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립문 안 지키고 왜 짖나” 영조, 탕평 반대파 삽살개에 비유 : 국립중앙박물관 탕탕평평 전

2023. 12. 16. 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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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정조 시대 ‘탕탕평평’ 특별전
영조의 청계천 공사 시찰을 묘사한 ‘준천첩’(1760). 김희성(?-1763 이후)의 그림. 기증 이건희 컬렉션. 국립중앙박물관 ‘탕탕평평(蕩蕩平平)-글과 그림의 힘’ 특별전에 나와있다[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준천첩' 부분 확대. 영조 임금이 청계천 준천 공사를 시찰하고 있지만 신하들에게 둘러싸인 비어있는 자리로만 표현된다. 임금의 모습은 그리지 않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관리를 천거하는 일이 잘 되었다고 하니 매우 다행이다. 경의 본직은 함께 물러난다는 의리로 사퇴 명분을 삼는 것이 좋겠다. 내일 안으로 사직하겠다 하고 임금의 답을 기다리고, 또 여러 사람이 서용되어 유임되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관직에 나오는 것이 어떠한가?”

정조 임금(재위 1776~1800)이 1798년 1월 11일 인사 행정을 한 후 그날 밤에 은밀하게 당시 이조 참판이던 노론 벽파(僻派)의 리더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 내용이다. 심환지는 정조의 밀명대로 사직 상소를 올렸고, 정조는 못 이기는 척 허락했다. 정조는 그 후에도 몇 차례 비밀 편지로 심환지에게 명을 내려 ‘짜고 치는’ 사직과 복직을 행하곤 했다. 앞서의 편지 실물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지난 8일 시작한 ‘탕탕평평(蕩蕩平平)-글과 그림의 힘’ 특별전에 나와있다. 내년 영조 즉위 300주년을 맞아 영조(재위 1724~1776)와 그의 뒤를 이은 손자 정조의 정치를 당대의 글과 그림으로 돌아보는 전시다.

심환지, 편지 없애라는 정조 명 어겨

정조 임금이 노론 벽파의 영수 심환지에게 보낸 비밀 편지.국립중앙박물관 ‘탕탕평평(蕩蕩平平)-글과 그림의 힘’ 특별전에 나와있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정조는 1796년부터 1800년까지 심환지에게 297점에 이르는 비밀 편지를 보냈는데 2009년에야 발굴되었다. 이 편지들은 『정조어찰첩』으로 묶여 2016년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국립중앙박물관이 구입해 소장하고 있다. 그중 일부가 이번에 최초로 박물관 전시에 나온 것이다.

전시된 편지 중에 정조가 세상을 떠나기 13일 전인 1800년 6월 15일에 보낸 것도 있다. “나는 뱃속의 화기가 올라가기만 하고 내려가지는 않는데 여름 들어서 더욱 심해졌다. (…) 얼음물을 마시거나 차가운 온돌의 장판에 등을 붙인 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니 답답하다.” 국가 기밀인 왕의 건강 상태를 심환지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은 것이다.

2009년에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이 이 비밀 편지들을 처음 공개했을 때 그 충격파는 엄청났다. 왜냐하면 당시에 ‘근대화를 꿈꾼 개혁군주 정조가 심환지로 대표되는 수구보수파 노론 벽파에 의해 독살되었다’라는 정조 독살설이 크게 유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통 사학계에서는 지지 받지 못했으나 『영원한 제국』 『조선 왕 독살사건』 등 인기 소설과 대중역사서를 통해 많은 대중에게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러나 『정조어찰첩』이 발표되면서 정조 독살설의 영향력은 크게 꺾였다.

“이 비밀 편지들은 정조의 솔직하고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의 치열한 막후 정치의 내막을 드러냅니다. 정조가 현실적인 정치 능력이 뛰어나고 많은 노력을 한 군주였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그로 인해 세손 때 불안했던 입지를 극복하고 강한 왕권을 구축했습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정조는 편지를 다 없애라고 했는데, 심환지는 없애지 않고 각 편지에 언제 받았는지 날짜와 시각까지 다 적어서 차곡차곡 쌓아놨다는 것이죠. 만약의 경우에 자기 살 길을 마련해 놓은 것이죠.” 전시를 기획한 명세라 학예연구사는 말했다.

김두량이 그리고 영조가 글을 쓴 '삽살개'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정조어찰첩』을 포함해 이번 전시에는 영조와 정조가 쓴 어필(御筆)과 두 임금의 의도를 반영해 제작된 궁중행사도 등 54건 88점을 선보인다. 이중 최초로 일반에 공개되는 화원 화가 김두량의 그림 ‘삽살개’는 털을 휘날리며 사납게 짖어대는 개의 묘사도 일품이지만 그림을 보고 영조가 몸소 지어 쓴 풍자적인 글이 함께 있어 더욱 재미있다. “사립문을 밤에 지키는 것이 네가 맡은 임무이거늘 어찌하여 길에서 대낮에 이렇게 짖고 있느냐”는 내용으로, 영조의 탕평에 반대하며 말이 많은 신하들을 삽살개에 비유한 것이다.

또한 정조가 즉위 19년인 1795년 어머니 혜경궁의 회갑을 맞아 7박 8일로 화성에 행차한 것을 세밀하고 화려하게 기록한 거대 8폭 병풍 ‘화성원행도(華城園幸圖)’가 전시에 나와 있다. 화성 행차 전에 행렬에 참여할 6760명의 사람들이 각각 어떤 기물을 들고 어디에 위치해서 걸어야 하는가를 미리 보여주는 45미터 길이 ‘화성원행 반차도’도 함께 전시되어 있다. 따라서 화성 행차의 계획과 결과를 비교하며 당시의 모습을 생생히 그려볼 수 있다. ‘화성원행도’의 각 디테일을 클로즈업해서 보여주는 미디어아트가 이를 돕는다.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던 정조가 혜경궁이 사진 앨범처럼 간직할 수 있도록 따로 제작해 한글 설명을 붙인 ‘원행정리의궤도’ 또한 인상적이다.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과 화성 행차를 다녀온 후 어머니가 기념 앨범처럼 간직할 수 있도록 따로 제작해 한글 설명을 붙인 ‘원행정리의궤도’ 국립중앙박물관 ‘탕탕평평(蕩蕩平平)-글과 그림의 힘’ 특별전에 나와있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원행정리의궤도’ 부분확대. 혜경궁의 회갑연에서 무희들이 불로장생 천도 복숭아를 바치는 궁중무용 '헌선도'를 추고 있다. 왼쪽에 호피가 깔린 자리에 정조 임금이 앉아 있으나 관례에 따라 왕의 모습은 그리지 않았다. 위의 붉은 장막 뒤에 혜경궁이 앉아 있으며 역시 모습은 그려지지 않았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이들은 단지 화려하고 흥미로운 볼거리로만 나온 것이 아니다. 화성 행차는 정조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1735-1762)의 추숭 관련 문제를 해결하고 왕권의 위엄을 보이며 백성들과 교류하고 신하들과 대화합의 장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전시는 설명에서 이 맥락을 강조한다. “과거 전시들은 각 유물의 양식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이번 전시는 각 유물이 어떤 정치적·사회적 맥락에서 어떤 의도로 제작되었는가에 초점을 맞춘 전시입니다.”라고 명 연구사는 설명했다. 한마디로 옛 글과 그림을 통해서 ‘조선의 부흥기’로 일컬어지는 영·정조 시대 군주들의 치열한 정치사를 보는 전시인 것이다.

특히 흥미로운 전시 유물 중에 ‘기증 이건희 컬렉션’인 ‘준천첩’도 있다. 매년 한양 청계천 물이 넘쳐 백성들이 고통을 겪자 영조는 즉위 36년인 1760년에 청계천 바닥 흙을 걷어내는 공사를 지시하고 자신이 직접 현장에 나가 지켜보았다. 공사가 성공적으로 끝난 뒤 이 일을 글과 그림으로 남겨 화첩을 제작했다. 조선 왕 중에 자신의 업적을 그림으로 남긴 사례는 처음이었다.

기증 이건희 컬렉션 ‘준천첩’도 눈길

국립중앙박물관 '탕탕평평(蕩蕩平平)-글과 그림의 힘' 특별전 언론공개회에서 참석자가 박문수 분무공신 전신상과 반신상을 살펴보고 있다. [뉴스1}
영조와 정조가 글과 그림을 통해 정치를 하는 것에 뛰어났다는 것은 전시의 시작부터 명확히 드러난다. 두 임금이 자신들의 정통성과 정적 처형의 정당성 등을 널리 알리기 위해 간행한 책들이 전시되어 있다. ‘영조가 올린 게장을 먹고 경종이 사망했다’는 정적들의 ‘경종 독살설’에 영조가 반박한 책, 정조가 세손 시절 정적들로 받은 위협과 정적 처벌의 정당성에 대해 설파한 책 등이다. 이중에는 더 많은 백성이 볼 수 있도록 한글로 제작된 언해본도 있다.

“일종의 해명 자료인데 이것을 책으로 낸 사례는 영조가 처음이었습니다.”라고 명 연구사는 설명했다. 이 책들은 영조와 정조 모두 글을 통해 통치를 하겠다는 의지가 강했다는 것뿐만 아니라 둘 다 즉위 당시에 정통성에 대한 위협을 많이 받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를 타개하고자 영조는 국왕이 중심이 된 ‘황극탕평(皇極蕩平)’을 추진했고 정조는 이를 이어받아 발전시켰다. ‘탕평’은 유교 경전 『서경(書經)』에서 “치우침이 없고 무리를 만들지 않아야 왕도가 탕탕(넓다는 뜻)하고, 무리를 만들지 않고 치우침이 없어야 왕도가 평평하다.”는 구절에서 따왔다.

“사실 탕평의 개념은 요즘 사람들이 많이 오해하는 것처럼 현대 민주주의, 현대의 공평과 평등 개념인 것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왕을 위에 둔 수직적인 개념입니다. 왕의 밑에서 붕당과 상관없이 인재를 뽑아서 쓰겠다는 것이죠.” 명 연구사는 설명했다.

'주부자 시의도(朱夫子詩意圖)'(1799) 6폭 병풍 중 제3폭과 제4폭. 김홍도(1745-1806 이후)가 남송 주자(1130-1200)의 시를 그림으로 그려 정조 임금에게 바친 작품이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영화·드라마 등 대중문화를 통해 2000년대에 확산된 이러한 오해에 대해 주류 역사학자들은 주의를 요구한 바 있다. 정조의 경우, 뛰어난 역량을 갖춘 군주인 건 사실이나 근대 시민사회를 지향했다는 식의 묘사는 판타지라는 것이다. 책 『정조와 정조 이후』(2017)의 공저자 오수창 서울대 교수는 말했다. “군신의리에 대한 그(정조)의 집착에서 드러나듯이 그의 정치는 주자학의 명분론을 벗어난 것이 결코 아니었으며 (…) 시대구분이 적용될 만한 변혁을 지향하거나 수행한 것이 아니라는 점은 최근의 연구에서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이것은 ‘탕탕평펑’ 전시에서 ‘주부자 시의도’ 병풍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주자의 시를 단원 김홍도가 그림으로 해석해 그려 정조에게 바친 작품이다. 박물관에 따르면 정조는 주자가 공자 이후 1인자라며 높이 평가했고, 이 시대에 맞는 선비가 되려면 주자의 시를 배우라고 했다.

이렇듯 ‘탕탕평평’ 전시를 통해 영·정조가 문예를 통해 정치를 하는 과정에서 참신한 면모와 보수적인 면모를 복합적으로 지녔음을 알 수 있으며, 역사에 관심이 있을수록 더 많은 것을 발견하고 전시의 행간을 읽을 수 있다. 전시는 내년 3월 10일까지. 12월 17일까지는 한시적으로 무료.

문소영 기자 sym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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