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Z도 홀린 공연 묘수…연말 가왕은 더 빛났다
광주 시작으로 서울·대구·부산 마무리
대형 LED 화려한 영상·레이저쇼 압권
관객 2만명 찾은 케이스포돔 공연 성료
팬덤 입소문 타고 2030팬도 크게 늘어
단 한 마디의 노랫말도 허투루 넘기지 않는다. 싱잉 랩을 방불케 하는 대서사시 안에서 소외된 낱말은 하나도 없었다. 지독한 감기로 세트리스트에서 제외됐던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기습적으로 이어지자, 관객의 함성은 그 어느 때보다 데시벨이 높아졌다. 흉포한 기타 연주는 ‘21세기가 간절히 원한’ 가왕의 건재를 증명하는 소리였다. 가왕은 역시 가왕(歌王)이었다.
‘연말 이벤트’가 돌아왔다. 가왕 조용필(73)은 2일 광주를 시작으로 서울(9~10일), 대구(16일), 부산(23일)으로 이어지는 ‘2023 조용필& 위대한탄생 투어 콘서트’를 진행 중이다. 이 공연은 가왕의 연말 전국 투어이자 55주년 기념 콘서트의 마침표이기도 하다.
특히 9~10일 이틀간 케이스포돔에서 열린 공연에선 2만 관객과 함께 했다. 조용필은 해마다 12월, 케이스포돔에 인증 도장을 찍는 대한민국 ‘유일’의 가수다. 회당 1만명을 채워야 하는 케이스포돔 공연은 단 1회 공연만으로도 수익을 낼 수 있어 K-팝 가수의 성공 지표로 꼽힌다. 이 공연장이 ‘K-팝 성지’로 불리는 이유다.
가왕의 공연은 매번 획기적이다. 4개 도시에서 이어지는 조용필&위대한탄생의 투어 공연에선 나타난 네 가지 중요한 특징을 짚어봤다.
“감기 맞아요?” 가왕의 노래 차력쇼
가왕의 공연은 두 시간의 ‘노래 차력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5일 소속사 YPC에 따르면 조용필은 전국 투어의 시작을 알린 광주 공연 이후 지독한 감기가 찾아왔다. 여파는 서울 공연까지 이어졌다. 그러니 이틀 간의 서울 공연은 조용필에겐 쉽지 않은 무대였다. 그는 당시 공연에서 “(목 상태가 좋지 않아) 주치의가 절대로 공연하면 안 된다고 했다”면서도 투혼에 가까운 열창을 이어갔다.
이번 투어는 오프닝부터 예상을 깼다. 공연 중반 흥을 돋울 때 등장했던 ‘장미꽃 불을 켜요’(1991년 13집)를 오프닝 곡으로 선곡하며 루틴을 부숴버렸다. 이어 ‘해바라기’, ‘못찾겠다 꾀꼬리’로 쉼 없이 내달렸고, ‘바람의 노래’, ‘자존심’을 비롯해 올해 발매한 신곡 ‘세렝게티처럼’을 들려줬다.
이전 공연에서 단 한 번도 들은 적 없었던 곡들도 등장했다. 1982년 4집 수록곡 ‘난 아니야’, 7집 수록곡 ‘내가 어렸을 적에’가 짤막하게 이어졌고, 보통의 컨디션에도 쉽지 않은 ‘한오백년-간양록’까지 등장했다. 흰 천이 휘날리는 무대에서 ‘한 많은’을 외치는 가왕의 음성은 비장했고, 곡의 후반부로 향할수록 소리꾼처럼 득음의 순간을 맞았다. 민요부터 팝, 록을 아우르는 장르의 마술사였다.
위대한탄생의 리더 최희선(기타)은 “(조용필) 형님은 히트곡의 숫자로 치자면 전 세계에서도 1등이라 할 수 있는 아티스트이기에 매 공연마다 불러야 하는 곡이 워낙 많다”며 “관객이 듣고 싶어하는 곡들도 많을 수밖에 없어 이 부분을 염두하고 세트리스트를 짜지만, 공연은 공연대로 꼭 들어가야 하는 곡들이 있기에 많은 부분 고심을 하신다”고 귀띔했다.
입체감 있는 기타 소리...곡마다 맞춤 해석
조용필 음악에서 보컬과 함께 중요한 특질을 만드는 위대한탄생은 연주마다 곡의 개성과 분위기를 살렸다. 26개의 곡이 저마다 다른 색깔을 냈고, 하나의 곡 안에서도 기타 소리는 팔색조처럼 변신한다. ‘물망초’에선 이별 앞에 절규하는 비명이었고, ‘태양의 눈’에선 기타 연주만으로 한 편의 서사가 완성됐다. 연주는 포효했지만 질척이지 않았고, 깔끔하게 맺고 끊어 관객을 안달나게 했다. 때때로 기타 소리는 오케스트라 같았고, 두 세 명의 연주자가 함께 연주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모든 음악의 중심을 잡은 최희선은 “위대한탄생은 말이 필요없는 각 파트별 최고의 연주자이기 때문에 밴드 합주에 있어서 각자 해야 할 일과 지켜야 할 일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며 “이번 공연에선 각 파트의 디테일에 많이 신경을 썼다. 기타 연주의 디테일에 있어서도 각각의 곡에 맞게 해석해 입체감 있게 표현하려 했다”고 말했다.
이번 투어의 편곡 방향은 ‘원형의 존중’이다. 최희선은 “1979년 나온 ‘창밖의 여자’ 등 모든 곡을 트렌드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하면서도 원곡에 최대한 충실하고자 했다”며 “다만 현재는 악기의 변화로 과거의 음색을 그대로 내기 어려운 점이 있고, 과거의 음색에만 집중하면 트렌드에서 벗어날 수 있어 여러 가지를 고려해 편곡했다”고 설명했다.
대형 LED의 화려한 영상과 레이저 쇼
조용필과 위대한탄생의 공연은 매번 다르다. 압도적인 영상미와 세련된 무대 연출은 국내외 팝스타를 통틀어도 둘째가라면 서럽다.
이번 투어에선 시작은 ‘미니멀리즘’을 표방했다. 케이스포돔을 가득 메운 일자형 LED 전광판을 앞에 두고 가왕과 위대한 탄생이 등장하며 공연의 시작을 알렸다. 한 줄로 선 이들의 모습은 마치 조용필이 밴드 음악을 지향해왔다는 ‘선언’처럼 보였다.
하지만 곧이어 등장한 화려한 대형 LED 전광판의 향연은 무대에서 눈을 떼기 어려울 정도로 화려했다. 공연기획사 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에 따르면, 이번 전국 투어의 대형 전광판은 가로 60m, 세로 18m에 달한다. 이 전광판은 미닫이 문처럼 열고 닫히며 색다른 무대를 연출했다.
‘킬리만자로의 표범’ 땐 무대를 덮쳐버릴 듯한 거대한 파도가 일렁였고, ‘바운스’에선 사랑스러운 파스텔톤 3D 알파벳이 바운스를 만들었다. ‘태양의 눈’에선 닫혔던 전광판을 거대한 두 손으로 열어 젖히는 장면을 연출하며 그로테스크한 영상으로 오페라 록의 진수를 보여줬다.
공연장을 뒤덮은 레이저쇼도 압권이었다. ‘고추 잠자리’에선 붉은 레이저가 객석을 가로질렀고, ‘세렝게티처럼’에선 초원을 연상케 하는 녹색 레이저가 공연장을 메웠다. 공연은 그것 자체로 거대한 록페스티벌을 방불케 했다.
늘어나는 2030 팬 “공연 퀄리티 입소문”
조용필의 공연은 50대 이상 중장년 세대가 다수를 차지하지만, 최근 1년 사이 공연장엔 2030이 부쩍 늘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팬데믹(감염병의 세계적 대유행) 이후 4년 만에 열린 가왕의 케이스포돔(2022년) 연말 공연과 5월 주경기장 공연이 K-팝 팬덤 사이에서 유명해진 덕이다. 특히 ▷주경기장 공연 당시 평균 3만~5만원 대의 응원봉을 4만 관객에게 무료로 나눠준 점 ▷가격이 날이 갈수록 오르는 다른 K-팝 그룹과 달리 응원봉까지 주는데 VIP석이 15만원대였다는 점 ▷시각적 연출에 민감한 1020팬이 보기에도 무대 연출과 영상의 수준이 K-팝 그룹을 압도한다는 점 등이 화제였다. 현재 20대 관객은 일종의 ‘성지 순례’를 하듯 조용필의 공연을 찾고 있다.
2030 관객의 증가는 예매 현황에서도 입증된다. 국내 최대 티켓 예매 사이트 인터파크에 따르면 16일 대구 엑스코 서관에서 열리는 ‘2023 조용필 & 위대한탄생’ 전국 투어 대구 공연에서 20대 관객 비율이 21.9%, 30대 관객 비율이 26.8%나 된다. 공연을 찾는 관객의 절반 가량이 2030인 셈이다.
10일 서울 공연에서 만난 노은진(27) 씨는 “X(옛 트위터)의 K-팝 팬덤 사이에서 조용필의 공연 연출과 퀄리티가 입소문이 나면서 콘서트를 보고 싶다는 생각했다”며 “엄마가 조용필의 팬이라 예매해서 함께 왔는데, 공연을 보고 나니 K-팝 공연의 원류가 가왕의 공연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공연에서도 관객의 반응은 뜨거웠다. 고단한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중장년 세대의 행복한 미소를 보고 싶다면 조용필의 콘서트로 가면 된다. 떼창 역시 수준급이었다. 가왕의 콘서트는 공연장을 매번 대형 노래방으로 만들지만, 이번 투어를 찾은 관객의 ‘노래 실력’은 특히나 출중했다. 성별과 세대를 아우르는 목소리가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니 1만명(케이스포돔 회당 관객 수)의 음성은 거대한 코러스가 됐다. 조용필은 “아주 좋았다. 여러분 노래 듣고 싶어서 여기 오는 거다”라는 말로 관객의 노래 실력을 칭찬했다. 고승희 기자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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