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문득 붕괴되고서야 도망치려 한다 [책&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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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적 숲: 과잉 자극에 맞서 휴식을 취할 때조차 전자 매체와 온라인 플랫폼에 둘러싸인 환경.
이 차이를 희석하는 것이 바로 전자적 숲이겠다.
모두가 숲 안에서 외따로 한 그루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현재 진행 중인 국립현대미술관의 기획전 '전자적 숲; 소진된 인간'의 일부로서 완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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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적 숲; 더 멀리 도망치기
이미상·임솔아·김리윤·박세미·서이제·손보미·위수정·강성은·송승언·김연수·한유주·안미린·이제니 지음 l 문학과지성사 l 1만7000원
전자적 숲: 과잉 자극에 맞서 휴식을 취할 때조차 전자 매체와 온라인 플랫폼에 둘러싸인 환경.
이 조어로 대변되는, 예를 들면 수면용 에이에스엠알(ASMR)과 같은 환경이 우리 삶의 활로인지 함정인지 불명확하다. 다만 인간이 만든 이 숲의 폐단이 자명해질 즈음엔 인간이 이 숲을 자력으로 갈아 없애는 것도 이미 불가능해질 것이다. 미국 에스에프 작가 켄 리우가 인공지능을 주제 삼은 소설(‘신들은 죽임당하지 않을 것이다’)에서 전망한 대로다. “우리는 신들을 창조했어.…그 신들은 순순히 목줄을 차지 않을 거야.”
명상과 위로가 코드화되는 이 시대를 13명의 작가가 진단해본다. ‘전자적 숲; 더 멀리 도망치기’다.
스토킹, 사직, 사별 등 크고 작은 불행이 이어지고 그로 관계가 돈독해진 세 여자는 “우리에게 아무 일도 없는 나날이 너무 오랜만이라는 생각”에 캠핑을 떠나기로 한다. 임솔아의 단편 ‘퀘스트’다. “쉬어 본 적이 없어서 쉬는 방법도 몰랐”던 이들이 스스로를 위로해온 방식이란 게 게임-그것도 현실이 차라리 고마울 정도로 매정하고 미션 수행(퀘스트)으로 고된-, 내지 사람들이 고통스럽게 죽어 나가는 고어물 감상 따위다. 이제 이들의 1박2일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불행은 어디서 비롯하는지 임솔아는 섬세하게 관찰한다.
여자 셋과 대비되는 남자 셋 이야기가 서이제의 ‘더 멀리 도망치기’다. 고등학생 때 담배를 나눠 피운 사이로, 금연 목표가 돈내기가 되고 판돈이 술값이 되고, “불운하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운을 시험하는” 바보들이라 기어코 경마에 빠진다. 개중 껄렁한 ‘종’이 늘 중심이었는데, 선우가 먼저 배신하고, 소심하고 회의감 가득한 ‘나’ 또한 종의 자장에서 벗어나 보고자 한다. 나를 위로하는 건 유튜브에나 있다. 동물원을 탈출해 “어디로 가든 잘못된 길”일 수밖에 없는 말의 영상, 그 말을 실제 전날 골목에서 마주쳤던 ‘나’가 은유하는 바까지 서이제는 거침없다.
두 단편은 의도치 않게 여성과 남성의 생태 차이를 부각한다. 더 조밀히 연대의 숲을 이루려는 여성과 흩어지(고 마)는 남성은, 각각의 한계이면서 해법의 조건이기도 하다. 이 차이를 희석하는 것이 바로 전자적 숲이겠다. 모두가 숲 안에서 외따로 한 그루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전망은 ‘신의 마음 아래에서’를 쓴 김연수의 몫이다. 기후재앙과 디지털 만능의 시대, 인간보다 더 인간적 마음을 좇는 디지털 마음을 그렸다. 지구의 위기를 알리고자 북극에서 피아노를 치고 끝내 육체를 버린 성연진은 아름답고, 그때 너울대던 오로라가 인간의 마음도, 인공지능의 마음도 변화시키는 건 너무도 지당한 환상이다.
이는 시인 송승언의 시와 호응한다. “…/ 나는 내구성의 한계에 따라 문득 붕괴되었다/ 내가 파괴되자 내면에서 눈부신 빛 덩어리가 쏟아져 나왔고/ 크고 작은 짐승들이 그 덩어리를 한 조각씩 입에 물고 빛을 내며 걸어갔다/ 짐승들의 광배로 이 숲은 한층 밝아지고 한층 두려운 곳이 되리라”(‘돌 천사’ 일부)
이 책은 현재 진행 중인 국립현대미술관의 기획전 ‘전자적 숲; 소진된 인간’의 일부로서 완성됐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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