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뜰] 다시 시금치씨를 뿌리며

관리자 2023. 12. 15.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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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에 시금치씨를 뿌렸다.

지난해 이맘때는 봄동과 보리도 심었지만, 올해는 시금치만 세이랑 심고 겨울을 날까 한다.

봄부터 가을까진 무시하고 잠든 적이 많았지만, 시금치씨를 뿌리고 난 겨울엔 물과 사료를 챙겨 마당으로 나간다.

시금치가 텃밭에서 제 할 일을 하는 동안, 나는 긴긴 겨울밤에 어울리는 몇권의 책을 읽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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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이 비면 채워넣던 습성을 바꿔
이번 겨울엔 시금치만 키우려 해
올해 돌아보면 화나는 날도 내 삶
그 계절 상처 위 일상 다시 흐를 것
봄바람 불면 겨울 이긴 시금치로
새로운 반찬 몇가지 만들어볼까

텃밭에 시금치씨를 뿌렸다. 지난해 이맘때는 봄동과 보리도 심었지만, 올해는 시금치만 세이랑 심고 겨울을 날까 한다. 밭이 비면 무엇이든 채워넣던 습성을 바꾸려는 것이다. 강이든 들이든 텅 빈 충만을 느끼기에 가장 좋은 계절이 왔다.

눈이 본격적으로 내리기 시작하면, 그때가 언제든 텃밭으로 향할 것이다. 시금치와 함께 눈을 맞기 위해서다. 몇몇 작가들은 겨울을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황량한 계절로 간주하지만, 내가 사는 섬진강 들녘과는 어울리지 않는 주장이다. 시금치씨를 11월 하순에 뿌렸다고 하면 비닐하우스부터 떠올리는 이들 역시 적지 않다. 이곳에선 따로 비닐이나 볏짚을 덮어주지 않더라도 시금치가 얼어 죽지 않고 버틴다. 북풍한설의 겨울이 따듯한 봄이나 더운 여름보다 싹을 틔우고 줄기를 뻗고 꽃을 피우고 열매 맺기 힘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제아무리 힘겨운 시절이더라도, 시금치가 자라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시금치뿐이랴. 지난주에 태어난 강아지 네마리도 어미 개 몽실의 젖을 먹으며 무럭무럭 자랄 것이다. 내 마음도 지난해 겨울보다 한뼘만 더 깊어졌으면 싶다.

눈 내린 시금치밭에 가장 많이 찍히는 것이 고양이 발자국이다. 겨울은 동네 고양이들에게도 시련의 계절이다. 이 집 저 집 냉기가 적은 공간을 비집고 들어가선 웅크리거나, 허기진 배를 채울 먹이와 맑은 물을 찾아 돌아다닌다. 봄부터 가을까지 풀에 가려 보이지 않던 고양이들의 움직임이 훤히 드러나는 셈이다.

너무 춥고 배가 고픈 고양이들은 눈밭을 되돌아와선 창문 밑에서 애절하게 울며 집사를 찾는다. 봄부터 가을까진 무시하고 잠든 적이 많았지만, 시금치씨를 뿌리고 난 겨울엔 물과 사료를 챙겨 마당으로 나간다. 고양이들이 허겁지겁 먹는 모습을 찬찬히 살핀다. 다친 곳은 없는가. 혹시 병들진 않았는가.

텃밭으로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린다. 고양이들은 이렇게 다가와선 울며 도움을 청하기라도 하지만, 시금치는 말이 없다. 시금치이기에 당연히 고요한 것인데도, 이 고요가 갑자기 낯설고 신기하다. 밤새 내린 함박눈을 이고도 시금치가 자랄까. 이런 질문이 생겨나면 밭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 빛이 바래지는 않았는지, 잎이 떨어진 곳은 없는지, 찬찬히 확인한 후에야 안심한다.

2023년도 며칠 남지 않았다. 한해를 돌아보노라면, 나서서 먼저 말하고 싶은 일들도 드물지만 있긴 하다. 행복했거나 뿌듯했거나 즐거웠던 날들이다. 그 순간을 만들기 위한 고민과 노력을 얼마든지 이야기해도 좋다. 다만 내 안에서 침묵하거나 회피하는 일들까지, 다가가서 살폈으면 한다. 슬프고 불쾌하고 화가 치미는 나날 역시 내 삶의 일부다. 출렁대던 그 계절의 나를 쳐다보고 말을 건네고 어루만지노라면, 딱지 앉은 상처 위로 일상의 냇물이 다시 흐를 것이다.

시금치가 텃밭에서 제 할 일을 하는 동안, 나는 긴긴 겨울밤에 어울리는 몇권의 책을 읽으려 한다. 농작물을 기르는 실용서와 제철 채소와 과일을 요리하는 법이 상세한 책을 이미 골라놓았다. 대도시에서 살 땐 전혀 손이 가지 않던 책들이다. 나는 여전히 장편소설을 많이 읽긴 하지만, 논밭과 부엌에서 할 일들을 곧바로 알려주는 책들도 지금부터는 가까이 두겠다. 골방의 책이 아니라 들녘의 책이며, 픽션이 아니라 논픽션이 대부분이다. 이 책들이 나를 어디로 이끌까.

해가 바뀌면 섬진강 들녘으로 내려온 지도 4년째로 접어든다. 아직 배우고 익혀야 할 것들이 많다. 봄바람이 불면, 겨울을 이겨낸 시금치들부터 거둬 새로운 반찬 몇가지를 만들어볼까 한다. 진한 맛을 상상하니 벌써 군침이 괴기 시작한다.

김탁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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