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지금 영성이 필요한 이유
올해의 수확이라면, ‘영성’이라는 단어와 조금 가까워진 것이다. 불교학자 조성택 선생님, 기독교학자 정경일 선생님의 권유와 도움으로 <영성이란 무엇인가>(원제 Spirituality, 필립 셸드레이크 지음, 불광출판사)라는 짧은 책을 번역한 것이 계기이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 출판부에서 나온 교양 시리즈(A Very Short Introduction)의 한 권인데 나 역시 영성에 대해 막연히 “어렵다” “나와는 상관없다”라는 생각을 해왔기에 영성이 무엇인지 알아보자는 마음으로 번역을 맡게 되었다.
종교학자인 저자는 영성에 대해 ‘인간 정신이 최대한의 잠재력을 갖기 위한 전망을 구체화한 생활방식과 수행’이라고 정의하지만, 사실 영성에 대한 서로 다른 스물일곱 가지 정의가 있다는 연구도 있다. 그래서 영성 자체를 정의하기보다 영성이 어떤 작용을 하는지 살펴보는 저자의 선택은 영리하다. 역사상 존재했던 다양한 영성은 세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 경험으로서의 영성은 흔히 생각하는 신비 체험이다. 신과의 대면, 의식 변화, 내면의 치유를 들 수 있다. 둘째, 삶의 방식으로서의 영성은 내적 경험에 그치지 않고 일상을 변화시킨다. 절제, 자발적 가난, 윤리적인 삶을 선택한다. 셋째, 사회에서의 영성은 20세기에 등장한 방식으로 일과 사회생활에서 영성을 추구한다.
예컨대 보건의료의 영성은 환자를 임상 증상이 아닌 유기체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심리적 측면을 돌봄으로써 회복을 돕거나 불치의 고통을 완화한다. 스포츠에서 영성을 찾는 선수들은 훈련과 일상에서 금욕을 실천한다. 산악 등반, 황야 하이킹, 크로스컨트리 스키 등 자연 스포츠는 그 자체로 광대한 연결의 감각인 자기초월성을 준다. 도시계획은 유럽 성당 건축이나 동양의 풍수지리처럼 우주와 자연의 질서를 재현한다. 심지어 과학도 점점 발전할수록 더욱 신비에 개방된다.
세 가지 영성은 엄격히 분리되지 않는다. 종교를 가졌다면 윤리와 선행 같은 일상의 변화가 우선이다. 그러나 행위보다 내면이 더 중요하기에 기도나 명상을 통해 마음의 평화를 추구한다. 이런 상태가 된다면 어떤 일을 하든지 단순한 돈벌이나 명예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 자신과 타인을 조화롭고 평화롭게 하도록 노력할 가능성이 크다.
사실 신비 경험은 성직자조차 하기 어렵다. 평생 인도 빈민을 위해 헌신했던 가톨릭 성녀 마더 테레사는 임종 무렵 하느님의 임재를 경험한 적이 없다고 고백해 화제가 되었다.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도 초월 체험을 하지 못했다.(자신을 향해 제사 지낸다는 ‘향아설위(向我設位)’는 그래서 더 설득력이 있다. 인간 자신이 신성을 지닌 초월적 존재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 역시 사후세계가 아니라 근심과 걱정이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결국 영성의 핵심은 삶의 의미와 만족을 얻는 것인데 현대인은 지나친 세속화, 탈권위, 물질주의 속에서 그 통로를 잃어버렸다. 철학자 한병철은 <리추얼의 종말>(전대호 옮김, 김영사)에서 ‘삶의 정처 없음’을 극복하는 방식으로 리추얼(의례, 축제)의 회복을 말한다. 개인의 독자성, 진정성 같은 나르시시즘에 집중된 ‘루틴’과 ‘챌린지’를 넘어 다시 공동체와 연결되어 기쁨, 슬픔, 감사, 위로의 잔치를 벌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리추얼을 상실한 현대인을 위한 다른 제안도 있다. 루퍼트 셸드레이크는 <과학자인 나는 왜 영성을 말하는가>(이창엽 옮김, 수류책방)에서 영성을 회복하는 현대적 방식으로 명상하기, 감사하기, 식물과 관계 맺기, 자연과 연결되기, 의례와 연결되기, 노래(찬트)하기, 성지 순례하기 등 일곱 가지 활동을 권유한다. ‘식(植)집사’가 늘어난 것도, 산책하거나 노래를 부르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도, 따지고 보면 영성과 관련이 있다. 명상이나 성지 순례는 전통 종교에서 비롯됐지만 이제 무신론자에게도 열린 선택이다.
영성이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이유는 나라 안팎에서 고통, 슬픔, 절망, 죽음이 실제로 많을 뿐만 아니라 시대정신이 됐기 때문이다. 한 해를 돌아보면 수많은 사건·사고와 대립, 분열, 갈등, 전쟁의 장면들이 주로 떠오른다. 가장 낮은 출생률과 가장 높은 자살률은 ‘소멸’이라는 말로 집약된다. 지식인들이 뽑은 올해의 사자성어 ‘견리망의(見利忘義)’는 정의가 사라졌다는 무서운 뜻이다. 내년이라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 같지 않다. 이런 세계에서 살아가려면 개인의 힘이 중요하다. 세심함, 명민함, 평온함 그리고 자비로움. 이런 개인의 특성을 길러 사회를 조금씩 바꾸는 것이 현대의 영성임을 배웠다.
한윤정 전환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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