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치형의 과학 언저리] 과학계 카르텔을 찾아서
전치형│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과학잡지 ‘에피’ 편집주간
“우리는 과학을 매개로 삼아 어떤 대의를 함께 추구할 수도 있고, 과학을 핑계로 삼아 편을 갈라 싸울 수도 있다. 2022년의 과학은 두가지 가능성을 모두 보여줬다. 2023년에는 해마다 더 어려워지는 지구와 인간의 문제를 풀기 위해 과학과 정치가 더 밀접하게 연결되기를, 그러한 대의에 참여하는 과학을 더 많이 응원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너무 뻔한 말이었을까. 지난해 이맘때 이 지면에 썼던 짧은 문단을 올해 재활용해도 별로 이상하지 않다. 다만 올해는 과학을 두고 협력보다는 편 가르기가 더 자주 보였고, 그때 상대편을 지칭하는 말로 ‘카르텔’이 유행했다는 점이 다르다. 명확히 정의된 적은 없지만 대략 ‘과학을 수단으로 끼리끼리 모여서 이익을 도모하는 집단’ 정도의 뜻이었다.
한국 과학자들을 카르텔로 처음 지칭한 것은 윤석열 대통령과 정부였다. 정부 연구개발 예산을 짬짜미하여 따내고 나누어 쓰는 과학자 집단이 있다는 의심이었다. 그런 과학자들에게 연구비를 퍼 줄 이유가 없으니 전체 연구개발 예산을 확 줄이겠다는 것이 이른바 과학계 카르텔에 대한 정부의 충격요법이었다. 과학계는 당연히 반발했고, 그런 카르텔이 있느니 없느니 갑론을박도 하고, 또 아무리 봐도 카르텔의 일원이라고 하기는 어려운 이공계 학생들이 입을 피해에 대한 걱정도 쏟아냈다.
이번달에 나온 계간지 ‘황해문화’의 필자들은 과학계 카르텔이 실재한다고 주장한다. ‘후쿠시마 오염수의 과학, 누구를 위한 어떤 과학인가’라는 제목의 특집에서 지목하는 카르텔은 냉전시대 반공과 국가안보 이념 아래 극단적 비밀주의를 기반으로 성장한 핵과학계에 있다.(우동현 카이스트 교수) 지식을 독점한 핵과학 전문가 집단이 환경과 건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안에서 일반 시민을 배제한 채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면 그것이 곧 과학계 카르텔에 해당한다는 지적이다. 과학계 카르텔의 정보독점 현상은 “과학적 소양이 결여된 일반인들은 (…) 과학기술 전문가의 판단에 복종해야 한다는 전문가주의”로 이어지며 이는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주장도 가능하다.(이영희 가톨릭대 교수)
내가 편집주간을 맡은 과학잡지 ‘에피’의 ‘한국 과학, 어디에 있나’라는 제목의 특집 인터뷰에서도 과학계가 점차 “민주주의 사회 내의 또 다른 이익집단”으로 인식되는 경향에 대한 우려를 엿볼 수 있다. 후쿠시마 오염수 문제처럼 과학자들의 참여가 필수적인 논의가 정치적 진영구도를 극복하기는커녕 “정당 간 싸움의 일부가 되어버렸다”라는 진단이다.(김소영 카이스트 교수) 이때 과학은 이해와 합의를 위한 중간지대에 자리하지 못하고 양 정치 진영의 구석으로 밀려난다.
‘카르텔’을 올해 한국 과학계의 키워드로 삼는 것이 마음 편치 않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카르텔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과학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모아낸 사례도 있다는 사실이다. 지난 수요일 한국초전도저온학회는 올여름 한바탕 소동을 일으켰던 물질인 “LK-99가 상온 상압 초전도체라는 근거는 전혀 없다”는 결론을 담은 백서를 공개했다. LK-99를 두고 노벨상 혹은 주식 대박에 대한 기대가 폭발하자, 사회적 파장을 우려한 학회는 직접 검증위원회를 꾸렸고 스무명 남짓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서 논의를 이어갔다. 여기 참여한 한승용 서울대 교수는 ‘에피’ 특집 인터뷰에서 검증위 활동이 때로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심한 비난을 받았다고 말했다. LK-99가 초전도체이기를 간절히 바랐던 이들에게 검증위는 주류 학자들이 카르텔을 꾸려 기득권을 지키려는 활동으로 보였을 것이다.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운 과학자 집단을 기대할 수는 없다. 과학자 대부분이 정부나 기업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연구하는데다, 과학자도 이런저런 신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과학자들이 모이고 집단으로 행동할 때, 그것이 자신들의 이익을 도모하려는 카르텔이 아니라 각자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그 무엇을 공동으로 추구하려는 시도이기를 바란다. 토론과 합의를 통한 진전이라는 것이 갈수록 희귀해지는 이때, 혹시 과학에서는 아직 그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기대해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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