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혈관 기형 수술 후 제2인생… 모든 일이 ‘술술’[병을 이겨내는 사람들]

김상훈 기자 2023. 12. 16. 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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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재 삼성서울병원 신경외과 교수-혈관종 이태현 씨
혈관종, 뇌종양과 얼핏 구분 어려워… 병원마다 진단 달라 초기에 애먹어
혈관 재출혈로 ‘혹’ 5cm까지 커져… 난폭하게 변하면서 사회생활 불가
수술 후 부드러웠던 성격 되찾아
혈관종이 생긴 후 성격이 난폭해져 사회생활이 어렵던 이태현 씨(오른쪽)는 수술 후 온화했던 성격으로 돌아갔다. 이 씨는 이원재 삼성서울병원 신경외과교수가 무한한 신뢰감을 준 게 투병 성공 요인이라고 했다. 이 교수가 이 씨의 투병 성공을 축하하며 악수를 청했다. 삼성서울병원 제공
2021년 2월, 이태현 씨(51)는 A병원 응급실에서 눈을 떴다. 몸은 병상에 묶여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도통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기억을 되짚으려 애썼지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가족에게 물었다. 방 여러 곳에 구토한 뒤 화장실에서 기절했다고 한다. 가족이 119에 전화를 걸었고, 병원에 실려 왔다. 이 씨는 병원에서도 난동을 부리고 고함을 질러댔다. 이 때문에 묶어 놓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사흘째 이런 상태로 지냈다.

정신이 든 후에는 일반 병실로 옮겼다. A병원 의사는 자기공명영상(MRI) 검사 결과 머리에 달걀노른자 크기의 ‘혹’이 있다고 했다. 핏덩어리처럼 보이는데, 크게 문제 되지는 않을 것 같다며 일단 시간을 두고 관찰하자고 했다. 일단 의사는 한 달 치 약을 처방해 줬다.

●“전혀 다른 사람이 돼 버렸다”

약을 먹으니 더 이상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 의사 진단이 맞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약이 동난 후부터 이 씨의 성격이 변하기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옛날 같지 않게 화를 많이 낸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나중에 이 씨의 뇌 수술을 집도한 이원재 삼성서울병원 신경외과 교수는 이와 관련해 “의사가 뇌를 안정시키는 약물을 처방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경우 증세가 사라진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씨 자신도 화를 자주 내고 괴팍해졌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인지했다. 술을 마실 때 더 심했다. 다른 사람들과의 술자리에서 툭하면 화를 냈다. 욕설을 퍼붓고 시비를 걸었다. 결국 싸움으로 이어졌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사람들과 멀어졌다. 몇몇 고교 동창생과는 의절하기까지 했다. 주변 사람들과 싸우는 일이 잦아지자, 이 씨의 형이 술자리에 늘 동석했다. 싸움이 생기면 형이 말렸다.

이 씨는 반도체 장비를 개발하는 회사에서 근무했었다. 경력을 살려 2022년 7월에는 한 기업 연구부장으로 재취업했다. 업무 스트레스는 컸다. 입사할 때의 계약 조건은 지켜지지 않았다. 근무 환경은 열악했다. 매일 소주 두 병을 마셨다. 술을 마시면 사장에게 문자로 욕설을 퍼부었다. 다음 날 ‘왜 그랬지?’라며 후회했지만, 다시 술이 들어가면 본심을 숨길 수 없어 욕설 문자를 보냈다. 점차 사회생활이 어려워지는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혈관종, 진단 어려운 병”

2021년 2월 당시 이태현 씨의 뇌 MRI 사진. 왼쪽 이마 부분에 혈관종이 보인다.
이 씨가 여러 병원에 다니다 삼성서울병원에 왔을 때는 이미 정서적으로 심각한 상태였다. 이 교수는 “충동 조절이 안 되고 있었다. 과장된 말투에다, 말하는 속도가 무척 빨랐으며, 묻기 전에 대답부터 했고, 잘 흥분했었다”고 말했다. 나중에야 알았다. 뇌의 혈관 기형인 ‘해면상 혈관종’이 원인이란 사실을 말이다.

해면상 혈관종은 기형적으로 자라던 뇌의 모세혈관이 터져서 생긴 덩어리다. 구멍이 숭숭 뚫린 벌집 모양(해면)과 같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줄여서 혈관종이라고도 부른다. 뇌 동맥과 정맥 사이에 비정상 혈관이 자라나는 ‘뇌동정맥 기형’과 비슷하지만 다른 병이다. 언뜻 보기에는 혹과 같아서 뇌종양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과거에는 혈관종을 뇌종양의 한 종류로 구분하기도 했다.

혈관종이 생기는 이유는 아직 확실히 규명되지 않았다. 대체로 30대와 40대에서 많이 발생한다. 이 씨 또한 49세에 처음 혈관이 터져 출혈이 발생했다. 발작 증세도 동반됐다.

다만 혈관 기형이 있다고 해서 모두 혈관종으로 악화하지는 않는다. 이 교수는 “기형 혈관이 있는 10명 중 1명꼴로 혈관이 파열하며 9명 정도는 무증상으로 평생을 살아간다”고 말했다. 이런 경우에는 2∼3년마다 혈관 상태를 확인한다. 사실 발작 증세가 나타나도 혈관종을 정확하게 진단하기는 쉽지 않다. 이 씨가 그런 사례다. 이미 혈관이 터진 상태였지만 A병원 의사는 심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이듬해인 2022년 11월, 2차 출혈이 일어났다. 당시 B병원은 컴퓨터단층촬영(CT) 검사를 했다. 그 사이에 혹이 더 커져 있었다. 의료진은 뇌종양 혹은 기생충 감염으로 판단했다. 이번에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 셈이다. B병원 의료진은 수술하자고 했지만, 이 씨는 의료진에 신뢰가 가지 않는다며 거부했다.

그 후로 증세는 더욱 악화했다. 구토하고 온몸에 힘이 빠질 때가 많아졌다. 앉아 있을 힘도 없어 드러눕기도 했다. 주변 사람들이 구급차를 불렀다. 응급실을 수시로 드나들게 됐다.

● 수술 성공 후 옛 인상-성격 회복

올해 1월 찾아간 C병원 의사도 뇌종양 같다며 수술하자고 했다. B병원 의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판단한 이 씨는 신뢰하지 못하겠다며 삼성서울병원으로 갔다. 그때 이 교수를 만났다. 이 씨는 “이 교수가 진료 기록을 꼼꼼히 들여다보고, 30여 분 동안 충분히 설명했다. 뇌종양인지, 혈관종인지는 명확하지 않아 수술해 봐야 알 수 있다고 했다. 오히려 그런 점이 더 신뢰가 가더라”고 말했다.
2023년 2월 수술 직전의 뇌 사진. 2차 출혈이 일어나 혈관종이 더 커졌다.
2월 수술대에 올랐다. 전신마취를 하고 수술을 시작했다. 흉터가 보이지 않도록 머리 윗부분을 절개했다. 이마뼈와 뇌를 둘러싼 뇌막을 절개했다. 반복적으로 출혈이 일어나는 혈관종을 제거했다. 혈관종 때문에 뇌부종도 생긴 상태였다. 부어오른 주변 조직까지 들어냈다. 4시간이 걸리는 수술이었다.
2023년 9월 수술 이후의 뇌 사진. 혈관종이 말끔히 사라졌다.
3일 정도가 흘렀다. 날카롭고 뚝뚝 끊어지던 이 씨의 말투가 부드럽게 변했다. 성난 것처럼 잔뜩 찌푸렸던 인상도 온화해졌다. 이 교수는 “사실 더 악화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성공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완벽하게 예전 상태로 돌아갔다”고 말했다.

이 씨의 성격이 난폭하게 변한 것은 혈관종이 인접한 전두엽(이마엽)을 손상시켰기 때문이다. 대뇌 앞쪽에 있는 전두엽은 기억, 사고, 감정, 운동 등의 능력을 관장한다. 구토, 실신, 무기력 등의 발작 증세가 나타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만약 혈관종이 뇌 신경세포가 척수로 가는 통로인 뇌간에 발생했다면 두통, 마비, 저림, 복시 등의 증세가 많이 나타난다.

이 씨의 경우 혈관종이 상당히 컸던 게 증세를 더욱 악화시켰다. 보통 1mm 정도면 관찰만 한다. 이 씨의 경우 혈관종은 점점 커져 3cm를 넘었고, 삼성서울병원 진료를 받을 무렵에는 5cm까지 커져 있었다. 당장 수술이 필요한 상황이었던 것. 이 교수는 “만약 그 상태에서 출혈이 다시 발생했다면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었다”고 말했다.

● 새로 얻은 인생, 다시 바빠진 일상

요즘 이 씨는 그 어느 때보다 바쁘다. 일단 이미 벌여 놓았던 사업들을 추스르고 있다. 혈관종이 생기기 전에 골프, 스키, 스킨스쿠버를 가르치는 레저 사업을 시작했었다. 하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개점휴업 상태가 돼 버렸다.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자 차분했던 과거로 돌아갔다. 이 씨는 “나 자신도 믿기지 않을 정도다”라고 했다. 이 씨는 사업을 다시 시작했다. 주말에 외국인에게 스키를 가르친다. 점차 사업이 궤도에 오르는 것을 느낀다. 평일에는 보험회사에서 기업들을 상대로 자산관리 상담을 하고 있다.

새롭게 연기에도 도전했다. 최근까지 연기 수업을 받았고, 지금은 오디션을 보러 다니고 있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방송 프로그램에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며 웃었다.

이 씨가 여러 병원 중에서 삼성서울병원을 선택해 수술받은 이유가 궁금해졌다. 이 씨는 ‘신뢰’를 강조했다. 이 씨는 “다른 병원에서는 자세한 설명 없이 수술 날짜만 정하자고 했다. 환자는 돈벌이 대상이 아닌데, 자꾸 그런 느낌이 들었다. 이 교수가 환자 편에서 꼼꼼히 봐 줬기에 신뢰가 간 것”이라고 말했다.

김상훈 기자 core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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