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두건·황금거위…동화에 포도주 장면 많은 이유는?

2023. 12. 15. 23:47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와글와글, 와인과 글
오토 쿠벨이 그린 ‘빨간 두건’ 일러스트레이션. [사진 위키피디아]
독일의 겨울밤은 유난히 길고도 깊다. 어둡고 축축한 겨울에 그나마 작은 위안을 찾을 수 있는 곳은 화려한 크리스마스 마켓이다. 레브쿠헨이나 슈톨렌 같은 전통 과자와 빵, 아이들에게 나눠줄 초콜릿과 사탕을 산 뒤 석쇠에 구운 소시지를 곁들여 글뤼바인 한 잔하면서 모르는 사람들과도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는 낭만 가득한 곳이다. 글뤼바인(Glühwein)은 계피와 생강 등 여러 향료를 넣고 뜨겁게 끓인 와인으로 프랑스 문화권에서는 ‘뱅쇼’라고 부른다.

선물 꾸러미를 한아름 안고 귀가한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그림동화집』에 수록된 동화를 읽어주면서 긴 겨울밤을 보낸다. ‘옛날 옛적에’로 시작되는 이 동화집에는 ‘백설공주’ ‘신데렐라’ ‘개구리 왕자’ 등 유명한 동화가 가득한데, 이 가운데 어린 소녀가 늑대를 만나 고난을 겪는 ‘빨간 두건(Rotkäppchen)’ 이야기를 다시 읽어보자.

세상 그 누구보다 손녀를 사랑하는 할머니는 붉은 벨벳으로 만든 두건을 선물했고, 소녀는 이 두건이 아닌 다른 것은 쓰지 않으려고 해서 ‘빨간 두건’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숲속에 살고 있는 할머니가 병이 나서 어머니는 소녀에게 갓 구운 케이크와 포도주 병이 담긴 꾸러미를 주며 당부한다. “숲으로 들어가면 딴짓 하지 말고 큰길만 따라 얌전히 가야 해. 장난을 치다간 넘어져서 포도주병을 깨뜨릴 수 있으니까.”

소녀는 숲속에서 만난 늑대의 감언이설에 속아 케이크와 포도주를 빼앗기고 늑대의 먹거리로 전락하지만, 때마침 도착한 사냥꾼의 기지로 다시 살아난다. 숲속에 사는 할머니는 혼자 사는 병든 노인의 위험성, 늑대 앞의 어린이는 낯선 이의 꼬임에 넘어가기 쉬운 존재로 해석할 수 있다.

프랑크푸르트 시청의 직영 포도원 와인. [사진 위키피디아]
그렇다면 붉은 포도주는 어떤 의미일까? 성경에 나오는 빵과 포도주의 비유라는 견해도 있지만 붉은 포도주를 소녀가 성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한 몸과 호르몬의 변화로 해석하는 전문가도 많다. 처녀성의 상징이라는 견해이다. 숲은 소녀가 청소년을 거쳐 여자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불가피한 통과의례의 장소로, 익숙한 길이 아닌 낯선 길에서 만난 늑대는 낯선 남자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 즉 성장 모티브 관점이다.

‘빨간 두건’ 이외에도 『그림동화집』의 많은 이야기에 포도주 장면이 삽입되어 있다. ‘숲속의 세 난쟁이’ ‘황금거위’ ‘까마귀’ ‘꾀 많은 그레텔’ ‘악마의 황금 머리카락 세 올’ ‘요술 식탁, 황금 당나귀, 자루 속의 몽둥이’ ‘두 형제’ ‘뱀이 가져온 잎사귀 세 장’ ‘가난뱅이 농부’ 같은 동화들이다. ‘꾀 많은 그레텔’ 이야기에서는 알코올 중독에 빠진 요리사의 부정적 측면도 강조하고 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그림동화집』에 포도주 장면이 이처럼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메르헨의 길’이 시작되는 하나우시의 그림 형제 동상. [사진 위키피디아]
독일의 그림(Grimm) 형제가 처음 동화를 수집할 때의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풍기는 어감과 달리 『그림동화집』은 태평스럽고 한가한 시절에 탄생하지 않았다. 국토는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대에 짓밟히고 언어는 빼앗겼으며 개인적으로는 하루 한 끼 식사로 버텨야 하는 위기 상황에서 형제는 메르헨 수집에 착수한다. ‘동화’로 번역되곤 하지만 메르헨(Märchen)의 원래 의미는 민간에 구전되어 오는 작은 이야기, 학술적으로는 민담(民譚)이 더 적합하다. 거르지 않은 옛이야기 속에 막강한 로마 군단을 무찌른 게르만 전사의 용감한 기상과 건강한 독일 정신, 위기를 돌파할 출구전략이 숨어있을 것이라 형제는 믿었다. 하지만 완전히 독일적이라기보다는 다른 나라에서 유입된 이야기들도 적지 않았다는 것이 훗날 밝혀지기도 했다. 아무튼 아이들이 아닌 성인 대상으로 쓴 이야기였다는 뜻이다.

아이들 사이에 인기가 높아지면서 어린이가 읽기 부담스런 부분을 가다듬어 내놓은 것이 독일어 약자로는 KHM이라 부르는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옛날이야기』이다. 동화는 교훈이 목적이다. 선악의 이분법적인 구도와 가치관이 담겨 있으며 인간의 어두운 측면도 스며 있다. 홀아비와 과부가 만나 결합해서 벌어지는 친딸과 의붓딸의 비극을 그린 ‘숲속의 세 난쟁이’가 대표적이다. “내가 네 아버지와 결혼하고 싶다는 얘기를 네 아버지에게 좀 해주렴. 우리가 결혼하게 되면 넌 매일 아침 우유로 세수하게 되고 포도주를 마시게 될 거다. 내 딸은 물론 세수하고 물을 마시게 될 거고.”

물이 아닌 포도주는 귀함과 부유함의 코드로 읽힌다. 전통적인 신분사회에서 왕이나 왕자, 공주, 혹은 귀족과 결혼하는 것이 유일한 신분 상승 기회였기에 포도주는 신분 상승을 의미하기도 한다. ‘황금거위’에서 쓰디쓴 맥주가 맛있는 포도주로 변하는 장면이 좋은 예이다. 그림 형제가 태어나고 성장한 곳은 헤센 지방, 프랑크푸르트와 그 부근으로 곧 로마제국의 북방한계선이다. 로마인들은 AD 69년을 기점으로 라인강 유역에서 점차 영향력을 잃기 시작하지만, 약 500년 동안이나 이 지역을 지배하면서 두 개의 거대한 문화적 발자국을 남기게 되니 포도주와 기독교였다. 대체로 라인·마인·모젤·도나우강을 기준으로 남쪽과 주변은 와인과 가톨릭 문화, 북쪽은 맥주와 신교 영향이 강하다.

뢰머라 부르는 프랑크푸르트 시청 후문 입구에는 ‘바인구트(Weingut)’라는 간판이 보이는데, 호흐하임 등 인근지역에서 생산된 와인 직영 판매점으로 주품종은 리슬링이다. 시청에서 맥주가 아니라 와인을 판매한다는 것은 곧 프랑크푸르트의 오랜 포도주 전통을 말한다. 그림 형제 동상이 서 있는 프랑크푸르트 옆 도시 하나우에서 시작해 북쪽 브레멘까지의 길을 가리켜 ‘메르헨의 길(Märchenstrasse)’이라 한다. 아름다운 동화의 배경이며 독일 인문학을 일으킨 그림 형제의 자취가 남아있는 곳이다. 동시에 양질의 와인을 즐길 수 있으니 진정한 ‘와글와글’의 길이기도 하다.

손관승 인문여행작가 ceonomad@gmail.com MBC 베를린특파원과 iMBC 대표이사 를 지냈으며 『리더를 위한 하멜 오디세이아』 『괴테와 함께한 이탈리아 여행』 등 여러 책을 썼다.

Copyright © 중앙SUNDAY.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