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한 조선인” “모범 보인 전사” 일제 포스터 속 야욕의 30년 [책&생각]
10년여 수작업으로 자료 수집
계몽과 문명화도 식민지배 일환
전쟁 미화 ‘죽음의 정치’ 생생
포스터로 본 일제강점기 전체사
일본식민주의 미학과 프로파간다
최규진 지음 l 서해문집 l 4만5000원
유럽과 미국에서는 1880년 무렵부터 색채가 화려한 대형 옥외 포스터를 많이 만들었다.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각국은 전쟁을 선전하고 전의를 높이려는 목적의 선전용 포스터를 만들어 보급했다. 일본 제국주의 역시 조선에 대한 식민 통치 기간 동안 포스터의 이런 선전 효과를 적극 활용했다.
역사학자 최규진(청암대학교 재일코리안연구소 연구교수)의 ‘포스터로 본 일제강점기 전체사’는 1915년부터 1945년 해방까지 일제가 제작하고 배포했던 포스터들을 분석해 그 안에 담긴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를 드러낸 책이다. 지은이는 “일제강점기의 매체와 문헌에 실려 있는 거의 모든 포스터를 수집하고 정돈한 것을 토대로 삼았다”며, 텍스트와 달리 검색이 불가능한 이미지 자료의 특성상 “신문 한 장 한 장, 잡지 한 쪽 한 쪽을 모두 넘겨 보”는 방식으로 10년 넘게 기초 작업을 펼쳤고 그 결과 많은 포스터를 새로 발굴해 책에 실었다고 밝혔다.
위생과 건강, 시간 관념, 절약과 저축, 좌측통행, 친절과 명랑 같은 생활 습관 개선 포스터 이야기로 책은 시작한다. 위생과 건강은 “제국주의자들이 식민정책을 대중에게 전파하는 주요 장치였다.” 1924년 경기도 경찰부가 배포한 포스터에서는 상투를 튼 ‘야만의 조선인’이 게걸스럽게 게를 먹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토질 예방’이라는 표지를 달았다. 토질이란 폐디스토마를 가리키는데, 조선인이 가재와 게 등을 날로 먹어서 생기는 사례가 많았다. 미쓰이합명회사가 1925년에 배포한 산불 예방 포스터에서도 갓을 쓴 이들이 곰방대를 물거나 궐련에 성냥불을 붙이는 모습과 산에 불이 난 그림을 위아래로 배치하고 그 사이에 “큰일 났다”라는 문구를 적어 “은근슬쩍 조선의 야만을 강조”했다. 이처럼 계몽과 ‘문명화’를 내세운 포스터에도 “식민지인에게 열등감을 심어 주어 저절로 순종하게 하려는” 이데올로기적 목적이 있다는 게 지은이의 지적이다.
조선일보 1929년 5월12일 치에는 이 신문 부사장이었던 안재홍이 주도한 ‘생활개신운동’ 포스터가 실렸다. “조선 사람아, 새로 살자!”라는 문구와 함께 다섯 가지 목표가 제시되었는데, 흰옷 대신 검정 옷을 입고 긴 머리를 자르자는 “색의단발”을 앞세웠다. 1934년 조선총독부 체신국이 배포한 포스터는 “자력갱생은 저축으로”라는 문구 아래 농부들이 힘을 합쳐 밭을 가는 모습을 그렸다. 이 포스터는 일제가 1932년에 시작한 농촌진흥운동을 주제로 삼았지만, 이 운동은 “착취 메커니즘을 철저히 은폐한 채, 열심히 일하고 절약하면 잘살 수 있다는 이데올로기 세뇌정책이었다.” 한편 국민총력조선연맹이 1942년 7월 무렵부터 기획한 친절·명랑 운동의 핵심은 “국가의 요구를 즐겁게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 문맹퇴치운동과 농촌계몽운동에 열을 올렸다. 신문 독자를 늘림과 동시에 민중의 의식을 각성시키려는 것이었다. 조선일보 1928년 신년호에 실린 문맹퇴치 포스터는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맹원이었던 안석주가 그렸는데, 문맹퇴치 깃발을 한 손에 든 청년이 다른 한 손으로는 주먹을 불끈 쥔 채 대중을 선동하는 모습이 “전형적인 사회주의 리얼리즘 양식을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동아일보가 주도한 농촌계몽운동 ‘브나로드’의 포스터들은 하나같이 계몽의 주체인 학생은 몸집이 크고 높은 곳에 있는 반면 계몽의 대상인 농민은 키가 작고 낮은 곳에 자리해 “농민이란 계몽되어야만 할 수동적인 존재”로 표현하고 있다.
1915년 반관반민 지원단체인 경성협찬회가 만든 조선물산공진회 포스터는 춘앵무를 추는 기생을 전면에 내세웠고 단풍에 둘러싸인 경복궁 근정전과 경회루를 위쪽에, 일본 왕실의 상징인 국화와 근대적 공진회 건물을 아래에 배치했는데, 경복궁이 어둡고 쓸쓸하게 보이는 반면 공진회 장소는 밝고 활기차게 그려졌다. 1918년 제2회 경상북도물산공진회 포스터에서도 불국사 다보탑은 생기 없고 어두운 공간으로, 공진회 장소는 활기 있고 밝은 공간으로 나온다. 1940년에 열린 조선대박람회 포스터는 흰 저고리와 검은 치마 차림의 여성이 일장기를 흔들고 있는 모습을 통해 일제에 대한 조선인들의 복종과 충성을 표현했다.
중일전쟁에 이어 태평양전쟁까지 일으킨 일제는 “국민의 체위를 향상시켜 국방전력을 강화”한다는 명분 아래 여러 정책을 내놓았고 그에 맞춘 포스터들을 배포했다. 매일신보 1942년 2월13일 치에 실린 포스터는 “당신은 얼마나 나랏일에 쓸 만한 몸을 가졌습니까!”라는 문구를 중심으로 체력검사 참여를 독려하는 내용을 담았다. 1943년 9월19일 치 매일신보에 실린 포스터는 “모두 등록, 결전체제 청장년국민등록”이라는 표제어를 달았다. 전세가 연합군 쪽으로 기울면서 일제는 ‘결전체제’라는 말을 더 자주 사용했다.
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 1943년 2월18일 치에 실린 포스터에서 청년단복을 입은 청년은 마치 징병을 간절히 바라는 듯한 모습이다. 친일 화가 김인승이 그린 대형 육군지원병 포스터를 비롯해 해군지원병 모집 포스터, 조선인학도지원병, 육군소년비행병 포스터 들이 어지러운 가운데, 지원병이 되어 맨 처음 전사한 이인석과 이형수 등의 이름을 쓰고 “성전순국(聖戰殉國)의 모범을 보인 사람”이라 쓴 포스터, “우리가 기다렸던 길, 광명과 함께 열어 가자”라는 문구와 함께 총검을 비껴들고 살기등등하게 노려보는 병사의 모습을 담은 포스터가 특히 보는 이를 힘들게 한다. 영화 포스터처럼 보이는 “이런 종류의 포스터는 전쟁을 한결 친숙하게 느끼도록 만들고 환상과 욕망의 습성을 악용해 전쟁을 미화한다.” 일하는 여성 주위를 “당신 뒤는 내가 떠맡겠습니다”라는 문구로 둘러싸 여성 노동력 동원 속셈을 드러낸 포스터가 경성일보에 실린 날짜는 1945년 6월15일이었다. 패망 직전까지도 일제는 전쟁과 식민 지배 영속화 야욕을 멈추지 않았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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