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김건희’가 아니다 [김민아의 훅hook]
조선·중앙·동아일보 등 보수언론 논객들이 연일 ‘김건희’를 외치고 있다. 경쟁적이다. 수위도 높다. ‘사가(私家)’로 가서 근신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조선시대 왕후나 세자빈이 폐서인되면 궁에서 내쫓겨 가던 곳이 사가다. 금기어였던 V1(VIP1·대통령)·V2(VIP2·퍼스트레이디)도 거론한다. 대통령실 참모들을 겨냥해 ‘왜 직언하지 않느냐’며 비판하는 글도 줄을 잇는다.
일단은 놀라운 변화다. 김건희 여사의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관여 의혹 등이 제기될 때 굳게 입 닫거나, 미소지니(Misogyny·여성혐오)라며 감싸던 보수언론이 갑자기 왜 이러는 걸까. 짐작할 만하다. 총선 때문이다. ‘여사님, 하고 싶은 거 다 하세요’ 식으로 놔뒀다가는 국민의힘이 질 거 같아서다.
모두가 핵심을 피해가고 있다. 핵심은 김 여사도, 참모들도 아니다. 배우자를 ‘방치’하고, 직언하는 이에게 ‘격노’하는 윤석열 대통령이다. 이른바 ‘명품 백’ 수수 논란이 터진 날이 11월 27일이다. 이틀 후(11월 29일) 새벽엔 부산 엑스포 유치에 실패했다. ‘졌잘싸’도 아닌, 망신에 가까운 참패였다. 윤 대통령은 이례적으로 즉시 사과했다.
말뿐이었다. 윤 대통령은 엑스포 참패에 고개를 숙인 지 2주도 안 지나 네덜란드 방문(이달 11~15일)에 나섰다. 김 여사도 동행했다. 의전 절차가 까다로운 국빈방문인 만큼 스케줄·동행 변경이 어려웠을 수 있다. 그렇다면 최소한 김 여사의 단독 일정은 만들지 말았어야 했다.
암스테르담 동물보호재단을 찾은 김 여사는 “여야가 함께 개 식용 종식을 위해 발의한 특별법이 조속히 국회에서 통과되기를 바란다”며 ‘교시’를 내렸다. 대통령실은 이번에도 화보를 방불케 하는 사진들을 홈페이지에 올렸다.
김 여사 본인이 자중, 자제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하지만 김 여사에게 그럴 만한 자제력이 부족하다는 건 1년 7개월간 확인된 바다. 제2부속실을 부활하든, 특별감찰관을 임명하든, 서초동 아크로비스타 자택으로 보내 근신케 하든, 고양이 목에 방울 달 수 있는 이는 대통령 뿐이다. ‘사빠죄아’(드라마 대사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에서 유래된 유행어)라지만, 대통령의 공사 구분 없는 사랑은 죄가 될 수도 있다.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가 지난 13일 사퇴했다. 경향신문 보도를 보면, 윤 대통령은 김 대표의 ‘대표직 유지·총선 불출마 선언’을 원했으나 김 대표는 대표직을 던지되 불출마 선언은 않겠다는 입장을 전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윤 대통령이 ‘격노’한 상태에서 네덜란드 출국길에 올랐다는 보도(한겨레)도 나왔다. 대통령실은 공식 입장을 내지 않았다. 한오섭 정무수석은 “그러시기야(격노하시기야) 했겠나”라고만 했다.
주목되는 대목은 끝없이 이어지는 ‘격노’ 시리즈다. 북한 무인기 격추 실패에도 격노, 채모 해병대 상병 순직 이후에도 격노, 국가정보원 내부 인사 갈등에도 격노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최고지도자, 더욱이 ‘잘 드는 칼’ 검찰을 손에 틀어쥔 최고지도자의 격노는 위험하다. 주변 공직자들을 겁먹게 하고, 복지부동으로 몰아간다.
더 우려스러운 건 ‘선택적’ 격노라는 점이다. 윤 대통령은 카카오톡 먹통 사태 당시 카카오에 격노한 것과 달리, 최근 정부 행정전산망 마비 때는 격노하지 않았다. 외려 대통령실에선 “예상보다 빠른 시간 내 복구가 이뤄지고 있다”며 파장을 축소하려 했다. 윤 대통령은 사태 수습 책임자인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을 데리고 영국에 갔다. 이 장관이 국내를 비운 사이 유사한 사고는 계속됐다.
공직자의 직언은 당연한 임무다. 그러나 ‘목 내놓고’ 하라는 건 과도하다. 일자리가 중요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격노’ 보도가 더 이상 나오지 않을 때, 참모들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대통령에게 보고하게 될 것이다. 그래야만 ‘벌거벗은 임금님’ 사태를 막을 수 있다.
윤 대통령의 직정적 성품에 비춰 격노를 참는 일이 어렵다면, 최소한 ‘공정하게’ 격노해야 한다. 사기업이나 은행을 향해서도 격노하면서, 자신의 고교 후배(이상민 장관)만은 어떤 사고를 쳐도 감싸안는다면 불공정하고 부조리하다.
보수언론은 과녁을 잘못 잡았다. 양궁 경기에선 일부러 오조준(誤照準)하는 경우도 있다지만, 저널리즘은 스포츠가 아니다. 김 여사나 참모들을 아무리 탓해봐야 백약이 무효다. 문제는 대통령이고, 해법도 대통령이 쥐고 있다.
윤석열 정권의 미래가 걱정되면 이렇게 ‘직언’해야 한다. “대통령님, 여사님이 실질적 V1이라고 생각하는 국민들이 많습니다. 부끄럽지 않으세요?”
김민아 칼럼니스트 ma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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