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와의 접촉은 ‘금기’인 사회, 익숙한 설정에도 신선한 분위기[이종산의 장르를 읽다]
여자와 여자의 세상
스즈키 이즈미 지음 | 최혜수 옮김
문학과 지성사 | 430쪽 | 1만8000원
스즈키 이즈미의 단편 ‘여자와 여자의 세상’은 직관적인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여자들의 세상을 배경으로 한다. ‘여자들의 세상’에서 사는 고등학생 아사코는 어느 날 창밖을 보고 깜짝 놀란다. 집 앞에 남자아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남자는 거의 사라진, 전설적인 존재다. 남자는 특정 구역에 모여 있는데, 학교에서 견학을 가야만 볼 수 있다. 아사코는 친구 집에서 금지된 비디오로 남자를 본 적도 있다. 남자가 나오는 영화는 이 세계에서 전부 불법 비디오다(이 단편은 아직 비디오로 영화를 보던 1977년에 나왔다).
남자아이를 본 아사코는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 아이는 매일 밤 집 앞을 어슬렁거리고, 아사코는 그 애와 은밀한 소통을 나누며 가까워지게 된다. ‘세계에서 남자(혹은 여자)가 사라진다면’이라는 가정은 이야기의 세계에서 드물지 않다. 장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스즈키 이즈미의 독특한 필체와 분위기는 드물지 않은 이야기를 신선하게 바꾸는 매력이 있다.
스즈키 이즈미의 단편들은 만화 같은 느낌도 있는데, 이 작가가 그리는 남자가 사라진 사회의 모습은 이미지적으로도 흥미롭다. 경찰 같은 직업인들도 모두 여자이고, 교사와 학생들도 물론 모두 여자다. 여학생들은 여성 배우만 나오는 연극을 보러 다니고, 여학생들끼리 연애한다. 가족도 여자로만 이루어진다. 이 세계에는 아빠가 없다. 이 세계에서는 여자끼리 부부를 이루어 살고, 아이를 가지고 싶을 때는 병원에 가서 ‘약물’을 주입받는다.
그런 세계다. 남자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흥미를 갖는 것은 금기에 가깝다. 아사코의 엄마는 남자를 사랑해서 아이(아사코)를 낳은 죄 때문에 감옥에 가 있다. ‘여자와 여자의 세상’이 수록된 작품집에는 표제작 외에 여섯 편의 단편 소설이 더 실려 있고, 네 편의 에세이도 들어가 있다. 1949년에 태어난 일본 여성 작가가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중반까지 써내려간 SF 단편들을 읽는 경험 자체가 돌아보면 꽤 희귀한 것 같다. 백인 남성 SF가 주류를 이루던 때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백인 남성 작가의 작품들이 SF의 주요 목록을 대부분 차지하고 있던 시절이 불과 10여년 전이다. 지난 10여년 동안 옥타비아 버틀러나 어슐러 K 르 귄이 국내에서 재조명되고, 국내 여성 작가들의 SF가 급부상하며 SF 판매 차트 상위권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이런 시대가 오지 않았다면, 한국에서 지나간 시대의 일본 여성 작가가 쓴 SF가 새삼 출간되어 내가 그것을 서점의 신간 코너에서 발견하고 집어드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스즈키 이즈미의 단편에서 중요한 주제 중 하나는 ‘비행’이다. 그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소녀들은 비행을 꿈꾸고 실행한다. 소녀들의 비행은 사회가 하지 말라는 일을 저지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회에서 존재를 언급하는 것조차 금지된 남자아이에게 관심을 가지고 다가가는 일 같은. 아사코의 ‘연애’는 반사회적인 행동이기에 반항이자 비행이 된다.
스즈키 이즈미의 소녀들은 그들이 사는 세상 자체에 의문을 품는다. ‘계약’의 아키코는 자신이 외계에서 온 존재라고 믿는다. 그는 언젠가는 UFO 같은 것이 나타나서 자신을 고향으로 데려가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아키코의 희망은 비웃음을 당하거나 정신적인 병으로 취급당할 뿐이지만, 그의 소망은 결국 이상한 형태로 이루어진다(혹은 해석에 따라서 이루어진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밤 소풍’은 앞의 두 단편보다 더 괴상하고 이상한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에는 ‘가족’을 흉내내는 존재들이 나온다. 그들은 인간을 흉내내기 위해 가족을 흉내내고, 인간이 하는 일들을 연극적으로 수행한다. 그들은 인간을 흉내내기 위해 신문을 읽고, 시간에 맞춰 잠자리에 들고, 가족들끼리 소풍을 간다. 도시락을 싸서 야외의 어딘가로. 그러나 그들의 소풍은 어설퍼서 뒤죽박죽이 되어버리고, 결국은 소풍 중에 와해되어버린다.
책에 실린 에세이 ‘언제나 티타임’에서 스즈키 이즈미는 이야기한다. “이 세계의 마지막이라도, 나는 사과씨를 뿌릴 것이다” 같은 말을 했던 로맨틱한 사람이 옛날에 있었지만, 지금은 사과씨를 뿌리기에는 어디든 간에 다 콘크리트투성이라고. 환경오염으로 종말이 다가왔다고 말하는 시대에 관한 냉소적인 언급이다. 이 에세이 역시 1970년대 말에 발표된 것이지만, 어제 누군가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렸다고 해도 그러려니 할 것 같다. 오늘은 날씨가 꼭 봄 같았다. 하늘은 푸르고 날은 포근한 데다 바람까지 살랑거려서 소풍이라도 가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춥지 않은 12월 날씨가 무섭게 느껴지기도 했다. 요즈음의 날씨가 기후위기의 위험신호로 느껴지는 것이 나만은 아닐 거다. 오늘 같은 날 읽는 스즈키 이즈미의 소설은 왠지 더 오싹하다.
이종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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