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이 사나운 곳아" 여성다움 거부, 자유연애 외친 김명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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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문화의 기록장 ‘종로 모던’] 근대 여성혐오 피해 본 신여성
“조선아 내가 너를 영결할 제/…/죽은 시체에게라도 더 학대해다구/그래도 부족하거든/이 다음에 나갓튼 사람이 나드래도/할수만 잇는대로 또 학대해보아라/…/이 사나운 곳아 사나운 곳아”라며 근대사회가 여성을 얼마나 ‘학대’했는지 절규하듯 토로한 시인이 있다. ‘유언’이라는 시 제목처럼 ‘학대’하는 세상에서 매일 죽음의 유혹을 느끼며 살아갔던 작가 김명순(1896~1951)이다.
그녀의 이름 앞에는 ‘여성 최초’라는 수식어가 많이 붙는다. 최초의 근대여성작가로 시집 『생명의 과실』(1925)을 냈으며, 외국어 능력이 뛰어나 애드거 앨런 포우, 샤를 보들레르 등의 작품을 번역했다. 또 근대문학을 선도하던 문예잡지 『창조』의 동인이자 『매일신보』 기자로도 활동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근대 여성혐오의 대표적 피해자였다.
집필한 소설 속 배경 대부분이 종로
당시 신여성에 관한 담론을 주도하던 잡지 『신여성』에서는 ‘이혼 후 일본에서 융비술(隆鼻術)을 하고 돌아와 연애생활을 달게 하고 있는 김원주…’(1924.04), ‘이성을 너무 많이 아는 이 중에 훌륭한 사람을 본 적이 없는데 김명순도 마찬가지’(1924.11), ‘결혼했는지 이혼했는지 첩이 되었는지 도망했는지, 국경 넘어가 있던 윤심덕이 요사이 조선에 들어와 숨어 사는 것 같다’(1925. 여름호)는 등 이들에 대한 비아냥이 담긴 기사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위의 예술가 중에서 문학계가 합심하여 배척하고, 황색언론이 관음증의 대상으로 소비하여 존재 자체를 부정당한 대표적 인물이 김명순이다. 그녀는 대지주이자 평양 참사관을 역임한 고위 관료 김희경과 기생출신 첩 산월과의 사이에서 출생했다. 1912년 진명여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시부야 국정여학교로 유학 갔으나 학교를 그만두고 급거 귀국한다. 후일 초대 육군참모총장에 오른 이응준에 의해 데이트 성폭력을 당하고, 심각한 2차 가해까지 당한 충격 때문이다. 심지어 『매일신보』는 그녀가 짝사랑하던 이응준의 결혼 거절로 자살을 기도했다는 식의 왜곡된 내용의 기사를 여러 번 게재한다. 공인도 아닌 19살 여성의 내밀한 사생활이 그녀의 의지와 무관하게 대중에게 노출된 것이다.
어머니가 기생 출신의 첩이라는 출생 배경을 앞세워 ‘더럽고 음탕한 피’ ‘더러운 자궁’을 타고난 여성으로 규정하고, 잘못의 원인을 그녀에게 돌린다. 더구나 ‘순결치 못한’ 처녀라는 소문만으로 기독교계 학교로부터 제적당했고, 개종한 가톨릭교계에서도 정절의 윤리에 어긋난 존재로 인식되자 결국 신앙까지 버린다. 수필 ‘귀향’(1936)에서 그는 ‘일생을 통하야 못 이저지는 그 피압흔 경험을 갓자고 생기어나서 공부하고 일하고 고난당하든 일들이 뜨거운 눈물을 하염업시 자아내고야 맘니다’라며 성폭력의 트라우마로 평생 고통 받았음을 토로했다.
흥미로운 점은 그녀의 소설 속 공간 대부분이 종로를 배경으로 한다는 것이다. 소설 ‘꿈뭇는 날 밤’(1925)의 주인공은 안국동 네거리를 지나 경복궁으로 향하며 사색에 잠긴다. ‘나는 사랑한다’(1926)에서 헤어졌던 남녀 주인공이 재회하여 불같은 사랑을 확인하는 곳이 동숭동이다. ‘모르는 사람갓치’(1929)에서는 여주인공 순실이 애정문제로 고민하며 걸어 다니는 곳이 북촌 곳곳이다. 그녀가 종로에 공간적 의미를 부여한 것은 근대 종로가 문화예술인들의 사교와 활동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매일신보 기자 활동, 외국서적 번역도
김명순이 여성혐오의 아이콘이 된 것은 조선이 요구하던 ‘여성다움’을 온몸으로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조선 여성에게 필요한 것이 ‘자유’이고, 이를 위해서는 자유연애와 자유결혼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를 실천했다. 이러한 주장은 같은 여성한테까지 비판받았다. 김활란은 ‘연애라는 미명으로 자기네 양심상 가책을 무찰(憮擦)시키며 사회적 체면을 유지하려는 그런 기만 행동과 진정한 연애와는 엄정히 구별해서 취급해야 할 것’(『신여성』, 1933.02)을 강조한다. 김명순처럼 자유연애를 추구했던 신여성들은 성적으로 문란하다고, 기혼남을 유혹해 가정을 파탄 내는 부도덕한 팜므파탈이라고, 연애의 진정한 가치를 모독한 사이비라고 무차별적 ‘학대’를 받은 것이다.
그녀의 작가적 역량을 인정해 『창조』 동인으로 받아들인 김동인이 비난의 첨병에 서자 김명순은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받는다. 김동인은 그녀를 모델로 한 소설 ‘김연실전’(1939)의 주인공으로 문란한 신여성을 등장시켰다. 친하게 지내던 동향의 오빠 친구가 김동인이다. 자신에 대한 오해를 극복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그녀였지만 가까운 지인의 노골적 인신공격에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김연실전’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응 없이 쫓기듯 일본으로 건너간 그녀는 가난과 병마에 시달리다 55세에 외롭게 죽음을 맞았다. 말년에는 정신병원에서 행려병자로 지냈다고 알려진다.
남성작가들이 그녀에게 이처럼 가혹했던 이유는 자신보다 뛰어난 여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열등감, 억압에도 좌절하지 않는 주체적 의지에 대한 거부감에 더해 피식민지 지식인으로서의 무력감을 여성혐오라는 폭력의 발산으로 대리 보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녀가 발표한 130여 편의 작품과 글들은 모두 자신의 삶에 기반을 뒀다. 시대에 저항하기 위한 대항적 글쓰기로 그녀가 선택한 것이 자전적 글쓰기였기 때문이다. 문단의 역사에서 강제로 삭제됐던 김명순은 요즘 미투(Me, too)운동 속에 새롭게 주목받고, 작품세계가 재평가되고 있다. 소설가 김별아는 그녀의 삶을 복원한 소설 ‘탄실’(2016)을 발표하였고, 그녀의 작가적 삶을 그린 연극 ‘나는 사랑한다-김명순전’(2022), ‘의붓자식’(2023)이 종로문화다양성연극제에서 공연됐다.
물론 김명순 생전에 그녀를 옹호한 목소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최서해가 김기진의 ‘김명순에 대한 공개장’을 비판하며 그녀를 격려해서 창작활동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을 얻었고, 자살하려던 그녀에게 누군가 보낸 ‘아름다운 K양(김명순)이 혼탁한 사회에서 아름다운 구원의 여성’이 되기를 바란다는 편지로 인해 다시 삶을 다잡았다. 그녀를 응원하는 작은 목소리가 있었기에 그 폭력의 시대를 견딜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제는 그녀와 연대하려는 적극적인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비로소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회복하고, 작품으로 시대와 화해하고 있다.
종로구청·종로문화재단·중앙SUNDAY 공동기획
이은경 한국연극평론가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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