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모의 아내 “저 남자 죽여야해요” 남편 현혹…소름 돋는 ‘속마음’은[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테세우스 편]
“포도주 따지 마세요” 신탁
이해 못하고 술 취해 결국…
소년된 아이, 父향해 모험길
악당 다 잡았는데 웬 마녀가?
<동행하는 화가>
니콜라 푸생
로랑 드 라 이르
에블린 드 모건 동행하는>
헤라클레스는 케르베로스를 잡기 위해 지하 세계로 내려왔다. 그런 그는, 한 익숙한 사내가 저승의 신 하데스 옆에 앉아있는 것을 봤다. 그 사내는 눈알조차 움직일 수 없는 마법 의자에 앉아 고통받고 있었다. 헤라클레스는 별생각 없이 그의 팔을 쑥 잡아당겼다. 헤라클레스의 괴력에 그는 엉덩이가 뜯어지면서 일어섰다. 이제야 정신을 차린 그의 이름은 테세우스였다. 지금부터는 테세우스의 삶을 처음부터 살펴본다.
"아테네로 돌아갈 때까지 포도주 자루를 풀지 마시오."
이 말이 대체 뭘 뜻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신탁(神託)이야 늘 아리송하지만, 이번에는 정도가 심했다. "혹시…. 신에게 내 고민을 잘못 전한 게 아니오? 나는 단지 어떻게 해야 아들을 낳을 수 있을지를 묻고 있는 거요." 아테네의 왕 아이게우스가 재차 물었다. 델포이 신전의 사제는 아까처럼 "포도주 자루를 풀지 말라"는 말만 반복했다. 아이게우스는 먼 길을 괜히 왔나 싶었다. 그는 맥 빠진 채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독일 구 국립미술관에는 이러한 신탁을 받는 아이게우스 모습이 칠해진 도자기가 있다. 그의 표정은 썩 좋지 않다. 그런 그 앞에서 상대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듯 고개를 숙이고 있다.
그래도 이대로는 갈 수 없었다. 아이게우스는 아테네로 돌아가는 중 사로니코스만(灣)에 있는 나라 트로이젠을 찾았다. 그곳의 왕 피테우스는 많이 배웠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이 신탁의 뜻이나 물어볼까 싶어 들른 것이었다. 궁에 초대받은 아이게우스는 피테우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겠소?" 아이게우스의 말에 피테우스도 눈동자만 굴렸다. "전혀 감이 잡히질 않소. 종종 신의 장난은 고약한 법이오." 이번에도 수확은 없었다. "여독(旅毒)을 풀기에는 술이 제일이지요. 함께 회포나 푸십시다." 피테우스는 포도주를 술잔에 가득 따랐다. 아이게우스는 답답함을 안고 한 잔씩 계속 마셨다. 어느덧 만취했다. 그는 비틀대며 손님방에 들어갔고,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그런데….그간 아이게우스의 말에 장단이나 맞추며 놀던 피테우스의 표정이 돌변했다. 피테우스는 자기 딸 아이트라를 급히 불렀다. "손님이 잠든 방에 들어가거라." 피테우스는 아이트라의 손을 잡고 당부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동침해야 한다." 그렇게 딸을 밀어 넣었다. 사실 피테우스는 아이게우스에게 전해들은 신탁의 뜻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아테네로 돌아갈 때까지 포도주 자루를 풀지 말라….' 이 말은 아테네 땅을 밟기 전까지 술을 마시지 말라는 얘기였다. 아테네로 돌아간 뒤 술을 마시고, 그다음 첫 동침 상대에게서 아들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신의 대리인이 직접 당부한 걸 보면, 그렇게해 태어날 아이는 분명 예사롭지 않을 터였다. "아버지. 외간남성이 잠든 방에 저를 왜…?" 아이트라가 잠긴 문 너머로 소리쳤다. "너는 영웅을 낳게 될 게다." 돌아오는 말은 이뿐이었다.
다음 날, 잠에서 깬 아이게우스는 옆에서 인기척을 느끼고 깜짝 놀랐다.
아이트라가 그의 품에 안겨 자고 있었다. 정신 차린 그는 서둘러 피테우스를 찾았지만, 이 교활한 자는 숙취를 핑계 삼아 꼭꼭 숨어있었다. 아이게우스는 곧 어떤 상황인지 눈치챌 수 있었다. 그는 아이트라를 깨웠다. 그녀를 데리고 섬돌로 쓰이는 큰 바위로 갔다. 아이게우스는 그 밑에 구덩이를 깊게 판 후 허리춤에 찬 칼과 신고 있던 샌들을 넣었다. 그리곤 바위로 그곳을 덮고, 흙으로 빈틈을 꼼꼼히 채웠다. "아들이 태어나면, 그 녀석이 제 아비가 누구인지 궁금해하면 아테네로 보내세요. 다만." 아이게우스가 말을 덧붙였다. "제 힘으로 이 섬돌을 들어 올리지 못한다면, 그래서 땅속 칼과 신발을 챙길 수 없다면 절대 보내지 마세요." 아이게우스는 떠났다. 아이트라는 10개월 후 아들을 낳았다. 헤라클레스에 비견되는 영웅, 테세우스는 그렇게 탄생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는 수많은 미남과 미녀가 등장하지만, 그중에서도 테세우스는 손꼽히는 미남이었다고 한다.
프랑스 출신의 조각가 크리스토프 샤르보넬(1967~)이 빚은 테세우스의 상이다. 가지런한 이목구비, 우뚝 솟은 콧대는 미소년과 미중년의 분위기를 함께 풍기게 한다. 당연히 실제 모습이었다고는 볼 수 없겠지만, 전해져오는 그의 외모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상상할 수 있게끔 돕는다.
미혼녀가 된 아이트라 밑에서 큰 테세우스는 건장하고도 영리한 미소년으로 성장했다. 또래보다 키는 한 뼘이 더 컸고, 힘은 몇 배나 더 셌다. 특히 이웃 나라에서까지 상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레슬링의 명수였다.
테세우스가 열여섯이 될 무렵, 아이트라는 그를 옛 사연이 잠든 섬돌 옆으로 데려갔다. "저걸 들어볼 수 있겠니?" 테세우스에게는 일도 아니었다. 그는 가뿐히 바위를 뽑았다. 그곳에 묻혀있던 칼과 샌들은 드디어 세상 빛을 볼 수 있었다. 프랑스 출신의 니콜라 푸생(1594~1665)의 그림 속 아이트라는 손가락으로 섬돌을 가리키고 있다. 곱슬머리의 테세우스는 허리를 숙여 이를 힘껏 들고 있다. 그 밑에선 칼 손잡이와 샌들의 모습 일부가 반짝이고 있다. 열여섯 소년인 테세우스는 이미 잔근육이 쩍쩍 벌어진 완성형에 가까운 몸을 갖고 있다. 동시대 화가 로랑 드 라 이르(1606~1656)는 아이트라와 테세우스를 보다 더 어린 모습으로 그렸다. 소년티가 나는 테세우스가 섬돌의 한 귀퉁이를 들고 있다. 그 밑에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은 검과 샌들이 놓여있다. "아들아. 네 아버지는 아테네의 왕 아이게우스란다." 아이트라는 그간 말을 아껴온 출생의 비밀을 테세우스에게 털어놨다. "이 칼과 신발을 챙겨 아버지에게 가거라. 너는 여기에만 있기에는 너무 아까운 재능을 가졌어. 그곳에서 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을 게다." 테세우스는 그렇게 모험 길에 올랐다. 서양 영화·드라마의 하위 장르에는 전기활극(Sword-and-Sandals)이 있다. 이는 아버지가 묵혀둔 칼과 샌들을 챙긴 채 길을 떠나는 테세우스의 모습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가까운 바닷길을 타고 아테네로 가는 게 낫지 않느냐. 왜 멀고 험한 산길로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느냐."
"헤라클레스라면 산길을 택해 악당들을 청소하며 갔을 거예요."
외할아버지 케페우스, 어머니 아이트라가 그렇게 만류했지만 테세우스는 끝내 산길을 택했다. 테세우스의 우상은 헤라클레스였다. 헤라클레스는 "향락을 주겠다"는 쾌락의 여신 카키아, "파란만장하지만 끝내 영광을 누릴 삶을 주겠다"는 미덕의 여신 아레테 중 후자를 골랐다. 테세우스 또한 헤라클레스처럼 그런 결단을 하고 싶었다. 일부러 힘든 길을 택하고 싶었다. 테세우스는 산을 넘고 강을 건넜다. 보란 듯 저벅저벅 움직였다. 그런 그의 모습에 나그네 수백 명 목숨을 앗아간 유명한 악당들이 하나둘 고개를 들었다.
"어이, 꼬마야. 내 곤봉에 맞아 죽지 않으려면 가진 모든 것을 넘기거라."
테세우스의 첫 상대는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의 아들 페리페테스였다. 청동 곤봉를 제 몸처럼 휘두르는 사내였다. 사람 머리를 곤봉으로 박살 내 죽이는 일에 망설이지 않는 낭인이었다.
이탈리아 베톨레에서 발굴된 도자기에는 테세우스와 페리페테스가 만난 순간이 칠해져있다. 고대 그리스에서 젊은 남성이 즐겨 입은 망토 클라미스 차림새의 테세우스가 그 앞에 섰다. 헤파이스토스가 그 시절 추남의 대명사였던 만큼, 그의 아들인 페리페테스도 딱히 잘생겨 보이지는 않는다. 그런 그가 곤봉을 든 채 바위에 앉아있다. 겁먹지 않는 테세우스의 당돌함에 외려 당황한 듯도 하다.
과연 헤파이스토스의 자식다웠다. 테세우스도 페리페테스의 괴력을 당할 수는 없었다. 테세우스는 머리를 썼다. 페리페테스에게 일격을 가하는 척하며 그의 곤봉을 빼앗았다. 페리페테스는 당황했다. 분신과 같은 곤봉을 잃자 움직임이 급격히 둔해졌다. 빈틈을 노린 테세우스는 곤봉으로 페리페테스의 머리를 쳐 죽였다. 이제 테세우스는 곤봉을 그의 주력 무기로 활용했다. 이는 헤라클레스가 챙기고 다닌 올리브 나무 몽둥이를 떠올리게 한다.
두 번째 상대는 무법자 시니스였다.
시니스는 행인을 보면 다급하게 말을 걸었다. 소나무를 구부려 뭘 만들어야 한다며 도움을 청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꺾어주세요." 시니스는 영문도 모른 채 소나무를 구부리고 있는 선량한 행인에게 더 힘을 쏟길 계속 촉구했다. 그렇게 기운이 빠지면, 시니스는 표정을 바꿔 행인의 팔과 다리 한쪽을 그 소나무에 묶었다. 힘을 숨겨두고 있던 시니스는 바로 옆에 있는 또 다른 소나무를 거뜬히 구부렸다. 행인의 나머지 팔과 다리도 포박했다. 그러고는 두 소나무를 탁 놓았다. 땅으로 구부러져있던 소나무 두 그루는 도로 튕기면서 희생자의 몸을 반으로 갈랐다. 찢어지는 절규, 후드득 떨어지는 핏방울 틈에서 시니스는 그제야 낄낄 웃는 것이었다. 테세우스는 시니스에게 속아 넘어가는 척했다. 결정적인 순간 자세를 바꿔 되레 시니스를 소나무에 묶었다. "이봐, 잠깐만! 내 말을 좀…." 시니스의 애원을 무시한 채 그가 행했던 방식 그대로 처치했다.
독일 국립 고미술품전시관에는 테세우스가 한 손으로는 소나무를, 다른 손으로는 시니스의 팔을 붙잡는 장면이 담긴 도자기가 있다. 당황한 시니스는 돌을 든 채 맞서려고 하지만, 뿌린대로 거둘 그의 운명은 바뀌지 않을 터였다.
"아주 잘생긴 녀석인데? 죽이기는 아깝고, 내 시종으로 삼을까?"
이번에는 제법 간드러진 목소리가 들렸다. 수풀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산적이 나타났다. 이들 틈에서 잿빛 머리의 육중한 여인이 등장했다. 괴물 티폰과 에키드나의 딸, 이른바 '암퇘지'로 불린 산적 대장 파이아였다.
"어머니. 그러면 저 녀석은 죽이지 말고 사슬을 채울까요?" 테세우스를 에워싸는 산적은 모두 파이아의 자식들이었다. 테세우스는 놀라지 않았다. 다대일 전투도 한번은 해보고 싶은 일이었다. 테세우스는 그에게 달려드는 산적을 차분히 처치했다. 마지막으로는 직접 칼을 빼들고 달려드는 파이아의 목을 베었다. 이 과정 중에는 별다른 일화가 전해지지 않는다. 테세우스가 딱히 어렵지 않게 토벌한 것으로 추정되는 까닭이다. 파이아는 인간이 아닌 멧돼지로 그려지기도 한다. 인간의 짓이라고 볼 수 없을 만큼 사람을 잔인하게 죽여 그렇게 표현된다는 설, 실제로도 새끼를 많이 낳은 암퇘지였다는 설 등이 있다.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테세우스와 파이아의 모습이 담긴 도자기는 후자의 이야기를 따른다.
이 다음으로 테세우스에게 접근한 이는 의뭉스러운 사내 스키론이었다.
"젊은이, 오랫동안 걸었지? 저기 절벽에 가면 맑은 샘물이 흐르는데, 그곳에서 발을 씻고 가는 게 어떤가?" 테세우스를 본 스키론은 기분 나쁘게 웃으며 계속 말을 걸었다. 테세우스는 스키론을 따라 바다 근처의 가파른 언덕에 올랐다. "옳지, 옳지. 짐도 무거울텐데 거기 내려놓고, 편하게 발을 물에 담그시게." 스키론은 테세우스가 긴장을 푸는 그 순간 발길질을 하려고 했다. 이 사내가 바다로 떨어지면, 굶주린 채 희생양을 기다리는 괴물 바다거북이 마무리를 해줄 것이었다. 절벽에 놔둔 짐은 당연히 독차지할 수 있었다.
테세우스는 진작에 스키론의 속셈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는 발을 씻던 중 몸을 홱 돌려 스키론의 다리를 잡았다. 레슬링하듯 빙글빙글 돌려 절벽 아래로 처박았다. "내가 아니고 저 녀석이야!" 스키론의 절규를 바다거북이 알아들을 리 없었다. 그가 발버둥치는 소리는 점점 잦아들었다. 독일 노이펠트&헤니우스(Neufeld&Henius) 출판사가 1902년에 펴낸 책 속에 테세우스가 스키론을 밀어내는 장면의 삽화가 있다. 스키론은 뒤늦게 잘못했다고 애원하는 듯하다. 스키론은 제발 그러지 말라며 팔을 들고 있지만, 테세우스의 표정에서 자비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테세우스가 스키론을 번쩍 들어내던지는 장면의 도자기도 있다. 물결 위로 몸을 내민 바다거북이 그런 스키론을 맞이하는 모습이다.
테세우스가 처치한 우두머리급 악당만 벌써 넷이었다.
그렇게 움직이다보니 어느새 아티카 지방에 있는 국가 엘레우시스에 당도했다. 잠시 쉬고 여행을 이어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엘레우시스의 왕 케르키온이 테세우스에게 관심을 보였다. 그는 폭군이었다. 레슬링을 좋아한 그는 툭하면 남에게 시합을 요구하고, 이기면 상대의 목숨을 빼앗는 자였다. 케르키온은 테세우스에게 싸움을 걸었다. 이 잘생기고 몸 좋은 사내를 보기 좋게 제압해 힘자랑을 할 요량이었다.
"젊은이. 날 이기면 내 왕관을 주리다." 케르키온은 자신 있었다. 지금껏 아무도 그를 이기지 못했다. 그런 케르키온이 이번에는 제대로 임자를 찾았다. 테세우스는 케르키온의 악행을 익히 들었다. 그에게 지면 죽을 수도 있다는 것 또한 인지하고 있었다. 싸움은 팽팽하게 이어졌다. 결국 승자는 테세우스였다. 그는 케르키온을 번쩍 들어올렸다. 무릎으로 척추뼈를 박살 낸 후 땅에 내리꽂았다. 케르키온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죽어버렸다. 이제 엘레우시스의 왕은 테세우스였다. 엘레우시스는 훗날 테세우스가 목적지로 두고 있는 아테네에 흡수된다.
발걸음을 재촉한 테세우스가 만난 마지막 상대는 순박해보이는 남자였다.
머리를 긁적이며 다가오는 그는 도저히 나쁜 사람처럼 보이질 않았다. "목적지가 어디인지요." 그는 목소리도 차분했다. "아테네로 가는 길이오." "거의 다 왔군요. 아이고, 참. 제가 기가 막히는 사슴 고기를 손질하고 오는 참인데, 함께 먹고 가시지요." 테세우스는 그의 극진한 태도에 황송함까지 느꼈다.
테세우스는 그와 한참을 떠들고 놀았다. 어둠이 내려앉았다. 달도 구름에 가려진 이날 밤은 칠흑처럼 어두웠다. "주무시고 가시렵니까."…올 것이 왔다. 테세우스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는 이 사내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이름은 다마스테스, 별명은 '잡아 늘이는 자'라는 뜻의 프로크루스테스였다.
"우리 집에 마침 손님용 침대가 있지요." 프로크루스테스는 느릿느릿 말을 이어갔다. "저는요. 재미있는 취미가 있어요." 프로크루스테스가 갑자기 입꼬리를 올렸다. "손님의 키가 제 침대보다 길면, 남는 만큼의 목과 다리를 잘라준답니다." 그는 더는 가면을 쓰지 못하겠다는 듯 비열한 표정을 드러냈다. "아, 키가 제 침대보다 짧으면요. 목과 다리를 침대에 딱 맞도록 당겨주지요." 프로크루스테스는 이 말과 함께 테세우스의 목덜미를 쥐었다. 그는 이제 딴 사람 같았다. 힘은 어찌나 센지, 웬만한 사람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을 터였다. 겨우 손아귀에서 벗어난 테세우스는 외려 몸을 날려 프로크루스테스를 제압했다. 테세우스는 그를 손님용 침대에 눕혔다. "자네의 키는 이 침대보다 더 긴데, 그만큼 내가 잘라주지." 비명이 울려퍼졌다. 테세우스는 그렇게 프로크루스테스까지 처단했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라는 말이 있다. 이는 어떤 절대적 기준을 정한 뒤 모든 것을 거기에 맞추려는 행동을 말한다. 이 말 또한 테세우스의 모험에서 탄생했다. 그리스 아테네에 있는 국립 고고학 박물관에는 테세우스와 프로크루스테스가 칠해진 도자기가 있다. 도끼를 든 테세우스가 프로크루스테스를 제압하고 있다. 프로크루스테스도 키가 제법 컸는지, 침대 바깥으로 다리가 무릎까지 튀어나와있다. 테세우스는 그만큼을 잘라버릴 것이었다. 19세기 독일의 잡지 베를리너 웨스펀(Berlin Wasps)은 프로크루스테스의 일화를 오토 폰 비스마르크 수상을 풍자하는 데 활용했다.
아테네에 도착한 테세우스는 그사이 키가 몇 뼘이나 더 컸다.
그는 이제 근육질의 전사였다. 오는 길에 온갖 나쁜 놈들을 다 때려잡은 그는 아테네에서 이미 유명 인사였다. 헤라클레스가 열두 과업 수행하듯 왔다고 해 '어린 헤라클레스'라는 별명도 붙었다. 그 무렵 아테네의 왕이자 테세우스의 아버지인 아이게우스 곁에는 마녀 메데이아가 있었다. 늙은 아이게우스를 유혹한 그녀는 왕비 자리까지 꿰찼다. 메데이아는 이후 그녀의 아들 메도스가 왕위를 물려받도록 온갖 수를 쓰고 있었다. 영악한 메데이아는 테세우스의 정체를 한 눈에 알아봤다. 아이게우스를 닮은 이 사내는 메도스의 자리를 위협할 수 있었다. "얼마 전 아테네로 왔다는 그 사내 말이에요." 메데이아가 아이게우스에게 속삭였다. "혹시 당신의 왕위를 노리고 온 건 아닐까요? 저대로 두면 저 사람을 따르는 국민이 늘어날 것이에요. 그러면 정말 위험해질 수 있어요." "어떻게 하면 좋겠소?" 아이게우스가 묻자 메데이아는 간결하게 답했다. "죽여야지요."
영국 화가 프레데릭 샌디스(1829~1904)가 그린 메데이아는 언뜻 봐도 만만찮아 보인다. 발달한 턱, 굵은 목, 넓은 어깨에서 배짱과 강인함이 느껴진다. 그녀는 마녀답게 두꺼비와 약초 등을 깔고 마법 약을 제조하고 있다. 에블린 드 모건(1855~1919)의 그림 속 메데이아는 그녀가 절세미인이었다는 설을 충실히 따른 것으로 보인다. 새침한 표정의 그녀는 핏빛 드레스를 입은 채 약병을 들고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
"마라톤 들판에서 미쳐 날뛰는 황소를 잡아 오시오."
얼굴을 가린 관리가 테세우스에게 전한 왕의 명령이었다. 상황을 알 리 없는 테세우스는 왕이자 아버지의 명령을 따랐다. 마라톤의 미친 황소는 헤라클레스가 열두 과업 중 일곱 번째 과제로 잡은 녀석이었다. 당시 헤라클레스는 크레타섬에서 이 괴물을 잡았다. 황소는 곧 가정의 여신 헤라에게 제물로 바쳐졌고, 헤라는별생각 없이 녀석을 대륙에 풀어줬다.
괴물은 괴물이었다. 황소가 지나간 곳에 남아있는 건 없었다. 수많은 사냥꾼이 황소를 잡으려고 했지만, 모두 난폭한 발길질에 희생당했다. 메데이아는 테세우스 또한 영영 돌아오지 않기를 바랐다.
사실 테세우스는 그 임무를 받고 외려 가슴이 뛰었다. 무려 그의 우상인 헤라클레스가 잡은 황소였다. 그런 녀석을 제압할 수 있다면 그에게는 더없는 영광이었다. 테세우스는 황소의 뿔을 부러뜨렸다. 뒷다리도 박살냈다. 그는 큰 어려움 없이 임무를 마칠 수 있었다. 프랑스 화가 샤를 반 루(1719~1795)는 테세우스가 마라톤의 황소를 손쉽게 제압하는 장면을 그렸다. 모든 이가 놀라고 있을 때 딱 한 명, 테세우스만이 태평하다. 황소는 분이 풀리지 않는 듯 몸부림치지만, 테세우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왕궁은 축하 잔치를 열 수밖에 없었다. 이쯤 아이게우스는 메데이아에게 완전히 세뇌돼 있었다. 굵직한 악당을 여섯이나 죽이고 온 청년, 마라톤의 미친 황소까지 잡고 온 이 사내를 위험한 인물로 보고 있었다. "포도주에 독을 타 죽이시지요." 아이게우스는 메데이아의 권유를 또 한 번 따랐다. 테세우스가 막 잔을 들어올렸다. 그때, 아이게우스는 그가 허리춤에 차고 있는 칼을 봤다. 분명 젊은 시절 자기가 섬돌 아래 두고 온 칼이었다. 신발, 그러고 보니 그가 신은 샌들도 굉장히 낯이 익었다.
"잠깐!"
아이게우스가 이날 현장에서 처음 한 말이었다. 연로한 아이게우스는 있는 힘을 짜내 테세우스에게 달려갔다. 그의 손을 쳐 잔을 깨뜨렸다. "어린 헤라클레스여. 내가 아직 자네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군." 아이게우스는 그의 두 어깨를 잡고 말했다. "아버지. 정말 아직도 모르셨어요? 제가 테세우스예요. 아버지의 아들이에요." 아이게우스는 그제야 사내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아이게우스와 테세우스는 감격의 포옹을 했다. 왕을 속인 메데이아는 아테네에서 쫓겨났다.
그렇게 테세우스는 아이게우스에 이어 왕이 돼 나라를 다스릴 것으로 보였다. 그의 인생도 안정을 되찾을 듯했다. 하지만 평화는 얼마 안 돼 깨졌다. "미노스 왕이 보내서 왔습니다. 저희와의 약속을 기억하고 계시지요?" 크레타에서 사신이 찾아왔다. "'때가 됐으니, 총각과 처녀 일곱 명씩을 공물로 바쳐라. 녀석들은 미노타우로스의 산 제물이 될 것이다.' 미노스 왕이 이렇게 전하셨습니다." 아이게우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미노타우로스? 테세우스는 이 장면을 엿보며 낯선 이름을 되뇌고 있었다. ▶다음 기사에는 연말을 맞아 '시시포스' 특별편이 이어집니다.
2022년 4월부터 매주 토요일 발행하는 후암동 미술관은 무한한 디지털 공간에 걸맞는 방대한 내용과 자료의 미술 스토리텔링 연재물로 업계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습니다.
가상의 시설 후암동 미술관을 세계관으로 두는 이 칼럼은 ▷이론편 ▷인물편 ▷현장편 ▷작품편 ▷신화편 ▷현대미술편 등 특별전을 선보이며 지금도 ‘퍼스트 펭귄’으로 도전과 실험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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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플루타르코스, 을유문화사
벌핀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 토마스 불핀치, 창해
그리스 로마 신화, 메네라오스 스테파니데스, 파랑새
〈후암동 미술관 신화 편 읽는 순서〉
〈시즌 1 : 프로메테우스〉
1)“독수리가 간 쪼아도 참는다” 최악고문 받는 男, 무슨 사연[후암동 미술관-프로메테우스 편] (2023. 9. 9.)
2)“도저히 못참겠어” 봉인 푼 그녀, 외마디 비명…惡은 그렇게 쏟아졌다[후암동 미술관-판도라 편] (2023. 9. 23.)
3)“네 엄마 뼈를 던져라” 화들짝 놀란 명령…울면서도 할 수밖에[후암동 미술관-데우칼리온 편] (2023. 10. 7.)
〈시즌 2 : 헤라클레스〉
4)“앗, 아파” 근육질 아기가 빨아들인 모유…뻥 걷어차고 싶었지만[후암동 미술관-헤라클레스 편] (2023. 10. 21.)
5)“절세미녀 셋이 있는 곳에 가쇼” 근육男은 공포에 떨었다…무슨 일[후암동 미술관-헤라클레스 ②편]
6)“너, 내 노예가 돼라” 살인죗값 다 치렀는데…이번엔 또 웬 날벼락[후암동 미술관-헤라클레스 ③편]
7)“나랑 3년 노예계약해” 여왕과의 동거…‘강제여장’ 굴욕까지 참았더니[후암동 미술관-헤라클레스 완결 편]
〈시즌 3 : 테세우스〉
8)미모의 아내 “저 남자 죽여야해요” 남편 현혹…소름 돋는 ‘속마음’은[후암동 미술관-테세우스 편]
yul@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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