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드 그리며 암도 극복한 5060들 "눈물이 날 정도로 카타르시스"
‘누드크로키 교실’ 현장 르포
앳된 얼굴의 20대 여성이 검정 원피스를 벗어젖히고 맨몸을 드러낸다. 웃고 떠들던 5060 사장님, 여사님들의 눈빛이 바뀐다. 먹이를 에워싼 맹수(?)처럼 눈에서 레이저를 쏘며 손놀림이 바빠진다. 사지를 비튼 채 얼음이 된 그녀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를 때 쯤, 벨이 울린다. 다음 동작은 꽤 과감하다. 다리를 벌린 채 무릎을 꿇고, 머리와 몸을 활처럼 제친다. 새로운 먹이를 각자 도화지 안으로 잡아 와야 하는 맹수들의 자세도 달라진다.
도화지 안쪽 사정은 제각각이다. 전문적인 목탄 드로잉으로 제법 멋진 누드화를 뚝딱 그려내는 사람도 있고, 서툴게 연필을 잡고 떨리는 선을 긋는 사람도 있다. 스타일도 제멋대로다. 머리부터 그리는 사람, 다리부터 그리는 사람도 있고, 엉덩이에 집중하는 사람도 있다. 모델은 하나지만 그리는 이의 각도와 솜씨에 따라 죄 다른 그림이다.
그림 실력 향상에 큰 관심이 없다는 점은 한결같다. 멋진 결과물을 추구하기보다 모여서 누드크로키를 하는 행위 자체를 사랑하는 동호인들이다. 이정권 작가는 “10여년 전 무심코 연필로 뭔가 끄적이다 흑연이 종이 표면에 그어질 때 손끝에 와닿는 미세한 감촉에 매료되어 지금까지 왔다”면서 “초를 다투며 살아 숨쉬는 인체를 표현하는 순간만큼은 질주쾌감과 무아지경에 빠져들 수 있는 게 크로키의 매력”이라고 소개했다.
70세 최고령 회원인 오태숙 작가는 다리가 불편해 보였다. 수술을 받은 지 얼마 안 된단다. 아픈 발을 끌고 크로키 수업을 빠지지 않을 정도로 열정을 불태우고 있는데, 이날 오프닝에는 와인·백주·안동소주 등 온갖 귀한 술을 싸들고 와서 회원들에게 베풀고 자신은 논알콜 맥주를 마시며 흐뭇해 했다. “나를 잊게 만드는 집중의 시간도 매력적이지만, 이런 자유로운 소통이 너무 즐겁다. 0명이 와도 크로키 교실을 계속 열겠다고 하는 가가쌤의 열정과 실력, 인품에 반해 일주일 내내 크로키 시간을 기다린다”는게 그의 말이다.
전시 오프닝 내내 모델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도 흥미로웠다. 풍물공연을 하다가 코로나 이후 생업이 어려워 누드 모델을 병행하고 있다는 배자유(가명)씨는 “화실마다 분위기가 다른데 가가쌤과 회원분들은 배려의 차원이 다르다”면서 “모델을 도구처럼 대하는 곳도 많다. 바로 눈앞에 조명을 쏘거나 대놓고 몸을 평가하는 등 신체적, 정신적으로 힘든 일이 많은데, 가가쌤 교실은 인간적인 소통을 통해 더 나은 포즈를 끌어내 주고 크로키에 대한 작가분들의 열정이 가깝게 느껴지는 곳이라 정이 간다”고 말했다.
역시 초창기부터 화실을 지켜온 ‘개국공신’ 유민수씨도 눈빛이 남다르다. 그림에 대한 로망을 접지 못한 전직 만화가가 그다. “아날로그 세대라 트렌드를 못 따라가서 만화를 접었지만, 자부심이 있다”는데, 무슨 뜻일까. “생활체육이 있듯이 생활미술도 있어야 하지 않나요. 그림 좋아하는 사람끼리 그리면 그게 예술이죠. 메이저급 예술이 있다면 우린 풀뿌리 로컬로서의 자부심이 있습니다. 그림을 그린다기보다 모델과 내가 같은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고 느낄 때 눈물이 나올 정도로 카타르시스가 오죠. 일주일치 행복을 여기서 누리고 있습니다.”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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