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사활 걸린 빅딜, 그룹 회장들 불호령 맞아 가며 중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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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두의 ‘IMF위기 파고를 넘어’ ④ 산고 끝 7개 업종 구조조정안 확정
빅딜은 재계의 입장에서 썩 내키는 일은 아니었다. 지금 당장의 실적이 좋지 않다고는 해도 공들여 키운 기업을 내놓는다는 게 달가울 리 없지 않은가. 1998년 7월 19일부터 22일까지 제주도에서 열린 전경련 하계 포럼에서도 빅딜 문제로 격론이 벌어졌다. 기업인, 정부 고위 관료, 학자들은 물론 존 도스워스 국제통화기금(IMF) 서울사무소장 등이 참석한 이 포럼에서 정세영 현대 회장은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해서라도 살아남는 게 중요하다. 배가 침몰하는 데 그냥 있으면 되나. 빨리 짐을 들어내야 살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김우중 회장의 의견은 달랐다. “그렇게 하면 실업자가 양산된다. 대기업으로서 사회적인 책임도 있지 않느냐. 수출을 열심히 하고 허리띠 졸라매면서 수입을 억제하면 500억 달러 흑자를 낼 수 있다. 그렇게 2년만 잘 하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정부, 김우중 ‘500억 달러 흑자론’ 일축
하지만 빅딜이 한국의 경제난을 해결해 줄 특효약처럼 여겨지던 당시 분위기 속에서 위기의 주범 취급을 받던 재벌들이 이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정부는 기업 구조조정 방식을 5대 그룹과 그 이하 그룹으로 2원화했다. 시장에서 기업자체 신용으로 자금조달이 가능하고 자율적인 구조조정 능력을 갖고 있는 5대 그룹에 대해서는 각 그룹이 자율적으로 구조조정을 추진토록 했다. 반면 6대 이하 그룹에 대해서는 워크아웃 프로그램에 의해 채권단 주도로 기업구조조정을 추진토록 했다. 1998년 7월 4일 김대중 대통령과 5대그룹 회장단과의 회의에서 합의된 ‘빅딜 재계 자율 추진’ 원칙이 7월26일과 8월7일 정·재계 간담회에서 재확인됐다. 대통령과의 합의는 곧 온 국민과의 약속이었다. 재계는 싫든 좋든 빅딜을 받아들여야 했고, 구체적 방법은 전경련이 주도해 마련해야 했다.
롯데호텔에 마련된 ‘재계 복덕방’에서 나와 이병욱 팀장이 가장 먼저 할 일은 빅딜 대상 업종 선정이었다. 호텔에 ‘재계 복덕방’을 차리기 사흘 전, 박태영 산업자원부 장관이 전경련에 와서 회의를 했는데 그 때 과잉투자 업종으로 10개 업종을 제시했다. 이미 ‘자율 추진’ 원칙에 합의한 상태였기 때문에 전경련이 그걸 다 받아들일 필요는 없었고 참고 사항으로 삼아 그룹 구조조정본부장들과 검토를 했다. 업종이 정해지면 어느 그룹의 어떤 기업을 살리고, 어떤 기업을 정리할지, 그 방식은 어떻게 할 지 등을 짜는 수순으로 진행했다. 빅딜, 즉 그룹간 사업 교환이 구조조정의 전부는 아니었다. 개별 그룹들이 갖고 있는 동종 업체를 하나로 합쳐 새로운 법인을 출범시키는 것 또한 하나의 대안으로 검토됐고, 철도차량이나 항공기 업종은 실제 그런 방향으로 이행됐다.
이 팀장이 업종별 구조조정에 관계되는 회사의 실무자, 임원급과 논의하여 초안을 세우고 나한테 보고하면 나는 이를 바탕으로 각 그룹 구조조정본부장과 회장들에게 보고하고 이견을 조율하는 것으로 역할 분담을 했다. 거의 모든 결정은 구조조정본부장 회의에서 논의해 내리되 상호이익이 되어야 하고, 경쟁력을 높이는 방향으로 자율적으로 한다는 원칙을 정했다. 당시 5대그룹 구조조정본부장은 이학수 삼성 구조조정본부장, 이문호 LG 구조조정본부장, 박세용 현대 구조조정위원장, 김태구 대우자동자 대표, 손길승 SK 부회장이었고 그 아래 부사장급으로 구성된 구조조정 실무추진반이 꾸려졌다. 결정된 사항들을 청와대에 전달하고 대외적으로 발표하는 것도 나의 몫이었다.
작업은 산더미 같은 기업 회계자료 및 서류와의 씨름이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회의와 보고, 좀체 진전되지 않는 그룹 간 협상과 중재를 거듭했다.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킨 기업들 간의 합의를 도출해 내는 건 지난한 일이었다. 나는 “국익을 먼저 생각하고 그 다음에 각자의 이익을 생각하자. 각자 이익을 고집할 경우에는 국익차원에서 내가 거중조정을 하겠다”는 원칙을 밝히고 기업들을 설득했다. 그래도 일이 잘 진전되지 않는 경우에는 내가 독단적으로 결정하고 기업에 통보했다가 그룹 회장들로부터 불호령을 맞은 일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기업은 어디까지나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이다. 빅딜을 하는 참에 쓸모없는 것까지 끼워팔기 식으로 내놓고 정리를 하려는 속셈이 엿보이기도 했는데, 이를 간파해 내고 한쪽 편을 든다는 원성을 감수하면서 그런 의도를 봉쇄하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정부의 어떤 관료는 “은행에 맡기면 1주일이면 해낼 일을 그러느냐”고 핀잔을 주기도 했지만 현실을 모르는 소리였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다보면 하루 24시간이 부족했다.
매출 총 18조원, 5대 그룹 17개사 참여
나와 이 팀장만 그런 게 아니었다. 김우중 전경련 회장의 결재를 받으러 대우 그룹 사무실에 들어가 보면 의자 등받이를 붙들고 졸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김 회장의 의자는 일반이 상상하는 등받이가 높은 회전의자가 아니라 회의실 의자 같은 것이었다. 내가 ‘회장님 간이침대라도 갖다 놓고 잠시 쉬시지 그러느냐’고 해도 아랑곳 하지 않았다. 이렇게 밤낮없이 일하던 김 회장은 상하이 출장길에 뇌출혈을 일으켜 긴급 후송되어 서울대 병원에서 뇌수술을 받았다.
참으로 많은 논의와 협상, 조율 끝에 드디어 9월 3일 오후 3시 5대그룹 구조조정본부장들과 함께 전경련회관에서 1차 자율사업구조조정 결과를 발표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7개 업종의 대규모 사업 구조조정의 한 매듭이 지어진 것이다. 합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반도체 = LG·현대가 경영주체를 정하고 주식을 통합한다.
② 석유화학 = 대산단지 내 삼성과 현대가 통합한다.
③ 자동차 = 기아의 국제입찰이 유찰되면 현대, 대우, 삼성이 구조조정을 논의한다.
④ 항공기 = 삼성항공과 현대 간 단일법인을 설립한다.
⑤ 철도차량 = 현대·대우·한진 3사가 단일법인을 설립한다.
⑥ 발전설비 및 선박용 엔진 = 현대와 한국중공업은 발전설비를 일원화한다. 삼성의 선박용 엔진과 보일러는 한국중공업에 이관한다.
⑦ 정유 = 현대가 한화의 정유부분을 인수한다.
사업 구조조정에는 5대 그룹, 17개사가 참여했다. 관련 사업 부문의 매출 총액은 1997년 기준으로 18조원에 달했다. 5대 그룹 제조분야 전체 매출액의 14%에 이르고, 자동차 업종을 포함하면 32.7%에 달하는 정말 대규모의 사업 구조조정이었다. 특히 인수합병(M&A) 시장이 발달하지 못한 우리나라에서는 이와 같은 경쟁기업이나 타 그룹 기업과의 자율 구조조정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것을 해 냈다. 우리나라 M&A 시장의 활성화에 전기를 마련했다. 이 어려운 과제를 어쩔 수 없이 떠맡았지만 당초 합의대로 업종의 선정, 구조조정 방법, 추진주체, 거래조건 등은 전경련이 자율적으로 한다는 원칙을 끝까지 지켜내고자 했다. 이날 발표에서 나는 정부가 약속한 구조조정 업체의 부채 조정과 세제 지원을 해주어야 이번 사업 구조조정은 성공할 수 있다고 정부에 분명하게 요구했다.
그러나 일정에 대한 정부의 과도한 독촉은 자율적 추진을 어렵게 했다. 그리고 공기업인 한국중공업이 관련되어 있던 발전설비와 선박용 엔진에 대한 주주로서의 정부 개입이 있었던 점도 자율 구조조정의 정신을 크게 손상시킨 것이었다. 또 처음에는 부도가 난 기아자동차를 국제 입찰보다는 빅딜에 넣어서 처리하자고 했지만 청와대의 협의 과정에서 국제입찰 추이를 보는 것으로 결정됐다. 나는 9월 3일 발표로 일단 큰 짐을 벗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 후속 조처 역시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반도체 빅딜의 경영주체를 정하는 문제는 또 하나의 짐이 되어 내 어깨를 무겁게 눌렀다. 〈계속〉
손병두. 동서투자자문 사장과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 등 경제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서강대 총장, KBS 이사장, 호암재단 이사장 등 여러 분야에 걸쳐 다채로운 활동을 했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전경련 상근부회장으로서 정부와 재계의 입장을 절충하며‘빅딜’과 구조조정을 조율하는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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