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엔 ‘잘했던 일’ 떠올려 보자[살며 생각하며]
연말엔 사람관계에 대해 생각
부모님·아내에겐 어떻게 했지
성숙한 어른으로 인내와 이해
이만하면 올해도 나름 잘살아
내년에도 대단한 성취가 아닌
조금씩 발전하고 즐거워하자
연말의 동창회는 별로 가고 싶은 자리가 아니다. 아니, 가고 싶지 않다. 물론 반가운 얼굴들이다. 정말 그리웠던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모임을 마치고 나오며 훅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을 맞을 때마다, 내년에는 절대 안 오리라 다짐하게 된다.
우선은, 잘나가는 친구들 때문이다. 그들이 들려주는 올 한 해의 성공담들은 나를 아주 작게 만든다. 그들을 질투하는 건 아니다. 그냥 남들은 저렇게 열심히 잘사는데 나는 뭘 했나 하는 자괴감 때문이다. 내가 모자라고 한심하고 나태하다는 걸 확인하게 되기 때문이다. 내가 적을 만드는 사람은 아니니 그들이 일부러 내게 고통을 주려고 그러는 건 아닐 것이다. 그들도 한 해 동안 나름의 시련과 두려움과 울분이 있었을 것이다. 다만, 그들은 그들의 삶에서 긍정적인 면을 더 잘 볼 수 있는 눈과 지혜를 가지고 있다. 부럽다. 건배하고 축하해주지만, 내 마음은 날카로운 비수에 찔린 것 같다. 그래도 혹시 뭔가 건질 수 있는 정보라도 있을까 봐 곁을 얼쩡거린다.
다음은, 특기가 나와 비슷하게 자기 비하와 부정적인 사고를 하는 친구들 때문이다. 내가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들의 푸념과 하소연은 내 차지다. 이런 일방적 대화는 치료가 아니라 고성방가와 비슷한 카타르시스일 뿐이다. 그냥 들어줄 누군가의 귀가 필요한데 마침 그걸 전공하는 내가 있는 것이다. 그래도 진지하게 들어주지 않으면 그 친구의 분노가 내게 투사돼 곤란해질 수 있으니까. 하소연을 끝낸 한 친구가 대뜸 “솔루션을 내줘야지!” 한다. “뭐? 이게 무슨 TV 프로그램이냐?” 다행히 다른 친구가 이야기를 끊어준다. “얘 돌팔이잖아?” “하하하!!” 이 세상은 내가 원하는 데로 흘러가지 않는다. 네가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는 나중에 조용한 곳에서 하자. 네가 원한다면….
몇 달 전, 나이 들어 공부를 하는데 집중이 전혀 안 된다며 집중력 높여 공부 잘하게 해주는 약을 처방해 달라는 사람이 왔어. 허름하고 불안해 보이더라고. 불안 때문에 그런 것 같다고 해도, 막무가내로 약을 처방해 달라는 거야. 집중력을 향상시켜 주는 약은 불안을 악화시킬 수 있다고 해도 애원을 하고, 검사를 해서 확인을 해야 처방할 수 있다고 해도 급하다면서 곧 울 것 같더라고. 형편이 너무 딱해 보여서 내성이 생기지 않고 중독되지 않는 약을 약하게 6일치 처방해 주고 다시 보자고 했지. 검사하려면 돈이 들고 한 달을 기다려야 하니까.
그런데 그게 몰래카메라였던 거야. 공부 잘하는 약 주세요라는 요구에 냉큼 처방해 주는 내가 TV에 나오더군. 편집 무섭데. 앵커가 향정신성 약물을 마구 처방하는 비윤리적인 의사들이 있다며 개탄하더군. 난 도와주려다 졸지에 돈독 오른 약장사가 됐지. 그 사람 연기 참 잘했어. 억울했지만 좋은 교훈을 얻었어. “무슨 교훈? 무조건 검사 팍팍 해서 돈 더 벌겠다고? 잘나가는 자식이 징징거리긴!” “하하하!!”
연말이 되어 한 해를 돌아보면 잘못하고 하지 못한 일들에 대한 자책과 후회뿐이다. 특히 열등감 때문에 이를 극복하려고 자신에 대한 기대치를 너무 높이 올려 잡은 사람들은 더 그렇다. 조급해지고 화가 나다가 우울해진다. 만회하겠다고 실현 불가능한 내년 계획을 세운다. 지난해에도 그랬듯이. 내 이야기다. 하지만 나도 이젠 겁먹은 어린아이는 아니다. 아이 같은 감정을 어른의 이성과 경험치로 달래는 데 조금 익숙해졌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자이가르닉 효과’(미완성 효과)에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 성공한 일보다는 미완성이거나 실수가 있었던 일을 더 잘 기억하는 현상을 말한다. 그게 심해지면 증상이 된다. 사람들은 끝낸 일보다 끝내지 못한 일을 두 배나 높게 떠올린다. 연말에는 이 현상과 싸워야 한다.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해. 그러려면 내가 잘했던 것들, 좋았던 것들을 일부러라도 기억해내야 한다.
가장 중요한 사람들과의 관계부터 떠올려 보자. 부모님께 잘했던 일이 뭐가 있지? 부모님 친구분들을 모셔서 식사 대접을 했잖아? 아내에게는? 화내지 않게 눈치를 잘 봤잖아? 아이들에겐? 이건 자신 있지! 따뜻했고, 일관적이었고, 아이들이 보내주는 신호에 민감했지. 너무 사랑하니까.
성숙한 어른 역할은? 이타심·인내·승화·유머, 이 네 가지 조건에 충실했나? 이타심 때문에 TV에도 나왔잖아? 인내는 내 직업이고, 사회적으로 용인 안 되는 욕망을 바람직한 행동으로 바꾸는 승화는 노래를 만들고 봉사하며 어느 정도 했지! 유머? 난 평생 그런 것 모르고 살아왔잖아?
직업적 성취는? 환갑이 돼서도 열심히 최선을 다하려 노력하고 있지. 최선의 끝은 없지만. 남들이 뭐래도 내가 좀 양보하며 윤리적이고 성숙한 의사가 되려고 하는데, 이제는 자기방어도 잘해야겠어.
그다음은 삶의 여유와 즐거움. 올해 뭐가 가장 즐거웠지? 가족 여행이 참 좋았지. 내년엔 또 어딜 갈까? 뭘 더 잘하게 됐지? 인간의 감정에 대한 최신 지견을 공부했지. 또, 열심히 연습하진 않았지만 골프 실력도 늘었잖아? 무엇이, 누가 가장 고마웠지? 연로하신 부모님의 사랑과 건강이지.
이렇게 생각해 보니 올해는 좋은 해였네? 난 잘 살아남았고, 건강하게 한 살 더 먹었고, 좀 더 성숙해졌네! 물론 자책과 후회는 있지만, 이렇게 생각을 정리하니 삶에 균형이 좀 잡히네? 그래, 내년에도 대단한 성취나 발전이 아닌 아주 조금씩 발전하고 성숙하고 즐겁게 지내자. 매년 아주 조금씩 발전하려 노력하는 ‘초미시적 진보주의자’가 되자. 그리고 나도 이제 연장자에 속하니 동창회에도 꼭 참석하자.
Copyright © 문화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고속도로 운전 중 핸드폰 보다 4명 사망…버스기사 구속
- 양파·마늘 강아지한테 ‘독약’인데…송영길, 반려견에 남은 자장면 줬나
- 20대 女교도관, 수감자와 성관계에 ‘폰섹스’까지… 영국 사회 발칵
- 배우 주해미 사망설 사실… “원인 알 수 없는 병”
- 이준석 “김기현에 감사 인사 남긴 사람 없어…싸가지 없다”
- 백지영, 北서 일화 공개…“호텔서 도청 되는 것 같아”
- 그 시절 ‘온천 성지’의 퇴장… 해가기 전 추억 찾으러 오세요[박경일기자의 여행]
- 빅뱅 출신 승리, 태국서 호화 생일파티… 출소 후 근황
- 이준석, 이례적 尹 칭찬? “공산주의자 활동 이력 이위종 특사 누락 안 한 건 잘한 일”
- 구단엔 ‘악마’ 선수엔 ‘은인’… 역대 韓 빅리거에 5500억원 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