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성 본질 해부·AI의 미래 통찰… ‘우리·지금·여기’ 를 담고 ‘내일’ 을 묻다[북리뷰팀 선정 올해의 책]
사회와 시대, 인간, 그리고 지구와 우주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 2023년 문화일보가 선정한 ‘올해의 책’은 이렇게 요약된다. 그것은 어떤 형태로, 또 어떤 말로 쓰여도 책이 가고자 하는 궁극의 방향이고, 우리는 그 뒤를 좇고, 때론 앞서가며 어두워지려는 눈과 귀를 열심히 밝힌다. 그 길 위에 어떤 책들이 함께했을까. 올 한 해 북리뷰 지면을 통해 소개된 책 중 북팀 기자들이 엄선한 10권을 소개한다. 인간성의 본질을 파고드는 거장들의 소설과 인공지능(AI)의 미래를 전망하는 철학자의 촌철살인, 과학의 언어로 세상을 설명하는 물리학자의 단단한 지식, 혁신과 파격의 아이콘이 된 젊은 기업가의 평전, 그리고 디지털에 속박돼 삶에 집중하지 못하는 현대인을 꼬집는 심리학 책에 이르기까지 ‘우리’와 ‘지금, 여기’를 오롯이 담았으며, ‘다음’을 위한 제언이 가득하다. 다시 읽고, 묻고 답하고, 생각하며, 준비할 시간이다.
6년 만에 만난 하루키… 그의 향기는 여전했다
■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홍은주 옮김│문학동네
무라카미 하루키가 6년 만에 내놓은 새 장편 소설. 큰 관심 속에 지난 9월 출간되자마자 팬들의 환호와 지지를 받았으며 12월 현재까지 총 20만 부가 판매됐다. 이 작품을 함께 읽고 책에 관해 이야기하는 각종 책모임과 북토크 등이 여기저기서 열렸다. 유독 문학 작품이 많이 팔리지 않은 올해, 문학 팬덤의 건재함을 알린 작품이다.
10대 시절의 첫사랑을 가슴속에 품고 살아가는 한 중년 남성이 어느 날 미지의 도시에 들어서고, 그곳에서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첫사랑을 만나 벌어지는 일을 담았다. 상실을 겪은 주인공이 현실과 가상을 넘나들며 고독한 여행을 하는, 하루키 특유의 서사를 잇는 작품이다. 파스타와 샐러드, 클래식과 재즈 등 하루키 소설들에 꾸준히 등장해온 요소들도 가득하다.
하루키가 등단한 지 1년 후인 1980년 한 문예지에 발표한 동명의 중편을 확장해 쓴 것으로, 아직 ‘신인 작가’이던 30대의 하루키와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된 지금 70대의 하루키의 작품 세계가 공존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편한 만큼 산만한 삶… 디지털 시대의 부작용
■ 도둑맞은 집중력
요한 하리 지음│김하현 옮김│어크로스
디지털 세상에 의존하면서도 벗어나고 싶은 현대인들의 모순을 파고들어 공감과 지지를 얻은 책. 지난 반년간 약 20만부가 팔렸다. 자신과 일, 그리고 가족에까지 집중력을 잃어가는 시대, 책은 인류가 삶 전반에 대한 집중력을 잃고 ‘산만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경고한다.
명상을 하고 집중력을 높여준다는 자기계발서를 읽어봐도 별 효과를 보지 못했던 우리 대다수 보통 사람들에게, 때에 맞춰 도착해 준 고마운 책이었다. 수년간 전 세계를 다니며 신경과학자와 사회과학자 등 250여 명의 전문가를 만나 인터뷰한 저자는 집중력 저하가 개인의 탓이 아니라, 비만 증가와 같은 현대 사회의 질병이라고 진단한다. 책은 길고 무익했던 우리의 자책을 끝내게 하고, 궁극적으로 사회와 개인의 시선이 어디에 꽂혀야 하는지 명확하게 했다. 그것은 집중력을 ‘훔치는’ 도둑들을 인식하고, 감시해야 한다는 것. 물론 애플, 구글과 같은 거대 빅테크 기업들의 각성과 변화가 요원하다는 걸, 집중력 회복의 노력은 결국 개인 차원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다는 걸 알지만 말이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삶·죽음에 근원적 질문
■ 멜랑콜리아 I-II
욘 포세 지음│손화수 옮김│민음사
올해 국내 문학 시장에서 가장 극적인 변화를 겪은 이는 노르웨이 작가 욘 포세다. 그간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그의 작품들은 지난 10월 노벨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베스트셀러 순위 상위권에 올랐다.
노벨문학상 발표 이후 국내에 출간된 ‘멜랑콜리아 I-II’는 욘 포세의 대표작으로, 19세기에 실존했던 노르웨이의 풍경화가 라스 헤르테르비그의 삶을 다룬 장편 소설이다. 사실상 전기이지만, 그가 주목하는 것은 주인공의 행적이 아닌 심리다. 단 이틀간의 이야기를 540쪽 분량으로 풀어낸 이 작품은 인간의 심리와 내면을 깊숙이 탐구하면서 삶과 죽음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진다.
욘 포세 특유의 독백체가 특징적인 작품으로, 이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에겐 다소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노벨문학상을 계기로 국내 독자들의 눈에 또 한 명의 세계적인 작가가 들어왔다는 것은 올해의 큰 수확이다. 낯설지만 멋진 새로운 세계로의 한 걸음은 언제나 설레기 때문이다.
어른아이 같은 머스크… 그 내면을 들여다보기
■ 일론 머스크
월터 아이작슨 지음│안진환 옮김│21세기북스
출간 전부터 전 세계적으로 화제를 모은 평전이다. 앞서 스티브 잡스 전기(傳記) 등으로 명성을 얻은 월터 아이작슨이 동시대 가장 논쟁적인 남자 일론 머스크를 낱낱이 파헤쳤다. 2년간 일론 머스크의 그림자가 돼 연을 끊다시피 한 아버지부터 빌 게이츠, 제프 베이조스 같은 라이벌까지 130여 명과의 밀착 인터뷰를 통해 전기차 개발부터 우주여행까지 불가능을 실현해 나가는 이 별스러운 혁신가의 삶이 어두운 유년시절과 갖은 역경을 뚫어내며 일그러진 그의 자아를 동력 삼아 달려왔다고 말한다.
“때때로 위대한 혁신가들은 배변 훈련을 거부하고 리스크를 자청하는 어른아이일 수 있다.”
저자는 음모론에 빠져 곤욕을 치르는 등 기이한 행위를 일삼는 일론 머스크란 사람의 결함과 불쾌한 사생활까지 가감 없이 드러낸다. 인류를 새 세상으로 인도하는 인물의 내면에 둥지를 튼 만성적인 불안과 번뜩이는 영감에선 동시대 사람들의 모습이 거울처럼 비쳤다.
90년전에도 지금처럼… 백화점은 욕망의 창고
■경성백화점 상품 박물지
최지혜 지음│혜화1117
백화점은 자본주의가 쌓아 올린 바벨탑이자 욕망의 창고다. 휘황한 백화점에 진열된 상품들에선 시대의 맥락을 읽을 수 있고, 이는 시대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100년 전 이제 막 근대성이란 옷을 입은 옛 서울에서 서양 문물과 문화 최전선 역할을 한 경성백화점도 그랬다.
미술사가이자 보기 드문 근대 건축물의 실내 재현 전문가인 저자가 1933년 한 청년 사업가의 눈을 빌려 백화점 진열대의 풍경을 담아낸 책은 우리가 알고 있던 회색빛 역사에 알록달록한 색깔을 칠하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백화점이란 장소에 주목한 게 아닌, 백화점이란 공간을 채운 물건들이 어디서 들어와 어떻게 팔렸는지를 보여줬단 점에서다.
당시 백화점을 가득 채운 물건들은 오늘날 우리가 백화점에서 구경하는 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여름에 접어들 무렵 출간돼 700여 장의 풍부한 이미지와 130여 가지 상품의 이야기를 풀어놓은 책은 우리 내면의 소비문화를 만족시키는 한 편의 여행이자 신선한 쇼핑이었다.
철학으로 본 챗GPT… AI와 어떻게 공생할까
■ AI 빅뱅
김재인 지음│동아시아
챗 GPT가 쏘아 올린 생성 인공지능(AI) 붐과 함께 AI 관련 서적이 쏟아졌던 올해 상반기. ‘AI 빅뱅’은 보다 적극적이고 강력한 인문학의 사회적 개입을 강조하며, 법적 제도와 윤리 체계 마련과 같은 ‘동어 반복’적인 기존 제언들과 차별화했다.
과학기술의 변화를 고찰·분석해온 철학자 김재인은 ‘언어’와 ‘창작’의 관점으로 생성 AI를 샅샅이 해체한다. 그리고 과학 혁명과 서양 근대 형성 시기가 그랬듯 AI가 일으키는 ‘사고의 실험’이 ‘인문학 르네상스’로 이어진다는 결론에 이른다. 특히, 질 들뢰즈 연구로 이름난 그는 챗 GPT로 대표되는 초거대언어모델(LLM)을 들뢰즈의 언어철학을 가져와 비판적으로 검토하는데, 그 과정에서 생성 AI의 원리와 한계를 추적하고 인간의 고유성인 ‘언어’와 ‘예술 창작’의 본질까지 파고든다. 그리고 마주한, ‘AI와 어떻게 공생할까’라는 가장 첨예한 질문 앞에서 책은 과학기술의 도전이 거셀수록, 그것이 주는 충격이 클수록, 인간은 더욱 ‘인간다움’을 발현해야 한다는 역설적 답을 내놓는다.
친근한 물리학자 김상욱… 우주 통해 인간을 보다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인간
김상욱 지음│바다출판사
‘친근하고 친절한’이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붙는 물리학자 김상욱이 5년 만에 출간한 단독 저서. 물질의 기본 단위인 ‘원자’에서 시작해 문화를 만들어내는 ‘인간’에 이르기까지, 세상 모든 것에 대한 설명을 시도한 일종의 ‘빅 히스토리’이다.
책은 물리학자적 시선과 관점에서 시작하지만, 점차 물리학의 경계를 넘어 화학과 생물학으로 나아가고, 종국엔 인문학으로 확장된다. 우주의 생성과 소멸, 인간의 생과 사, 신의 존재 유무 등을 과학의 언어로 ‘새롭게’ 정의하는 책은, 거대한 우주에 찰나로 존재하다가 ‘원자의 재배열(죽음)’을 경험할 우리 모두를 위무한다. 그러니까 책은 철저히 과학적이면서, 지독하게 인간적인데, 이는 지난해부터 눈에 띄기 시작한 ‘따뜻한’ 과학서의 흐름과도 닿아 있다. 평소 활발하게 대중과 ‘소통’하는 학자로도 유명한 저자는 윤동주의 시 제목을 활용해 책 제목을 짓는 등 이번 책을 통해 또 한 번 난해하고 어렵게 여겨지는 과학이 어떻게 ‘대중 교양’이 될 수 있고, 되어야만 하는지를 증명했다.
인간 뺨치는 집단지성… 생존정보 나누는 나무
■ 어머니 나무를 찾아서
수잔 시마드 지음│김다히 옮김│사이언스북스
나무의 소통에 관한 세계적 권위자인 저자가 자신의 과학적 성과와 함께 삶을 돌아보며 쓴 책이다. 새로운 이론의 탄생 과정과 그 탄탄한 근거가 실린 데다가, 연구자의 인간적인 면모와 삶의 여정을 좇을 수 있기에, 올해의 책으로 손색없다.
저자는 나무들이 ‘집단지성’처럼 연결돼 있다는 우드 와이드 웹(WWW) 이론으로 유명하다. 이에 따르면 나무들은 일종의 ‘곰팡이 그물’을 통해 지하에서 정보를 교환한다. 나무와 나무, 나무 개체와 숲 전체를 연결하는 네트워크가 탄소나 질소 같은 영양물질 등을 전달하는 것. 그 과정에서 ‘어머니 나무’의 역할을 발견한 저자는, 새로운 나무를 심는 것보다 오래된 나무를 보존하는 것이 훨씬 더 지구와 인간에 이롭다고 강조한다. 이것은 성장이 빠른 새 묘목을 심는 주류 삼림 정책에 반하는 것이었기에, 저자의 연구 인생은 녹록지 않았다. 책은 평생에 걸친 한 연구자의 끈질긴 실험과 지치지 않는 열정까지 오롯이 보여준다. 그것은 나무의 강하고 영리한 생존 방식만큼이나 경이롭다.
‘값싼 쾌락’의 말로… 펜타닐 위험성 경고
■ 대마약시대
백승만 지음│히포크라테스
한 대륙을 초토화하는 질병을 유행병(epidemic)이라 한다. 이 질병이 다른 대륙으로 넘어가는 순간 팬데믹(pandemic)이 된다. 연예인·유명인사의 마약 복용 사건이 하루가 멀다 하고 매스컴에 오른 올해 한국 사회 최대 화두는 ‘마약 팬데믹’이었다. 서점가도 ‘마약 청정국’은 옛말이 됐다는 내용의 관련 서적이 쏟아졌다. ‘대마약시대’는 신약 개발 최전선에 있는 과학자가 미국을 무너뜨리고 바다를 건너 한국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펜타닐의 구체적인 위험성을 다뤘단 점에서 눈길을 끌었다.
메스암페타민 같은 각성제나 대마에서 유래한 마약류 정도만 제대로 상대해 본 한국 사회의 경험치가 고작 2㎎의 펜타닐 앞에선 통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경고가 와 닿는다. 펜타닐 등 마약에 대한 맹목적 혐오 대신 개개인이 시도할 수 있는 과학적 대처와 사회적 해법을 제시한 점도 유익했다. 고통을 견뎌 얻은 행복과 값싼 쾌락 사이에 서성이는 시대의 생존 교양서인 셈이다.
기지촌 여성이 마주한… 美 사회 속 치열한 삶
■ 전쟁 같은 맛
그레이스 M 조 지음│주해연 옮김│글항아리
올 한 해 동안 국내에 번역 출간된 미국 에세이들의 특징은 ‘디아스포라’와 ‘상실’로 요약된다. 한국계 미국인인 저자가 한국 음식을 매개로 세상을 떠난 엄마를 떠올리는 내용의 에세이 ‘H마트에서 울다’를 잇는 작품이 많았다. 한국계 미국인의 성장과 정체성을 다룬 이야기와 가족, 친구 등 가까운 사람을 잃은 후의 상실감은 따로 또 같이 다뤄지며 하나의 경향으로 자리 잡았다.
뉴욕 시립 스태튼 아일랜드대 사회학·인류학 교수인 그레이스 M 조가 작고한 한국인 어머니를 기리며 쓴 ‘전쟁 같은 맛’은 이러한 경향의 에세이 중 가장 주목받은 책이다.
저자의 어머니는 1941년 한국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고 기지촌에서 일하다 미국으로 이주해 험하고 치열한 삶을 살아낸 여성 ‘군자’다.
그는 어느 날부터 환청을 듣기 시작하더니 조현병을 앓다 세상을 떠난다. 책은 군자의 삶을 회고하며 개인에 스며든 상처와 역사에 새겨진 상처를 함께 들춰낸다.
박동미·박세희·유승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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