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로 잰 듯 공정하게…혁명만큼 절실했던 미터법
제임스 빈센트 지음
장혜인 옮김
까치
“여기서 핀까지 몇 야드 남았습니까.” “100m 남았습니다. 109야드쯤 됩니다.” 한국 골프장에서 들을 수 있는 대화다. 과거엔 미터와 야드 표기를 혼용했으나 지금은 한국 골프장들이 미터법에 맞춰 거리 단위를 미터로 표시한다. 한데 골프가 원래 영미권에서 인기 있었던 스포츠인 관계로 그곳에서 주로 쓰는 야드나 피트, 인치라는 단위가 아직도 한국 골퍼들 사이에 종종 사용된다.
지금은 미터법이 전 세계적으로 대세이기는 하지만 영국·미국을 비롯해 여전히 고유의 도량형을 사용하는 나라들이 더러 있다. 측정 단위가 달라 나라 간에, 지역 간에 약간의 혼란이 있긴 해도 각자의 단위, 예를 들면 미터나 야드는 그 길이 등이 고정적으로 확고하게 정해져 있기 때문에 옛날처럼 ‘고무줄’은 아니다. 이쯤 되면 드는 생각이 있다. 도량형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측정의 세계』를 읽어 보면 어느 정도 이에 관한 궁금증이 풀릴 수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나일강의 범람 수위를 측정하기 위해 나일로미터(nilometer)라는 도구를 이용했다고 한다. 나일강의 물이 닿는 기둥이나 벽 계단에 새겨진 거대한 자로, 여기엔 큐빗 단위의 눈금이 그려져 있다.
인류의 여러 정치체계는 아주 오래된 옛날부터 측정 단위를 규제해 왔다. 측정제도는 지도자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데 필수적 도구였다. 그래서 권력이 믿을 만한 단위를 강제하는 것은 특권이자 의무이기도 했다.
기원전 1750년 무렵 제정된 메소포타미아의 함무라비 법전에는 “포도주를 적게 계량해서 구매자를 속인 판매자를 물에 던져야 한다”는 기록이 나온다. 13세기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2세는 “가짜 척도로 부정행위를 한 범죄자에게는 초범 때엔 그 자리에서 채찍질하고, 재범 때는 한쪽 손을 자르고, 세 번째에는 교수형을 선고해야 한다”고 했다. 1215년 마그나 카르타에 서명한 영국 국왕 존은 “왕국 전역에 포도주의 척도는 하나, 맥주의 척도도 하나, 옥수수의 척도도 하나다”라고 했다.
가짜 척도는 공동체 전체에 불신을 퍼트릴 수 있다. 탈무드에는 “척도를 속인 행위에 대한 처벌은 부도덕한 행위에 대한 처벌보다 가혹해야 한다. 측정을 속인 행위는 이웃 사람들에 대한 범죄이기 때문이다”고 적혀 있다. 측정은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약속이므로 전적으로 개인적인 문제로만 다룰 수 없다. 공정한 단위를 보장하는 문제에는 모든 사람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측정 체계인 미터법은 프랑스 혁명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혁명 당시 평민은 귀족의 속임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귀족은 교역과 농업 생산을 촉진하기 위해서 표준화를 원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1000여 개의 단위가 있었고 지방에 따라 25만 가지의 변종이 있었다. 도량형의 통일이 혁명 못지않게 절실했다.
그래서 혁명 성공 후 나온 것이 미터와 킬로그램 표준이었다. 미터의 길이는 북극에서 남극으로 이어지는 가상의 선인 지구 자오선의 일부로, 그리고 킬로그램은 물 1000 제곱센티미터의 무게로 정의했다. 파리 국가기록원에 보관돼 있는 두 표준은 모두 순도와 견고함이 높은 백금으로 주조됐다. 오늘날 우리가 쓰는 새로운 미터원기의 제막식은 1799년 6월 22일 원로원에 백금으로 만든 최종 미터 자가 제출되면서 열렸다.
측정에 대한 초기 관심은 경작지나 식량과 같은 생활의 필수 요소를 측정하는 데서 비롯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측정은 이름을 붙일 수 있는 모든 현상에 관련된다. 강우량, 방사선량, 열량, 우주의 깊이, 원자 사이의 공간, 소음의 크기 등 거의 모든 것을 측정한다. 심지어 행복이나 고통, 공포처럼 측정할 수 없는 것도 측정해 보려는 척도를 고안하기도 한다.
측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분야가 통계다. 각종 통계는 인류의 생활을 면밀히 들여다보는 ‘만능자’ 역할을 한다. 미국 국립 표준 및 기술 연구소(NIST)는 ‘땅콩버터 2387’ 같은 표준 참고물질 1200종을 만들어 전 세계인이 검증용과 교정용으로 사용할 수 있게 제공한다. 제네바에 있는 국제표준화기구(ISO)는 2만2000여 개의 표준을 규제한다. 사진 필름의 감도 ISO까지 모든 것에 대한 지침을 낸다.
파인트와 야드를 쓰는 영국과 미국 등에서는 여전히 미터법에 대한 반발과 저항이 거세기는 하지만 이들 또한 다른 나라와 교역, 교류를 하기 위해서는 제품이나 학술 등 다양한 분야에 미터법을 병기하지 않을 수 없다. 미터냐 야드냐를 두고 여전히 골퍼들 사이에선 씨름이 벌어지고 있어도, 통일된 측정을 통해 공동체를 하나로 묶고 발전시키려는 인류의 노력은 끝이 없다. 『측정의 세계』에 푹 빠져 가늠하기 어려운 즐거움을 찾아보자.
한경환 기자 han.kyunghw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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