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어린 나에게’… “너는 용기있었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들 하지만, 현실에서 이를 느끼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역사적 현장을 기록하고 글을 쓰는 업종에 종사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눈 앞에서 포탄이 떨어지고, 고층 건물이 맥없이 무너지고, 생명의 맥이 끊어지는 것을 보고 있을 때 과연 그 말이 나올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다. 무기와 무력을 제외하고라도 공포와 폭언이 지배하는 곳에서 과연 펜이 제대로 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들곤 했다. 의견이 묵살되고, 손가락질 당하거나, 없는 사람 취급 받을 때 인간으로서 존재 가치가 보장 받을 수 있을까 했다.
언뜻 보면 여자같지만, 수북이 자란 콧수염과 턱수염 때문에 겉모습으론 성별을 특정하기 어려웠던 하남 카우르가 무대에 섰을 때, 정신이 번쩍 뜨이는 듯 했다. 12세에 다낭성 난소증후군 진단을 받고 얼굴에 털이 자라는 다모증으로 정신적·육체적으로 고통을 받았던 하남 카우르가 ‘어린 시절 나 자신’에게 쓴 편지를 읽어내려 갈 때 말이다. ‘친애하는 어린 나에게(Dear little me)’로 시작하는 편지를 낭랑한 목소리로 낭독하는 순간, 카우르의 정체에 대해 수군대던 주위도 어느덧 숨을 죽였다.
지난 11월 영국 로열 앨버트 홀에서 열린 ‘레터스 라이브(Letters live)’ 공연. 카우르가 어린 시절 주위의 편견과 투쟁하던 자신에 대해 ‘진정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보여줄 것(You will show people what beauty truly is)’이란 제목과 내용의 편지를 마지막까지 읽어내려갔다. 때론 담담하게, 때론 강렬한 어조로 현장에 모인 3000여명의 관객을 향해 “너는 용기있었다”라고 말하는 동안, 누군가는 눈물을 훌쩍이고 또다른 누군가는 큰 소리로 그녀에게 박수를 보냈다.
이날의 펜은 그 어떤 힘보다도 강렬한 힘이었다. 펜은 대중이라는 종이를 만나 마치 마법처럼 힘을 얻었다. 종이 위에 아로새겨진 글자는 연사의 입을 통해 되살아났고, 사람들의 눈과 귀, 입을 통해 전해지며 마음을 뜨겁게 했다. 분명 편지였지만, 내적인 고통과 고민으로 완성된 처절한 고백서였으며 그 어떤 연설보다 강력했다. 그녀의 ‘다른’ 외모보다는 강인하면서도 맑고 밝은 눈매가 한 눈에 들어왔다. 분명 수없이 눈물을 흘렸을 그 눈이었지만, 이날만큼은 누구보다도 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이 날의 시작과 끝은 ‘레터스 라이브’의 또 다른 상징이나 마찬가지인 영국 출신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장식했다. 영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극작가이자 소설가 조지 버나드 쇼가 1905년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서 열린 돈 조반니 공연을 관람한 뒤 ‘더 타임즈’에 쓴 항의 편지 ‘The spectacle sickened me(나를 미치게/병들게 한 광경)’로 문을 연 그는 미국을 대표하는 현대미술가 솔 르윗이 그의 뛰어난 후배 에바 헤세를 격려하는 편지 ‘Do(해!)’를 읽으며 또 다른 자아로 변신해 있었다. 화려한 치장을 한 앞 사람 때문에 관람이 방해됐다는 이야기를 전하는 조지 버나드 쇼의 비꼬는 듯한 어조는 그의 현대극을 보는 듯했다.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마치 조지 버나드 쇼가 된 듯 특유의 삐죽대는 입술과 동그래진 눈알을 굴리며 빈정대는 말투를 묘사해냈다. 낭독이었지만 또 다른 연극이었고, 신문사 ‘여론면’에 올리는 항의 서한 같았지만 또다른 문학 작품이었다.
컴버배치가 또 다른 편지인 ‘두(Do)’를 강력하게 외칠 때는 어느덧 영국식 발음을 벗어내고 완전한 미국인이 돼 있었다. 재능이 뛰어난데도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는 데 주저하는 후배를 향해 솔 르윗은 그의 작품 속 완벽하게 재단된 드로잉의 배열처럼 단어를 뿜어냈다. “이제 그만 좀 생각하고, 걱정하고, 의심하고, 갸웃거리고, 두려워하고, 혼란스러워하고, 불평하고, 몸부림치고, 악의적인 눈빛을 보내거나… 탐색하거나, 비웃거나 하는데 자신을 낭비하지 말고, 제발 좀 그냥 해!”(원문은 Just stop thinking, worrying, looking over your shoulder, wondering, doubting, fearing, hurting, hoping for some easy way out, struggling, grasping, confusing, itching, scratching, mumbling, bumbling, grumbling, humbling, stumbling, numbling, rambling, gambling, tumbling, scumbling, scrambling, hitching, hatching, bitching, moaning, groaning, honing, boning, horse-shitting, hair-splitting, nit-picking, piss-trickling, nose sticking, ass-gouging, eyeball-poking, finger-pointing, alleyway-sneaking, long waiting, small stepping, evil-eyeing, back-scratching, searching, perching, besmirching, grinding, grinding, grinding away at yourself. Stop it and just DO!) 숨도 제대로 한번 고르지 않고 마치 포효하듯 내뱉는 컴버배치의 말은 가슴에 말 그대로 비수처럼 꽂혔다. 컴버배치가 레터스 라이브를 통해 ‘두(Do)’ 편지를 읽은 건 이미 여러 차례. 각종 유튜브를 통해 ‘인생 명언’으로 잘 알려진 영상인데도 현장에서 느끼는 생동감은 영상이 다 잡아내지 못할 정도였다.
지난 2013년 첫 선을 보인 뒤 올해로 10년째인 레터스 라이브는 낭독회와 함께 가수들과 연주자의 공연도 이뤄지는 복합 공연이다. 시작은 레터스 라이브의 총괄 프로듀서이자 기획자인 제이미 빙 영국 캐논 게이트 출판사 대표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사이먼 가필드의 ‘편지로(To the Letter)’와 편지 마니아인 숀 어셔의 ‘레터스 오브 노트’를 출판하면서다. 영국의 가수이자 저술가인 닉 케이브와 배우 질리안 앤더슨이 편지 낭독에 대한 제이미 빙의 아이디어에 대해 열광했고, 이후 베네딕트 컴버배치 등 유명 스타들도 합세했다.
이날 공연엔 베네딕트 컴버배치를 비롯해, 질리안 앤더슨, 올리비아 콜맨, 조디 휘태커, 미니 드라이버 등 스타 배우들과 영국의 유명 코미디언 스티븐 프라이를 비롯해 롭 델라니, 톰 오델, 토비아스 멘지스, 윌 샤프 등이 무대에 섰다. 할리우드 스타 우디 해럴슨도 깜짝 연사로 등장해 청중을 웃기고 울리는 등 총 27편의 편지가 대중에게 전달됐다. TV가 없어 수신료를 내지 않는데도 수신료를 받으러 온 BBC를 향해 고상하게 꾸짖은 아동문학작가 재키 모리스의 편지는 마치 국내 공영방송 수신료 사태를 연상시키게 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전쟁으로 헤어진 연인이 오랜 기간 나눈 절절한 편지와, 카피 라이터에서 극작가로 변신한 주인공의 글자에 대한 애정, 비행기 좌석에 대해 미국 컨티넨탈 비행사에 항의하는 서한 등 연서부터 불만까지 다양한 인간의 감정을 표출해냈다. 또 챗GPT가 가사를 쓰는 것에 대한 질문과 함께 인공지능은 인간이 구현하는 진정한 아름다움의 우위에 설 수 없다는 닉 케이브의 강력한 메시지가 담긴 답변 역시 청중의 찬사를 끌어냈다. 수어도 함께 진행됐다.
이날이 더욱 특별한 건 글로벌 명품 브랜드 몽블랑이 1년간의 글로벌 스폰서십을 공식 론칭하며 ‘글자의 힘’에 대해 함께 역설했기 때문이다. 특히 몽블랑을 대표하는 마이스터튁 만년필은 내년이면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 문학과 서신을 중요시하는 몽블랑과 레터스 라이브 양 측의 가치를 함께 기념할 수 있었다. 레터스 라이브의 공동 프로듀서인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레터스 라이브와 몽블랑의 파트너십은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면서 “이를 통해 레터스 라이브는 흥미로운 방식으로 성장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핵심인 자선 활동을 더욱 지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레터스 라이브는 영국 국립 문해력 재단(National Literacy Trust)과 난민 등을 돕는 자선 단체인 추즈 러브(Choose Love)를 비롯한 여러 단체를 후원해왔다.
초를 다투는 디지털 시대에 손글씨 같은 ‘느린’ 통신이 과연 그 의미대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제이미 빙은 줌 인터뷰를 통해 “글쓰기는 연금술”이라면서 “편지는 말 그대로 사람들을 문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영적으로 이전에 가보지 못했던 그 시간과 장소로 데려다주는 매우 강력하고 효과적인 장치”라고 말했다. 2000년 전에 씌여진 편지를 읽을 때나, 2분 전에 쓰인 편지를 읽을 때 아프리카든, 한국에서든 그 시대 그 사람으로 이입하게 되는 것이다.
레터스 라이브엔 세계적인 작가들의 편지만 오르는 것이 아니다. 옆집 사람이나 윗집 할머니가 보낸 편지도 무대에서 읽힐 수 있다. 제이미 빙은 “레터스 라이브의 장점은 읽는 이가 누구일지 마지막까지 베일에 쌓여 청중을 현장에서 놀래키는 즐거움을 줄 수 있다는 점과 배꼽잡고 장난스럽게 웃을 수 있는 편지도 무대에 설 수 있는 것”이라고 밝혔다. 누군가의 마음과 마음을 연결할 수 있는 것이 글자의 힘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잘 쓴 편지란 무엇일까. 제이미 빙은 “그 목소리에 반드시 동의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건 아니지만, 진정성 있는 목소리가 가장 중요하다”면서 “언어의 힘을 이해한다는 것은 단어를 신중하게 사용하는 방법을 이해한다는 뜻이고, 그 단어가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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