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함께 상을 차리자
동네 마을활동 성과공유회에서 오랜만에 남성 발언자를 만났다. 인사하러 온 기관장이나 담당공무원이 아니고 정말 마을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중장년 남성분은 사실 만나기 쉽지 않다. 이분도 여기에 문제의식을 느껴 집 밖으로 동년배들을 끌어내기 위한 사업을 진행하고, 이에 대한 소감을 나눠주셨다. ‘집집마다 오도카니 있는 남자들이 한둘이 아니’라며 이들이 왜 고립되는지 또래 입장에서 나름의 분석을 유쾌하게 해주셨는데, 결론은 ‘남자들은 남의 집 밥상에 밥숟가락을 놓을 줄 몰라서’라고 하셨다.
내 집도 아니고 남의 집에 숟가락을 놓아야 한다니, 재밌는 이야기에 저절로 귀가 쫑긋해졌다. 그러면서 몇가지 기억이 되살아났다. 몇년 전까지 평일 늦은 시간에 진행하는 공부모임에 참여했는데, 간단한 식사를 곁들이는 자리였다. 그런데 매번 식사를 차리고 설거지하는 사람은 항상 여성들이었다. 내가 어려서인가 생각해봤지만, 내가 물러난대도 싱크대를 이어받는 쪽은 언니들이었지 남성들은 아니었다. 모두 훌륭한 분들이라 생각했으면서도 유독 상차림만은 늘 두어 발 물러나 있던 점이 생각났다. 의미 있는 만남이었지만 사적인 친분관계로까지 이어지지 못했던 그 바탕에 불평등한 설거지가 한 요인이었음을 기억한다.
우리 아빠만 해도 남의 집에서 좀처럼 숟가락을 같이 놓지 못한다. 가부장이 뼈에 박힌 사람이라거나 할 줄 몰라서가 아닌데도 좀처럼 의자에서 일어나질 못한다. 본인 집에선 아침저녁으로 집을 쓸고 닦고, 손수 미역국을 끓여 상 차리고, 때가 되면 옷장정리를 뚝딱 하시는 양반이 다른 집에 가면 늘 가구처럼 오도카니 계신다. 물 한잔부터 접시 하나까지 다 갖다드리고 치워드려야 한다. 손님 대접해드리고픈 특별한 날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소소한 일상의 만남에서 그렇게 해드리기엔 나의 에너지가 충분하지 않다. 배추 된장국이 맛있게 끓여진 날, 고기반찬을 넉넉히 한 날, 가까이 사는 아빠를 얼른 오시라 하려다가도 의자에 앉아만 계실 아빠에게 수족처럼 굴 자신도 없다 싶으면 결국 주저하다 다음으로 미루게 된다. 하나부터 열까지 받기만 하는 무력해보이는 작아진 아빠를 숨기고 싶은 마음과 식탁 앞에서 손 하나 까딱 안 하는 남성의 모습을 아들들이 자연스럽게 여기지 않았으면 하는 두 가지 마음이 복잡하게 내 안에 있다. 결국 이런 아빠의 모습은 내게 전에 없던 거리감을 만들어냈다.
초고령사회로 가는 대한민국에서 더 이상 돌봄을 무작정 다음 세대에게 기대하는 건 무리일 수밖에 없다. 돌봐줄 아랫사람이 아니고, 충분한 돈이 아니고, 주변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즐거움을 도모하는 네트워크가 더 많이 늘어나야 노년 남성의 고립을 막을 수 있고 삶의 질도 높일 수 있다. 부침개도 비빔밥도 만들어먹어야지, 마을회관이든 어디든 모이면 할 일이 너무 많다는 여성들과 무슨 행사에 가봤자 할 일이 없다는 남성들의 차이는 숟가락을 같이 놓을 줄 아느냐 여부가 갈라놓는자 모른다. 그러니 일상에서 필요한 사람, 환영받는 존재, 생각나는 이웃이 되기 위해 같이 상을 차리자. 없던 센스가 갑자기 생길 리 만무하니 나중이 아니라 지금부터 엉덩이를 떼고 함께하자. 숟가락을 같이 놓는 그 작은 센스가 친구가 되고 마을이 되고 울타리가 되어줄 테니 말이다.
김민지 풀뿌리 여성주의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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