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결산] 초유의 전산망 마비사태…상처받은 '디지털 정부'
범정부TF, 종합대책 마련 중…전문가들 "원인·책임 규명하고, 투자 확대해야"
(서울=연합뉴스) 양정우 김은경 이상서 기자 = 세계 최고 수준의 '디지털 정부' 명성에 오점을 남긴 한해였다.
1967년 인구통계용 컴퓨터 도입에서 시작해 주민정보 전산화, 국가기간 전산망 구축, 전자정부법 도입 등을 거치며 진화를 거듭해왔기에 올 11월 벌어진 행정전산망 마비 사태는 정부나 국민 모두에게 충격이었다.
민원 서비스를 제공하는 전산망이 멈춰 서며 민원실과 주민센터에는 '수기'(手記)가 다시 등장했다. 민원 창구에서 이름을 적고 확정일자 등을 신청하는 상황은 마치 '아날로그 정부'로 회귀한 모습이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정부는 관계기관을 총동원해 대책 마련에 애쓰고 있다. 재발 방지는 물론 디지털 정부 신뢰를 목표로 종합대책을 준비하고 있다.
정보통신(IT) 전문가들은 정부가 이번 사태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먹통 사태의 원인을 상세히 규명하고, 그에 따른 진단과 처방을 내려 두 번 다시 전산망이 멈춰서는 일이 없도록 해야 된다고 강조했다.
행정전산망 셧다운…언제 터질지 모를 '장애 지뢰밭'
지난달 17일 공무원 전용 행정전산망이 장애를 보이다 급기야 마비됐다. 민원 현장의 공무원들이 전산망을 이용하지 못하면서 읍면동 주민센터의 민원 서비스가 전면 중단됐다.
정부는 온라인 민원 서비스인 '정부24'에서 업무를 대신 볼 수 있다고 안내했으나, 당일 오후 정부24마저 먹통이 되며 민원 현장은 일대 혼란에 빠졌다.
밤사이 복구작업을 거쳐 이튿날 정부24 서비스가 재개되고, 장애 사흘만인 19일 정부가 전산망 정상화를 선언했으나 먹통 사태의 원인은 규명하지 못했다.
정부가 전산망 마비 원인을 찾는 사이 22일 주민등록시스템에 장애가 발생했다. 하루 뒤인 23일에는 조달청의 국가종합전자조달시스템인 '나라장터'가 문제를 일으켰다. 나라장터 전산망이 1시간가량 접속이 되지 않으면서 입찰공고가 무더기로 연기됐다.
24일에는 모바일 신분증 서비스가 마비되는 일이 벌어졌다. 일주일 새 정부가 책임지고 관리하는 전산망 사고가 4건이나 연달아 발생한 것이다.
정부는 행정전산망 완전 복구를 발표하며 더는 전산망에 문제가 없을 것으로 장담했으나, 이는 그만 '공수표'가 되고 말았다.
전산망 장애는 진행형이다. 이달 12일에는 '나라장터'가 또다시 접속 장애를 겪었다. 입찰이 몰린 시간대 트래픽 과부하에 따른 문제로 파악됐지만, 한 달도 되지 않아 똑같은 문제가 벌어지며 불신을 자초했다.
정부는 17일 전산망 장애 원인을 네트워크 장비인 라우터의 포트 불량으로 파악했지만, 멀쩡했던 장비가 갑자기 왜 고장을 일으켰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시원한 설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일련의 전산망 사태는 정부가 국내외에서 디지털 정부를 적극적으로 홍보하던 시기에 벌어지면서 논란을 키웠다.
정부는 전산망 마비 당시 재난 문자를 발송하지 않아 혼란을 키웠다는 지적에 "디지털 재난 수준으로 보지 않는다"고 맞섰으나, 비판이 거세지자 뒤늦게 관련 법을 개정해 국가기관의 전산망 마비를 '사회재난'에 추가하기로 했다.
범정부 대책 TF 출범…"허약해진 디지털 정부 강화할 것"
정부는 일련의 전산망 장애 사태를 디지털 정부 전반을 다잡는 계기로 삼겠다는 입장이다.
정부와 대통령실, 국민의힘은 최근 범정부 대책 태스크포스(TF)를 발족하고 내년 1월 발표할 종합대책을 준비하고 있다.
TF는 국무조정실에서 주재하고, 행정안전부, 기획재정부, 인사혁신처,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 관계 부처가 모두 참여한다.
이들은 개별 부처 내에서 해결하기 어렵고 타 부처와의 협업이 필요한, 디지털 정부 전반을 아우르는 개선책을 마련할 계획이다.
정부는 먼저 전 부처와 기관을 대상으로 노후·불량 전산장비를 전수 점검한다. 이미 지난달 점검을 시작했고, 필요시 관련 예산도 추가로 확충하겠다는 방침이다. 공공 정보시스템(338개)과 민간 금융·의료기관 등 기반 시설은 이달까지 일제 점검한다.
전산장애 발생 대응 매뉴얼을 보완하고, 국가 전산망 마비를 재난·사고 유형에 포함해 체계적으로 관리하기로 했다.
아울러 공공의 클라우드 전환을 가속화하고, 민간 기업의 클라우드 활용을 활성화할 방침이다.
이번 사태를 야기한 행정전산망을 대체할 '차세대 지방행정공통시스템' 구축도 추진 중이다.
소프트웨어 단가 현실화, 분리발주 및 조달평가 제도 개선, 기술력 높은 기업의 공공 정보화 사업 참여 활성화 등 정보화 사업 제도도 혁신한다.
과기정통부는 일정 규모 이상의 공공 소프트웨어 사업에 대기업의 입찰을 허용하는 것을 골자로 소프트웨어 진흥법을 개정한다는 방침이다.
행안부 관계자는 "우수한 IT 인력을 공공 부문에 영입하려고 해도 다양한 부처 소관 업무와 맞물려 있어 개별 부처가 원한다고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며 "그러한 제도적인 문제 및 법령상 미비점 등에 대한 개선 방안을 범정부적 차원에서 마련할 것"이라고 밝혔다.
"종합대책에 사고원인·책임규명 담겨야"…'CIO 도입' 촉구도
전문가들은 내달 나올 정부 종합대책에 그간 빠져 있던 명확한 원인 규명은 물론, 책임 소재 규명과 재발 방지 대책이 담겨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성엽 고려대 기술경영전문대학원 부교수는 "이번 전산망 마비가 노후화된 장비 탓인지, 관리자의 실수인지, 시스템 문제인지 파악해 대책 보고서에 실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는 지난해 10월 발생한 카카오톡 먹통 사태와 대비시켰다. 민간기업은 문제를 공론화하고 이용자에게 알렸으나, 더욱 투명해야 할 공공기관은 되레 '깜깜이 조치'로 일관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이 때문에 "여전히 책임을 지겠다고 나서는 이가 아무도 없는 것"이라고 질타했다.
이 교수는 "단순히 분풀이로 책임자를 내세우라는 의미가 아니다"며 "재발 방지를 약속하고, 더 나은 시스템을 구축하겠다는 의미로 책임 소재를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전산망 관리 인력을 늘리고, 보다 철저한 장비 관리를 위해 투자를 늘려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김명주 서울여대 정보보호학과 교수는 "발전 속도가 유독 빠른 전산 분야 특성상 변화에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는 관리자가 필요하다"며 "민간기업에 있는 인재들을 공공 전산망에 유치하기 위해서라도 근무 환경 개선과 인프라 확충 등에 과감히 투자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김 교수는 "동시에 탄탄한 디지털 정부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정부 차원에서 모든 것을 감당하겠다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며 "적어도 하드웨어 기능만이라도 민간 분야를 활용해 모자란 점을 채울 필요가 있다"고 했다.
민간처럼 공공부문에도 전산망 관리를 총괄하는 책임자를 둬야 한다는 진단도 나왔다.
김용대 한국과학기술원(KAIST) 전기전자공학부 교수는 일주일 새 전산망 장애가 잇따른 원인에 대해 "초기 인프라 구축 과정에서 촘촘하게 구축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나아가 사고 최소화와 신속한 조치를 위해서는 상시 예방책 마련과 오류 원인 분석 등을 관장하는 '최고정보책임자'(CIO)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미국에는 이미 국가 전산망 인프라 점검을 총괄하는 CIO가 서버와 운영, 대응 방안 등을 책임지고 있다"며 "우리도 파편화된 구조를 재정립하고, 이를 관리할 '콘트롤 타워'를 세워야 한다"고 역설했다.
eddie@yna.co.kr, bookmania@yna.co.kr, shlamazel@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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