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환경미화원이 된 북한 여교사 [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아니, 그쪽은 나이도 어리고 얼굴도 곱상한데 여기서 왜 이런 일을 하세요?”
“네, 사람마다 다 사정이 있습니다.”
그런데 말투가 많이 이상하다. 노인이 재차 물었다.
“고향이 어디세요?”
“저, 북한입니다.”
노인은 머리를 끄덕였다.
“아, 그래서 여기서 이런 일을 하는구먼.”
서울지하철 5~8호선 청소 및 방역 소독업을 담당하는 ‘서울도시철도그린환경’ 소속 환경미화원 전명숙 씨가 2019년 입사 초기 심심치 않게 겪었던 일이다. 서울 지하철 환경미화원은 입사 나이 기준이 50세 이상이다. 그래서 보통 나이가 많은 미화원들이 대부분인데, 전 씨가 입사했을 때 나이는 44세였다.
매일 새벽 취객들이 남긴 토사물과 씨름하는 전 씨는 북한 전문학교에서 피복디자인을 가르치던 교사였다. 밖을 나서면 사람들이 다 쳐다보던 매력이 넘치던 처녀 선생 시절도 있었다. 그런 그가 어찌하여 서울 지하철에서 청소를 하게 됐을까.
● 소리없이 울던 어머니
전 씨는 1975년 양강도 혜산에서 다섯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김책공업대학 1기 졸업생이지만, 출신성분이 나빠 혜산에서도 약 20㎞ 떨어진 산골에서 전기기사로 일했다.
북한에서 출신 성분이 나쁘다는 의미는 해방 전에 잘 살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전 씨의 할아버지는 함북 무산군에서 잘 나가는 의사였다. 그런데 6·25전쟁이 터진 뒤 실종이 됐다. 할머니 말에 따르면 인민군 복장을 한 병사들이 와서 부상자가 있다며 할아버지를 데려갔는데 그 이후 사라졌다는 것이다.
북한에서 실종자은 ‘미해명자’라는 카테고리에 묶여 출신 성분상 하위그룹에 속한다. 아버지가 실종되면 아들은 간부가 될 수가 없다. 거기에 더해 삼촌까지 ‘처단자’로 기록이 됐다. 군함을 만드는 공장인 청진조선소에서 일하던 삼촌은 어느 날 갑자기 보위부에 연행됐고 이후 소식을 알 수 없었다. 성분 문건에 처단자로 기록됐다는 것은 보위부에서 처형됐다는 의미다.
이런 가정 이력 때문에 전 씨의 아버지는 외진 농촌마을의 기계공장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국가적인 발명을 해도 성과는 늘 간부들이 가로챘다.
전 씨는 어려서부터 어머니가 마당 구석에서 홀로 우는 모습을 정말 많이 보고 자랐다. 아버지에게 억울한 일이 있으면 어머니는 그렇게 홀로 서러운 눈물을 닦아냈다.
그렇다고 어머니가 도와줄 수도 없었다. 그의 어머니 역시 친척들이 모두 중국에 있는, 출신성분이 나쁜 계층에 속해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의 오빠는 중국에서 살다가 6·25전쟁 때 중공군에 차출돼 한반도에 나왔다. 같은 마을에서 5명이 입대했는데 치열한 전투가 거듭되면서 4명이 죽고 오빠만 살아남았다. 오빠는 고향으로 가서 마을 사람들을 볼 면목이 없다면서 중국에 돌아가지 않고 북한에 남았다. 중국에서 성장한 어머니는 나중에 오빠를 만나겠다고 북한에 나왔다가 국경이 막혀 돌아가지 못했고 이후 전 씨의 부친을 만나 결혼했다.
● 22살에 여선생이 되다
무시당하는 부모를 보면서 전 씨는 “나는 남보다 훨씬 더 노력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품게 됐다. 그래서 공부도 열심히 했고, 각종 교내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 덕분에 학급반장도 하고, 초급단체 비서도 하는 등 학교에서 알아주는 우등생이 됐다.
중학교를 졸업하던 17세에 전 씨는 꼭 군대에 입대해 노동당원이 돼야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그는 선발되지 못했다. 1년 뒤 다시 군에 지원했는데 또 떨어졌다.
자신이 왜 군인이 될 수 없는지 항의하러 혜산의 군사동원부에 찾아갔는데 우연히 간부들이 하는 말을 듣게 됐다. 일부러 들으라고 그랬는지는 몰라도 문을 열어놓은 채 “명숙이는 토대가 걸려 군에 입대하지 못하는데, 저렇게 자꾸 찾아와 보내달라고 하소연하는 것을 보면 안쓰럽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전 씨는 살면서 처음으로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눈물을 닦으며 집까지 50리 길을 무슨 정신으로 왔는지도 몰랐다. 처음으로 나라에 대한 원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는 마을 인근의 탐사기능공학교에 이름을 걸어놓고, 가족과 함께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산비탈을 개간해 밭을 만들고 곡식을 심었지만, 식구가 많은 탓에 늘 배고프게 살았다.
이런 전 씨의 가족이 안쓰러웠는지 어느 날 혜산에 사는 친척 여인이 찾아와 “명숙이는 우리 집에 데려가 일도 시키고 먹여주겠다”고 제안했다. 선뜻 제안에 응해 혜산으로 가 친척집에서 먹고 자며 사실상 가정부처럼 일했다.
친척 여인은 북한에서 식량을 다루는 배급소 책임자여서 권력이 있었다. 친구 중에 경공업전문학교 교장도 있었는데 하루는 교장에게 “우리 명숙이를 그 학교에 좀 입학하게 해달라”고 말했다. 교장이 힘을 쓴 덕분에 전 씨는 3년제 경공업전문학교 피복과에 입학하게 됐다.
그때는 ‘고난의 행군’ 시기라 학교에 나오지 못하는 학생들이 태반이었다. 하지만 그는 집에서 학교까지 하루 왕복 5시간씩 걸어 다녔다. 지금 생각해도 무슨 정신으로 그렇게 다녔는지 알 수 없었다.
1997년 학교를 졸업한 뒤 농업간부학교의 피복 디자인 교원으로 임명됐다. 당시엔 많은 여인들에겐 옷을 만들어 장마당에서 파는 것이 중요한 생계수단이 됐던 터라 피복과 교원이 되기가 쉽지 않았다. 이것도 친척이 나서서 힘을 쓴 덕분에 50대 1의 경쟁을 뚫고 교원으로 임명됐다. 3년제 전문대 졸업생은 교원이 될 수가 없어 6개월 동안 평양에 있는 김보현대학 교원 양성반을 또 다녀야 했다.
● 실패한 결혼, 그리고 탈북
한창 예쁜 나이인 22살에 교원이 되니 주변에서 모두가 부럽게 바라봤다. 사귀자며 다가오는 남자들도 많았다.
하지만 그는 뜻밖의 선택을 했다. 평범한 군인과 결혼했던 것. 남편은 고향 마을에 주둔했던 정찰중대 분대장이었다. 정찰중대는 10년 동안 격술 훈련을 하는 특수부대였다. 명절이면 군인들은 주둔지 주민들 앞에서 격술 시범을 했다.
“그때는 왜 그렇게 그 남자가 멋있어 보였는지 몰랐어요. 1대9 격술 대련도 하고, 배에 기합을 준 뒤 차가 지나가게도 했고, 벽돌을 주먹으로 부수고. 정찰중대에서도 제일 뛰어난 실력을 가졌던 것 같아요. 제가 군대에 가려다 못 갔던 한이 있어서 더욱 군인을 선호했던 것 같기도 해요.”
따라다니는 남자들이 많았지만 전 씨는 그 군인을 남편으로 선택했다. 그가 제대한 뒤엔 혜산에 남게 했고, 2002년 결혼식을 올렸다.
하지만 자신의 선택이 실수였다는 것을 아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남편은 술만 마시면 폭력성을 드러냈다. 걸핏하면 마을 사람들과 싸웠고, 급기야 아내에게도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래도 교원이라는 직업 탓에 동네가 떠나갈 듯 소란을 피울 수도 없었다. 당시 북한은 제도적으로 이혼을 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참고 사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참으니 남편은 점점 더 폭력적으로 변했다. 그 와중에 2004년 딸이 태어났다.
술주정뱅이 남편 때문에 점점 어려워지던 가정 형편은 급기야 2005년을 기점으로 더 기울었다. 그때부터 중국에서 기성복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자체 제작해 장마당에서 파는 옷이 더 이상 팔리지 않았다. 피복 디자인과의 인기도 급격히 하락했고 지원자도 거의 없었다. 제자들이 없으니 선생도 먹고 살기 어려운 사정에 내몰렸다.
그 즈음부터 주변에서 한두 명씩 사라지고 이들이 중국으로 건너갔다는 말이 돌았다. 전 씨는 압록강 옆을 지날 때마다 중국을 바라보았다. 압록강 바로 건너편에 외사촌 고모가 하는 큰 공장이 있었다. 고모는 장공장을 운영했는데 가끔 북한에 친척을 만나려 왔다. 그러다가 “내가 이렇게 돕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 너희가 교대로 와서 우리 집에서 일해라”고 제안했다. 장공장 제작 비법을 남에게 알려주기도 싫으니 북한 친척이 와서 해주면 자기도 든든하겠다고 말했다. 이후 전 씨의 언니들이 교대로 건너가 일해주고 돈을 벌었다.
전 씨도 가고 싶은 마음이 없진 않았지만, 교원 신분이라 선뜻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학생들이 사라지고 중국으로 갔다는 말이 나오면 저는 선생님이니까 조국을 배반해선 안 된다고 교육했거든요. 그런 제가 어떻게 탈북을 하겠습니까.”
하지만 딸이 크면서 생각은 점점 바뀌었다. 딸을 안고 지나다니는 마을 입구에 작은 시장이 있었는데 그곳을 지날 때마다 어린 딸이 사탕을 사달라고 떼를 썼다. 어떤 날엔 사탕을 쥐고 놓지 않아 그걸 빼앗느라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딸의 고사리 같은 손에서 사탕을 뺐어야 했던 어머니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정말 사탕 한 알 사줄 돈이 없었어요. 그래서 결심했죠. 나도 중국에 가서 돈을 벌어와야겠다.”
마침 그때는 그가 다니던 학교도 학생이 없어 문을 닫기 직전이었다. 선생이 나오지 않으면 알아서 잘됐다고 하는 눈치였고 찾지도 않았다. 2007년 12월 31일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전 씨는 국경경비대에 뇌물을 주고 압록강을 넘었다.
● 집을 팔아 마련한 탈북 비용
전 씨가 국경경비대에 준 뇌물은 집을 팔아 마련한 것이었다. 사실 그의 집은 사람이 살 수 없는 상태였다. 이유가 있었다.
2000년대 초반 북한은 삼수발전소를 건설한다면서 졸지에 전 씨의 고향마을 사람들을 내쫓았다. 인근 3개 동네가 강제로 고향을 떠나야 했는데, 아무런 보상도 없고 심지어 살 집도 주지 않았다. 사람들은 산중턱에 토굴을 만들고 살아야 했다.
선생인 전 씨는 다행히 학교 기숙사에 작은 공간을 마련해 살 수가 있었다. 그렇게 한동안 살았는데 어느 날 북한 당국이 갑자기 수몰 마을 주민들에게 집을 지어준다고 나섰다. 삼수발전소 건설 때문에 쫓겨난 사람들이 토굴에서 사는 것이 미국 인공위성에 포착돼 뉴스가 되기도 했다.
돌격대가 들어와 몇 달 만에 날림식으로 집들을 지었다. 집을 지을 마땅한 부지가 없어 집을 지으면 안 되는 땅에 주택들을 지었다. 습기가 많은 그곳은 겨울에는 땅이 얼었다 봄에는 땅이 녹으면서 움푹 들어가는 곳이었다.
전 씨도 집을 받았는데, 다음해 봄부터 벽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보면 멋지게 새로 지은 마을처럼 보이지만, 사실 마을은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언제 무너질지 몰라 가슴을 조이고 있던 참인데 마침 인근 국경경비대 장교가 제안을 해왔다. 북한돈 80만 원에 집을 사겠다는 것. 사실 혜산에서 그 정도 면적의 집이면 가격이 10배는 됐지만, 붕괴 위험 때문에 헐값을 부른 것이다. 그 장교는 집을 사서 창고로 쓰겠다고 말했다. 탈북해야 할 처지에서 그렇게라도 집을 판 것이 다행스러웠다. 눈을 감아줄 경비대원의 손에 그가 집을 팔아 마련한 돈이 고스란히 넘어갔다.
● “우린 왜 이리 못살까”
강을 건너 고모네 공장에 당도하니 고모가 반가워했다. 친척이라고 돈을 더 주는 것은 아니었다. 중국 직원들의 월급은 1200~1800위안이었지만 전 씨에겐 월 600위안만 주었다. 먹여주고 숨겨주는 비용을 차감한 것이었다.
그것도 북한의 기준에선 엄청 큰 돈이었다. 중국에서 잘 먹어도 딸 생각에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그는 열심히 돈을 모아 북한으로 보냈다.
숨어 사는 처지라 외출도 거의 하지 못했다. 아주 가끔 밤에 몰래 거리에 나갈 때도 있었다. 혜산에서 중국을 건너다 볼 때는 그냥 잘 살 것이란 막연한 생각만 들었었는데, 거리에 직접 나가 쇼핑도 하면 “왜 우리나라는 이렇게 못살지”하는 생각이 매번 들어 서러웠다.
그렇게 1년 반쯤 살았는데 북한에서 연락이 왔다. 황해도에 살던 시아버지가 사망했다. 그래도 며느리로서의 도리는 해야겠다는 생각에 그는 2009년 가을 다시 강을 넘어 북한으로 돌아왔다.
남편과 어린 딸과 함께 황해도로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기차가 며칠에 한 번씩 다녔다. 도를 지날 때마다 열차 안전원들이 바뀌었다. 그때마다 안전원들은 매번 전 씨에게 눈을 부라리며 신분증을 요구했다. 너무 억울해 열차원에게 왜 그런지 아냐고 물어보자 열차원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중국 여자처럼 생겼잖아요.”
중국에 사는 동안 전 씨는 저도 모르게 ‘때깔’이 달라져 있었던 것이다. 장례를 치르고 돌아오다가 평양 인근 평성에서 또 발이 묶였다. 열차를 갈아타야 하는데 표를 구할 수가 없었다. 이번 열차를 타지 못하면 또 언제 기차가 올지 알 수 없었다. 급박하게 여기저기 알아보고 있는데 어떤 여인이 곁에 다가와 속삭였다.
“아지미(아줌마를 뜻하는 북한말) 중국에서 왔지요? 중국 가는 선을 좀 알려주면 제가 차표를 구해드릴게요.”
급한 상황이라 생각할 것도 없었다. 전 씨는 그녀에게 혜산에 오면 중국으로 넘어가는 선을 알려주겠다고 약속하고 주소도 적어주었다. 여인은 약속대로 열차표를 구해왔다.
며칠이 지난 뒤 여인이 혜산에 왔다. 전 씨의 집에 찾아와 실제로 중국에 넘겨 보낼 수 있는지 파악한 뒤 “다시 나가서 넘겨 보낼 사람을 데리고 오겠다”고 하고 돌아갔다. 그리고 몇 달 동안 소식이 없었다.
● 졸지에 인신매매범이 되다
그동안 전 씨는 많은 일을 겪었다. 북한 체제가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길을 갈 때마다 서른 살이 넘은 아줌마가 생머리를 하고 바지를 입고 다닌다고 규찰대가 얼마나 못살게 구는지 정말 다시 나온 것을 죽도록 후회했어요.”
그가 북에 있을 때 마침 화폐개혁이 단행됐다. 2009년 11월 30일 북한 당국은 화폐개혁 조치를 공포하면서 “앞으로 외국돈을 쓰다 잡히는 경우 총살에 처할 수도 있다”고 엄포를 놓았다.
전 씨는 북한에 나와서도 몰래 갖고 온 중국 전화로 고모와 통화를 했다. 그런데 하루는 집에 보위부원이 두 명 찾아왔다. 전파탐지기에 걸린 것이다. 그는 휴대전화를 이불에 둘둘 말아 숨겼다.
보위원 한 명은 양강도 보위부 소속이었지만, 다른 한 명은 평양에서 파견 나온 보위원이었다. 서로를 감시하게 지방과 중앙이 합동조를 짠 것이다.
보위원들은 집에 들어와 다짜고짜 휴대전화를 찾는다고 뒤졌다. 그런데 휴대전화를 찾지 못한 대신 전 씨가 벌어서 갖고 온 중국돈 6000위안과 수백 달러의 달러가 발각됐다. 양강도 보위원이 먼저 중국돈을 찾아냈는데, 온갖 상욕을 퍼부으며 돈을 빼앗더니 내일 보위부에 와서 경위를 해명하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 사이에도 계속 집을 뒤지던 평양 보위원이 이번엔 달러를 찾아냈다. 전 씨는 양강도 보위원이 보지 못하게 평양 보위원의 손을 꽉 잡고 애처로운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그는 달러를 슬며시 놓고 아무 일도 없던 듯이 나갔다.
평양 보위원이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전 씨는 아직도 알지는 못한다.
동정일 수도 있지만, 나중에 조용히 찾아와 다른 요구를 할 수도 있었다. 눈을 감아준 대가로 뇌물을 요구하거나 심지어 성 상납까지 요구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때였다.
보위부에 돈을 빼앗기고 졸지에 조사까지 받게 된 전 씨는 달러를 갖고 집을 나가 숨었다.
그런데 화는 한꺼번에 닥쳐왔다. 전 씨 대신 중국 고모의 집에 가서 일하던 언니가 체포돼 신의주 세관으로 북송된다는 소식이 또 날아왔다.
전 씨는 신의주로 언니를 구하러 떠났다. 쉽지 않았지만 갖고 간 달러를 다 뇌물로 쓴 덕분에 언니를 꺼낼 수 있었다. 언니를 구하고 한숨 돌리려던 찰나 혜산에서 연락이 왔다. 이번엔 평성 보위부에서 그를 잡으려 왔다는 것.
알고 보니 몇 달 전 도와주었던 여인이 탈북할 여인을 데려오다가 잡혔다고 한다. 탈북할 여인은 이미 북송 경험이 있어 현지 평성 보위부에서 집중 감시를 하고 있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기차에 탔다가 체포된 것이다.
보위부에 끌려가 고문을 받은 끝에 이들은 모든 것을 실토했다. 평성 보위부는 즉시 탈북 방조자로 지목된 전 씨를 잡으려고 사람들을 파견했다.
졸지에 전 씨는 양강도와 평성 보위부에서 쫓기는 몸이 됐다. 불과 몇 년 전까지 동네에서 선망 받던 여선생은 총살형에 처할 수 있다는 불법 외화 보유 죄와 사람을 중국에 팔아넘기려 했다는 인신매매죄가 동시에 해당되는 수배자가 됐다. 집에 갈 수 없었다. 그는 다시 중국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 “하늘이 무너졌다”
다시 탈북했던 날은 2010년 2월 28일이었다. 강을 넘을 때 전 씨는 돈을 좀 벌어 살 곳을 마련한 뒤 딸을 데려오려고 생각했다.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려 한밤중에 몰래 집에 갔을 때 6살 딸은 뭔가 예감한 듯 엄마에게 매달려 떨어지지 않았다.
“엄마, 다시는 사탕 사달라고 하지 않을게요. 가지 마세요.”
그렇게 우는 딸을 겨우 떼어내고 나왔다. 수배범의 처지라 먼저 중국에 가서 안식처를 마련하는 것이 더 급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가 강을 넘고 3일이 지난 3월 3일 집에서 전화가 왔다. 딸이 사라졌다는 것. 200m 정도 떨어진 사촌 집에서 놀다가 6시경 다시 할머니집에 간다고 나섰는데 어느 집에도 오지 않았다. 번화가도 아닌데다 두 집이 직선거리로 보이는 곳이어서 어른들은 방심했다. 아무리 살기가 어려워도 혜산에서 유아 납치가 일어난 일도 없었다.
딸의 실종 소식에 전 씨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당장 북한으로 다시 나가고 싶지만, 자신이 나가봐야 결과는 뻔했다. 중범죄자로 수배가 떨어진 그는 북에 나가는 순간 체포돼 감옥에 가야 할 몸이기 때문이다.
그는 중국에서 북한의 가족들을 닦달질했고, 번 돈을 모두 보내 딸을 찾게 했다. 그렇게 전국의 고아원들을 다 돌아봤지만 끝내 딸은 찾지 못했다.
딸이 사라진 뒤로 전 씨는 밥도 먹지 못하고 앓아누웠다. 더는 살 생각이 없었다. 9개월쯤 지나니 60㎏이 넘던 몸이 42㎏가 돼 뼈만 남았다. 하루 종일 눈물만 흘리는 전 씨를 보다 못한 고모네 식구가 “이대로 더 있다간 네가 죽겠다”며 그를 강제로 베이징에 피신시켰다. 그곳에 갔다고 해도 마음이 안정된 것은 아니지만, 건너편 혜산이 보이지 않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전 씨는 이듬해가 돼서야 정신을 차렸다. 문뜩 내가 죽으면 더는 딸을 찾을 사람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각오가 든 것이다.
베이징에서 몇 년 정착하고 사는데, 어느 날 불쑥 아는 언니가 찾아왔다. 중국에서 살다가 한국에 간 탈북민었다. 그는 전 씨에게 말도 통하지 않는 이곳에 있지 말고 한국에 가서 살자고 제안했다. 그렇지 않아도 주변에 점점 신분이 노출돼 불안했던 터라 선뜻 응했다.
언니의 도움으로 전 씨는 2015년 4월 한국행 길에 올랐고, 동남아를 경유해 5월 말 한국에 입국했다. 조사와 하나원 생활을 마치고 2015년 11월 서울 양천구에 임대아파트를 받아 정착했다.
● 환경미화원이 되다
다른 탈북민들처럼 그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원을 다녔고 자격증도 땄다. 첫 직장은 장애인들과 함께 운영하는 가게였다. 탈북민과 장애인이 조를 짜서 물건을 파는 일이었는데 월급이 너무 적었다.
2018년엔 가구를 파는 회사로 옮겨갔다. 월급이 140만 원에서 190만 원으로 늘었다. 그런데 이번엔 양천에서 경기도 용인까지 매일 출근해야 했다. 다른 일자리를 열심히 찾아보던 찰나 남북하나재단 취업담당자가 연락을 해왔다.
“서울도시철도그린환경이란 곳에 탈북민 모집 공고가 떴는데 한번 지원해봐. 공기업이고 공무직이라고 하니 좋을 것 같아요.”
그곳에 지원하려는데 담당자가 다시 전화가 왔다.
“알아보니 지하철 청소하는 일이래요. 북한에서 교사를 했던 영숙 씨가 하기엔 적합지 않아 보이네요.”
그런데 당시 전 씨는 용인까지 출퇴근할 힘이 더 남아있지 않은 상태였다.
“아닙니다. 북에서 교사였던 걸 누가 알아주나요. 제가 지원할게요.”
2019년 설날 입사 첫 출근을 하기 전까진 잠깐 기대감도 있었다.
경쟁률이 무려 10대 1이나 됐고, 체력시험까지 치는 것을 보니 좋은 직장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첫 월급도 220만 원이었고, 65세 정년이 보장된다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정작 다녀보니 후회도 많이 들었다. 객차를 청소를 하는 일인 줄 알았는데 역사를 청소하는 일이었다. 새벽에 출근하면 역사 구석구석에 토사물과 대소변이 남아있었다. 매일 오물과의 전쟁을 치르면서 “내가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회의감도 많이 들었다. 동료 언니들도 거들었다.
“아니, 명숙 씨는 나이도 젊은데, 여기서 왜 이런 일을 해? 그 얼굴에 참치 집에 가서 팁만 받고 살아도 30~40만 원은 벌겠네….”
입사 당시 전 씨는 44세로 회사에서 가장 어렸다. 서울도시철도그린환경은 입사 연령 기준이 50세 이상이었다. 50세 미만 입사는 탈북민이나 장애인 등 사회취약계층에게만 예외적으로 허용됐다. 회사 소속 환경미화원 1700여 명 중 60세 이상만 63%나 됐다. 그러니 어린 나이에 청소일을 하는 전 씨를 다들 안쓰러워할 법도 했다.
청소를 마친 뒤 쓰레기를 배출하려 산더미 같은 쓰레기 봉투를 옮기고 있으면 지하철을 타던 사람들이 다들 불쌍하게 바라보는 듯했다.
결단이 필요했던 때 오기도 생겨났다. 6개월쯤 지났을 때 전 씨는 사장을 찾아갔다.
“사장님. 북한이탈주민도 팀장이 될 수 있나요?”
25명~30명 정도의 직원을 관리하는 팀장이 되면 현장 청소는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장이 대답했다.
“자격증도 따고 능력도 인정받으면 될 수 있지요. 그런데 명숙 씨는 어려서 5년은 지나야 해요.”
규정에는 현장 경험이 2년 이상 되면 팀장으로 지원할 수는 있지만, 전 씨의 경우 나이가 많은 팀원을 관리하기 어렵지 않겠냐는 의미였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그의 목표는 팀장이 되는 것이었다.
● “단 하나의 꿈만 갖고 삽니다”
2년이 지났을 때 전 씨는 팀장 지원서를 냈다. 그러나 결과는 탈락이었다. 면접관들은 가장 높은 점수를 주었지만 임원들이 반대했다는 것이다.
임원들의 논리는 “너무 어려서 팀장을 달면 다른 사람이 팀장을 할 기회를 여러 번 뺏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원이 전혀 의미가 없지는 않았다. 점수가 좋았던 터라 그는 첫 지원 이후 부팀장으로 임명됐다.
2022년 전 씨는 다시 팀장에 지원했고 우수한 성적으로 면접을 마쳤다. 이때엔 운도 따랐다. 사장이 새로 오면서 나이와 상관없이 일을 잘 할 수 있는 사람을 팀장으로 임명하자는 것으로 방침이 바뀌었다. 전 씨는 입사 3년 만에 마침내 팀장이 됐다. 회사가 창립된 이래 최연소 팀장이기도 했다.
2023년엔 내친 김에 총괄팀장 자리에 지원했는데, 역시 최우수 성적을 받아 임명이 됐다. 현장 최고직급인 총괄팀장은 4개 팀을 관리하는데, 현재 122명의 환경미화원이 소속됐다.
총괄팀장이 되니 작지만 자기 사무실도 생기고, 월급도 올랐다. 그러나 이 역시 쉬운 일은 아니었다.
팀원들이 다 나이가 많다보니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 제일 어려웠다. 현장 순회를 나갔다가 더러운 곳을 보면 먼저 가서 청소해야 다른 사람들을 움직일 수가 있었다.
북에서 온 탈북민이 5년 만에 총괄팀장이 된 것을 시기하는 사람도 있고, 지시를 내려도 따르지 않는 경우도 있다. 50~60대 여인들의 상사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매일매일 체감하고 있지만, 전 씨는 포기할 생각은 없다.
“제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요. 저는 꼭 버틸 겁니다. 스트레스가 많긴 하지만, 대한민국은 살면 살수록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곳입니다.”
전 씨는 2023년 남북하나재단이 주관한 정착사례발표 대회에 지원해 정착 우수사례로 선정해 상도 받았다.
그는 통일을 그 누구보다 간절히 바란다.
“저는 딱 한 가지 꿈만 갖고 살아갑니다. 하루빨리 고향에 돌아가 딸을 찾아야죠. 지금 18살이 됐겠네요. 제 딸 이름은 김순정입니다.”
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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