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고단에서 만난 순백의 세상… 음(陰)의 숲으로 초대[전승훈 기자의 아트로드]

지리산=전승훈 기자 2023. 12. 16. 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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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3대 주봉 중 하나인 노고단 정상에 상고대가 피어 하얀 세상으로 변했다. 눈이 내리지 않아도 온도와 습도, 바람이 만들어 내는 산 정상 부근의 상고대는 겨울 산에서만 만날 수 있는 자연의 예술 작품이다.
12월의 지리산은 적막하지만 반전의 매력을 갖고 있다. 화려함을 벗어던진 숲속. ‘음(陰)의 세계’에서만 느낄 수 있는 고요함과 평화로움이 여행객을 기다린다. 그리고 정상에서 만나는 순백의 세상은 놀라움과 탄성을 불러일으킨다. 나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싶을 때, 지리산 노고단과 둘레길을 걸어보자.

● 노고단에서 만난 하얀 세상

지난주 지리산 노고단(해발 1507m)에 올라 새하얀 상고대의 세상을 만났다. 12월 초에 노고단 정상부 전체에 하얀 눈꽃 세상이 펼쳐진 것은 보기 드문 일이다. 상고대는 습도와 기온, 바람이 만들어 내는 예술 작품이다. 눈이 내리지 않아도 공기 중 수증기가 얼어붙어 서리꽃, 얼음꽃이 피어난다. 여기에 눈가루가 바람에 날려 붙으면 점점 두꺼운 상고대로 발달한다. 차가운 바람의 결이 만들어낸 상고대의 얼음은 물고기의 지느러미나 새우의 꼬리처럼 물결을 치기도 한다.

성삼재에서 노고단으로 올라가는 등산길은 하얀 눈으로 낭만적인 모습이었는데, 노고단 정상 부근에 오르니 칼바람이 쌩쌩 분다. 노고단 정상에 세워져 있는 원추형 돌탑도 서리꽃이 피어서 하얗게 됐다. 노고단은 지리산 3대 주봉 중의 하나인데도 불구하고, 노고봉이 아니라 ‘노고단(老姑壇)’이라고 불린다. 지리산을 수호하는 성모신인 ‘노고(老姑) 할미’에게 제사를 지내는 터였기 때문이다. 제주 한라산에도 세상을 만든 ‘마고 할미’의 신화가 전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나라 제1호 국립공원인 지리산은 1925년부터 노고단에 외국인 선교사들의 휴양지 56동이 건설되면서 국립공원으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성삼재 관광도로가 개통되면서 노고단 대피소는 지리산에서 가장 많은 등산객들이 찾는 쉼터가 됐다. 결국 노고단은 1991년부터 자연휴식년제를 적용해 생태를 복원하기 시작했고, 현재 하루 1870명만 예약을 받아서 탐방이 가능하다.

2년간의 보수 공사 끝에 오픈하는 노고단 대피소.
지난 2년간 문을 닫고 보수공사를 했던 노고단 대피소가 17일 새롭게 개장한다. 리모델링을 끝낸 노고단 대피소에 가보니 노고단의 상징인 지리산 노고 할미의 목조 조각상이 반갑게 등산객을 맞는다.

노고단 대피소의 가장 큰 변화는 침실이다. 원래 100여 명이 침낭을 이용해 잠을 잘 수 있는 침상형 숙소였는데, 코로나를 겪으면서 방을 36개(반야봉실 20명, 노고단실 16명) 만들고 1인용 캡슐호텔 형태로 바꿨다. 2층 구조로 된 침실의 각 방에서는 개별 창문으로 환기가 가능하고, 개별 난방을 통해 온도를 조절할 수도 있다.

특히 새로 단장한 노고단 대피소는 국립공원공단 대피소 가운데 최초로 장애인 편의시설을 갖춰 눈길을 끈다. 장애인도 지리산 노고단에서 운해(구름바다)와 일출을 보는 인생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한 시설이다. 대피소 1층에 장애인이 보호자와 함께 최대 4명이 잠을 잘 수 있도록 이동형 침대와 장애인용 화장실을 갖췄다. 장애인들은 성삼재까지 차량으로 온 후에 노고단까지 2.6km 구간을 보호자와 함께 휠체어로 등산을 하게 된다. 비교적 길이 잘 닦여 있기 때문에 산악용 장애인 휠체어를 활용하면 정상까지 오를 수 있다고 한다.

● 동지는 새해의 출발

12월. 노고단은 상고대가 활짝 피었지만, 초겨울 지리산의 숲속은 적막하다. 지난봄 돋아났던 신록, 한여름에 피었던 야생화, 불타오르던 단풍도 다 떨어지고 옷을 다 벗어던진 숲은 실체를 드러낸다. 나목(裸木)은 적나라한 라인을 뽐내고, 물이 말라붙은 계곡에서는 바위들이 온전한 모양새를 보여준다.

“지금은 음의 기운이 가장 센 시기입니다. 그래서 꽃이나 풀도 찾아서 설명해 드릴 것이 없네요. 12월 22일 동지까지 밤이 가장 길어지고, 깊어지는 시기이기 때문이에요.”

전남 구례에 있는 지리산 천은사 둘레길을 걷고 있는데, 국립공원 해설사가 초겨울 숲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12월 초는 산에서 음의 기운이 가장 만연한 때라는 것. 생명이 움트는 양의 기운은 찾아볼 수 없고, 자연은 깊이깊이 음의 세계로 침잠해 간다. 12월 22일 동짓날까지 낮은 계속 짧아지고, 밤은 계속 길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드디어 동짓날 연중 밤이 가장 길어 음의 기운이 최고조에 이른날, 천지는 딸깍하고 양의 기운으로 바뀌게 된다. 마이너스(―)로 기울던 세상이, 다시 플러스(+)로 방향이 바뀌면서 낮이 길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민속에서는 동짓날을 새해의 첫날로 보기도 한다. 새해의 시작에 나쁜 기운을 물리치는 의미로 양기가 가장 센 붉은색 팥죽을 먹는 것이다.

지리산 쌍계사 숲길.
지리산 구례 천은사와 경남 하동 쌍계사 둘레길을 걸으면서 ‘음의 기운’을 느껴보는 숲속 여행도 무척 좋았다. 초겨울 숲의 황량함 속에서 오히려 마음이 고요해지고 평화로움을 느낀다. 만물이 생동하는 시기에 앞다퉈 피어나는 꽃과 잎들이 서로 봐달라고 아우성을 치는 숲과 달리 고요한 숲속에서 비로소 내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기 때문이다.

지리산 천은사는 일주문에 쓰인 현판 글씨만으로도 멋진 절이다. ‘천은사(泉隱寺)’는 샘물을 숨기고 있는 절이라는 뜻. 원래 이 절의 이름은 감로사(甘露寺)였는데 개축하면서 샘물에 살고 있던 구렁이를 죽인 후 도량에 화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다고 한다. 그런데 원교 이광사가 물이 흐르듯 구불구불한 글씨로 ‘지리산 천은사’라는 현판을 써준 이후로는 재앙이 그쳤다고 한다.

이곳이 유명해진 계기는 지난해 방영된 ENA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덕분이다. 제주도 한백산에 있는 사찰 황지사가 도로 통행자들에게 문화재 관람료 3000원을 걷어 통행객들이 부당이득금 반환 청구 소송을 낸 사건을 해결하는 에피소드였다. 황지사 측은 문화재법에 따른 합법 징수라고 주장했지만, 우영우 변호사(박은빈)는 지방도로가 행정 목적으로 만든 ‘공물’이라고 맞서 최종 승소하는 스토리였다.

황지사의 실제 모델이 지리산 천은사이다. 실제로 천은사 주변의 지방도로 861호선은 지리산을 남북으로 관통했는데, 이곳에 매표소가 있었다고 한다. 1987년부터 32년간 이어온 입장료 징수 갈등은 천은사 측과 환경부, 문화재청, 국립공원공단, 한국농어촌공사, 전남도, 구례군 등 관계기관 간 2년의 소통 끝에 2019년 4월 매표소를 철거하면서 풀리게 됐다.

지리산 천은사 앞 저수지를 한 바퀴 도는 ‘천은사 상생의 길’.
입장료가 폐지된 이후 대신 ‘천은사 상생의 길’이 만들어졌다. 청류계곡에서 흘러든 맑은 물을 저장한 천은저수지의 둘레를 따라 소나무 숲길을 걸을 수 있는 총 3.3km의 순환형 탐방로다. 겨울철 저수지에는 철새들이 날아오고, 가끔씩 수달이 나타나기도 한다.
쌍계사 불일폭포.
겨울에 걷기 좋은 지리산 둘레길 중에는 쌍계사 불일폭포를 찾아가는 길이 있다. 쌍계사는 신라 말 대학자인 고운 최치원이 가람(伽藍·사찰) 구조가 호리병과 닮았다며 ‘호리병 속 별천지(壺中別有天)’로 묘사한 절이다. 차의 시배지로도 유명한 쌍계사 뒤편 숲속 길을 쉬엄쉬엄 걸은 지 2시간여. 청학봉과 백학봉 사이로 떨어지는 높이 약 60m의 불일폭포에 도착한다. 불일폭포는 고려시대 승려인 보조국사 지눌(1158∼1210)이 수도하며 머문 곳이다. 고려 제21대 왕 희종이 지눌 스님에게 ‘불일보조(佛日普照)’라는 시호를 내려 불일폭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불일폭포 근처에는 지눌 스님이 머물렀다는 자그마한 암자도 있다. 불일암의 양지바른 곳에 평소 주지스님이 쉬실 때 앉아 있을 법한 허름한 나무의자가 하나 놓여 있다. 한번 앉아 보니 그 자리가 명당이었다. 마당을 둘러싸고 있는 야트막한 담장 너머로 지리산의 산세가 한눈에 펼쳐졌다.

지리산=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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