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는 2023년 ‘한나아렌트상’을 받을 수 있을까

선명수 기자 2023. 12. 15.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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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한나아렌트 정치사상상’ 수상자로 선정된 유대계 미국 작가 마샤 게센. 위키피디아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만행을 고발하며 ‘악의 평범성’ 개념을 제시한 독일의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를 기리기 위해 제정된 한나아렌트상 시상식이 취소돼 논란이 일고 있다. 올해 수상자가 최근 발표한 칼럼에서 이스라엘에 의해 봉쇄된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나치 독일의 ‘유대인 게토’에 빗댔다는 것이 취소 이유다. 2차 세계대전 전범국이자 유대인 학살 가해 국가인 독일은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이후 팔레스타인 지지 목소리를 차단하고 이스라엘에 대한 비판 여론 역시 봉쇄해 논란을 빚어왔다. 이번 조치를 두고 학계에선 “한나 아렌트 사상에 대한 모욕”이란 비판이 나왔다.

14일(현지시간) 영국 가디언과 디차이트 등 독일 언론에 따르면 한나아렌트상을 제정한 독일 녹색당 산하 하인리히뵐재단은 당초 15일로 예정됐던 시상식을 취소하기로 전날 결정했다. 올해 ‘한나아렌트 정치사상상’ 수상자로 선정된 유대계 미국 작가 마샤 게센이 지난 9일 미국 잡지 뉴요커에 발표한 칼럼 ‘홀로코스트의 그림자’중 일부 내용을 문제 삼은 것이다.

게센은 이 칼럼에서 최근 독일이 ‘반유대주의 근절’을 이유로 취하고 있는 일련의 정책을 비판하며 독일의 홀로코스트 기억 문화가 점차 왜곡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네타냐후(이스라엘 총리)는 하마스의 테러를 ‘홀로코스트’에 비유했고, 이는 가자지구 주민들에 대한 집단적 처벌을 정당화하는 논거가 됐다”면서 “네타냐후는 하마스의 공격 이후 ‘유대인은 역사적으로 늘 피해자이며, 피해자 지위에 대한 배타적 권리를 갖고 있다’는 식의 전설의 논리를 휘두르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그러나 어떤 국가도 항상 피해자이거나, 항상 가해자일 수 없다”고 지적했다.

게센은 지난 17년간 이스라엘의 봉쇄 정책으로 ‘지붕 없는 감옥’이라 불려온 가자지구를 과거 나치 독일이 유대인을 수용하기 위해 만든 ‘게토’에 빗대며 가자지구 주민들이 겪고 있는 인도주의적 위기 상황을 거론했는데, 재단은 이 부분을 문제 삼았다. 재단은 이 글이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나치의 게토처럼 청산하려는 목표를 갖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독일 언론 보도에 따르면 독일-이스라엘협회 브레멘지부가 예정된 시상식을 취소할 것을 주최 측에 요청했고, 재단은 한나아렌트상의 공동 후원자인 브레멘시 상원과 논의해 취소 결정을 내렸다.

다만 수상 자체가 철회된 것은 아니다. 한나아렌트상 시상식은 매년 브레멘 시청에서 열렸지만, 재단과 브레멘의회의 후원 철회로 시상식은 추후 별도의 장소에서 소규모로 열릴 예정이다.

1994년 설립된 한나아렌트상은 홈페이지를 통해 “아렌트는 전체주의 통치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은 무엇인지, 정치적 자유주의가 어떻게 스스로를 갱신해야 하는지 우리에게 대답해야 할 질문을 남겼다”고 제정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전체주의 연구자인 게센은 2차 세계대전 당시 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가 나치에 의해 살해된 홀로코스트 희생자 유족이다.

한나 아렌트 연구자들은 재단의 이번 결정을 일제히 비판했다. <한나 아렌트 평전> 저자인 사만다 로즈힐은 “이는 아렌트 사상에 대한 모욕”이라며 “하인리히뵐재단은 이 상에서 완전히 손을 떼야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연구자는 가디언에 “오늘날 독일에선 한나 아렌트조차 한나아렌트상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꼬집었다. 한나아렌트협회도 성명을 통해 시상식 취소를 비판했다.

게센은 유대인이었던 아렌트가 이스라엘 건국 당시 팔레스타인인들을 향한 인종주의적 폭력을 멈출 것을 촉구했다가 ‘반유대주의’라는 비판에 시달린 점을 거론했다. 아렌트는 1948년 공개 서한을 통해 건국 과정에서 아랍계 주민들을 학살한 이스라엘 유대인 정당 자유당을 ‘나치당’에 빗대며 비판했다. 이 서한에는 알버트 아인슈타인 등 유대계 지식인들이 서명했다. 게센은 칼럼에서 “홀로코스트가 발생한 지 불과 3년 후 아렌트는 이스라엘 정당을 나치당과 비교했는데, 이는 오늘날로 치면 아렌트가 ‘반유대주의’에 대한 국제적 규정을 명백히 위반한 것”이라고 꼬집었다.

게센은 시상식 취소 후 디차이트에 “문제는 이스라엘에 대한 비판이 모두 ‘반유대주의’로 치부되고 있다는 것”이라며 “이런 경향 자체가 진정한 반유대주의 스캔들이며, 실재하는 반유대주의를 간과하는 행위”라고 지적했다.

독일 정부는 지난 10월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 발발 이후 자국 내 팔레스타인 지지 시위를 단속하는 한편 이스라엘에 대한 비판 여론을 강경하게 차단해 왔다. 가자지구의 대규모 민간인 피해를 지적하며 이스라엘의 공격을 비판한 지식인과 예술인들의 시상식 및 강연회 등의 행사가 줄줄이 취소됐다. 세계 최대 도서전으로 꼽히는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은 지난 10월 팔레스타인 작가 아다니아 쉬블리의 시상식을 취소해 논란을 일으켰다. 최근 독일 작센안할트 주정부는 지역 내 귀화 신청자들이 ‘이스라엘 지지 서약’을 해야 시민권을 준다는 새 규정을 공표하기도 했다.

독일은 2차 세계대전 당시 600만명 이상의 유대인을 학살한 홀로코스트 가해국으로, 이에 대한 역사적 책임이 있다는 의미에서 이스라엘 지지를 강조해 왔다. 2008년 이스라엘 건국 60주년 기념식에서 앙겔라 메르켈 당시 총리는 “독일은 이스라엘의 안보에 역사적인 책임을 진다. 이는 독일의 국가 이성”이라고 선언한 바 있다.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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