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수장’이라는 자리[동아시론/남주홍]
‘휴전국’ 한국서 정보기관 특수책임 막중
무거운 사명 수행할 전문 리더십 절실
우리 국가정보원도 지난 정권에서 이 음지의 그림자 정보전 수행 능력이 크게 훼손됐다. 북과 가짜 평화 환상에 빠져 대공, 방첩, 휴민트 공작 역량이 뿌리째 흔들렸다. 국정원의 존재 이유는 평소 국가안보의 창이요 방패로서 24시간 전략정보전과 정보심리전을 선제적이고 예방적으로 수행해 국정 전반을 보좌하는 것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좌파 정권의 정치 성향만 추종하다 보니 기본 사명과 특수임무를 망각한 것이다. 과거 필자가 요원들에게 국익 수호의 최전선에 선 이 몸 안에는 국가가 있다고 생각하라고 정신 무장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것도 바로 이 같은 정치적 모험과 위험 때문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임 국정원장은 무엇보다도 기본 임무에 충실해 그간 많이 흐트러진 조직 관리와 사기 진작, 그리고 정예 교육훈련에 철저히 내실을 기해야 한다. 예측 불가능한 정보 세계에서 예측 가능한 정보를 생산해 내야 하는 항상 불안전한 결과를 책임지는 고독한 자리가 정보수장직이다. 즉, 권한보다는 책임이 훨씬 더 크게 따르는 고도의 프로정신이 요구되는 자리임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정보의 성공은 당연해도 실패는 어떠한 형태이건 드러나고야 말기 때문에 일종의 존재하지 않은 명성 속에 지낼 각오를 해야 한다. 특히 정보와 정책의 경계선이 모호한 탓에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너무 가까워서도 안 되고 반대로 멀어서도 안 되는 불가원불가근의 직언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한마디로 정보수장의 최대 적은 바로 자신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는 남북한 관계의 이중적 현실에 그대로 투영돼 있다. 남북 관계는 최선일 때도 늘 긴장 상태에 있고 최악일 때는 전쟁 공포 분위기까지 조성되는, 적과 동시에 동족이라는 특수관계가 아닌가. 따라서 정보수장은 ‘우리는 지금 휴전 중이다’라는 확고한 안보관으로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만다는 위기관리 의식에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적시 첩보와 정보가 역사를 바꿀 수 있고 정보는 1%의 가능성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에 그만큼 성역이 없으며 완벽한 공작도 없다. 한마디로 정보전은 전·평시 구분이 없고 전·후방 경계도 없다. 따라서 이 세계에서는 무엇보다도 요원들의 충천한 사기와 정보수장에 대한 신뢰가 필수적이다. 그간 리더십에 대한 불신으로 내부 협업이나 정보융합 부재가 자주 있었음을 반성하고 조직의 안정과 요원들의 전문화 정예화 노력 없이는 단순 정보행정기관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는 냉엄한 지적에 철저한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외교가 가능성을 추구하는 예술이라면, 정보는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는 공작적 기술이고 이는 오직 뛰어난 전문 리더십 존재를 전제로 한다. 이스라엘 모사드와 미 중앙정보국(CIA) 수장이 정권이 바뀌어도 자주 연임되는 이유가 바로 이 지속성 때문이다. 즉, 우리처럼 권력 실세나 측근을 전문성 없이 정치적으로 임면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러한 점에서 지난날의 국정원장 수난사와 소위 적폐청산 몰이는 참으로 부끄러워해야 할 흑역사가 아닐 수 없다. 정보 세계에 대한 일반인들의 선의의 무지와 두려운 호기심, 그리고 정치권의 음모론적 편집증으로 국정원이 그간 얼마나 흔들렸었는지는 작금 소리 없이 무너져 내려버린 대공전선의 비감한 현실이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우리 사회 제도권 안팎에서 광범위하게 암약하고 있는 종북 반국가세력이 민주주의를 이용해 바로 자유 민주주의 체제 그 자체를 위협하고 있음은 이미 대규모 간첩망 적발에서 잘 드러나고 있지 않는가.
결론적으로 국정원은 전쟁을 제외하고는 안보의 최선, 그리고 최후의 보루이기 때문에 원장은 비장한 프로 정보맨으로서의 소명직이 돼야 한다. 특히 내년 남북한 정세는 갈수록 노골화돼 가는 북핵 공갈 협박으로 소위 늑대소년 증후군을 일으켜 자칫 정보 오판과 기만에 의한 우발 사태를 발생시킬 가능성이 매우 높다. 따라서 정보의 최종 보고자인 원장은 최종 소비자인 대통령의 올바른 판단을 이끌 무한 책임이 있다. 어쩌면 이번에 임명되는 국정원장은 가장 어려운 시기에 가장 무거운 사명을 감당해야 할 자리가 될지 모른다.
남주홍 전 국정원 1차장·경기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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