하면 관인의 자식이라도 천민이 되고 맙니다.”
사간원 대신들은 일단 중국은 적서 차별 자체가 없고 문무에 능하면 천한 노예도 벼슬을 할 수 있는 이상적 사회라고 미화하고, 이어서 “우리나라”는 기자(箕子)의 유지를 받아 노비제를 유지하고 있다며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우리나라는 중국과 달라 기자가 들어와서 노예와 주인을 엄격히 구별했음에도 이따금 기강(紀綱)과 상도(常度)가 무너지는 변고가 있었습니다. 지금 노주 사이에 정해진 분수가 없는 중국 법을 흉내 내면서 이 나라가 어지러워지지 않기를 바란다면 이 어찌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적서의 구분에 있어서 중국은 우리나라와 같지 않아 아내가 반드시 모두 좋은 집안의 딸은 아니고 첩이 반드시 아내보다 비천하지는 않으며, 선후나 후박(厚薄)으로 적첩(嫡妾)을 구분합니다. 중국에서 따로 서자의 출사(出仕)를 방금(防禁)을 하지 않아도 폐단이 없음은 대개 그래서입니다.”
중국은 적서 차별도, 노주의 구분도 없으며, 정부인과 첩 사이를 따지지 않아도 잘 돌아가는 문명의 제국이라는 사대주의적 발언이다. 반면 동국(東國)은 고대의 기자에게서 화하(華夏) 문명을 전해 받아서 그나마 문명의 질서를 유지할 수 있었다는 자기 폄하의 주장이다. 사간원은 이후 동국의 역대 왕조는 모두가 적서, 노주, 적첩의 차별을 엄격하게 지켰기에 그나마 존속될 수 있었다면서 자기비하적으로 노비제를 옹호하고 있다. 그 상세한 내용은 다음 문단에 제시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땅덩이가 작고 예의가 없으면 상하가 어지럽게 되므로 적서를 구분하고 노비를 대대로 전하는 세습법을 역대로 행하였으나 오랫동안 아무런 폐단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이는 양법(良法)이라 할 만한데, 지금 한두 사람의 호소로 인하여 허물어뜨릴 수 있겠습니까.”
땅이 크고 넓고 문명이 발달한 중국은 노예도 문무에 능하면 벼슬을 할 수 있으며, 처첩의 차별도 없어 서얼도 관계에 진출할 수 있지만, 조선은 작은 나라라서 노비제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유교 이념이나 역사 현실에 비춰볼 때, 조선 유생의 이러한 주장은 실상 일말의 설득력도 없다. 그저 노비제의 유지·강화를 위한 궤변이라 치부한다면 현대인의 무리한 평가인가?
우선 기자는 문헌적 근거도 희박한 고대의 전설적 인물에 불과하다. 게다가 기자가 전했다는 팔조법은 도둑질한 범죄자의 재산을 몰수해서 노예로 삼으라고 했을 뿐 아무 죄없이 세상에 태어난 숱한 사람들에 자자손손 노예의 멍에를 대물림하라 요구하진 않았다. 중국은 큰 나라라서 노비제가 없이도 유지될 수 있고, 조선은 작은 나라라서 노비제의 강화 없이 존속될 수 없다는 주장 또한 상식에 어긋난다. 작은 나라라면 노비제 없이 더 잘 살 수 있어야 하지 않는가? 유가 경전의 보편적 인간관에 비춰봐도 그러한 주장은 노비를 절대 잃지 않으려는 노주(奴主)의 교묘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노비제를 유지하려는 양반 계급의 물욕과 탐심이 이러한 궤변의 악순환을 만들어 냈다. 우리는 지금 조선 유생의 극단적인 모화(慕華)사상이 자기비하적 현상 유지의 논리로 뒤바뀌어 노비제의 기반을 다시 구축하는 이념적 콘크리트로 활용되고 있는 부조리한 장면을 목격하고 있다.
무엇보다 노비제가 양법(良法) 곧 좋은 제도라는 사간원의 주장을 과연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미국에선 남북전쟁 이전 노예제를 옹호한 숱한 인물들의 행적을 조사해서 낱낱이 밝히는 운동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지만, 과거의 악인을 찾아내서 단죄한들 역사가 바로잡힐 리 없다. 우리에겐 그저 망각의 늪에서 과거사를 건져내서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분석하고 평가하고 기억해야 할 임무가 있을 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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