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추상미술의 계보… 단색화 이전에 이들이 있었다
점·선·면의 단순한 형태를 강조하는 기하학적 추상미술은 서구에선 몬드리안, 칸딘스키 등 20세기 현대미술의 주요 경향으로 각광받았다. 반면 국내에서는 앵포르멜과 단색화에 밀려 오랫동안 주목받지 못했다. 지금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리고 있는 ‘한국의 기하학적 추상미술’은 1920년대 경성에 상륙해 1960~70년대에 전방위적으로 확산된 한국 기하학적 추상미술의 역사를 작가 47인의 작품 150여 점을 통해 재조명한다.
서구의 기하학적 디자인이 영화 주보, 잡지 등에 처음 등장했던 1920~30년대 경성에서 전시의 막이 열린다. 1929년 극장 단성사가 영화 홍보를 위해 만든 ‘단성주보’ 300호 표지, 시인 이상(1910~1937)이 직접 디자인한 잡지 ‘중성’(1929) 표지 등이 나왔다. 이상은 1930년 ‘조선과 건축’의 표지 디자인 공모에 1등과 3등으로 동시에 당선됐고, ‘건축무한육면각체’ 등 자신의 시에서도 기하학에 대한 관심을 빈번하게 드러냈다. 전유신 학예연구사는 “당대의 창작자들에게 기하학적 추상은 새로움과 혁신의 감각이자, 일제강점기라는 현실을 타개하는 나름의 돌파구였다”고 해석했다.
전시는 특히 기하학적 추상미술이 건축, 디자인 등과 교류하며 미술의 외연을 확장하는 역할을 해온 것에 주목한다. 독일 바우하우스를 모델로 해 1957년 한국 최초로 결성된 화가, 건축가, 디자이너의 연합 그룹 ‘신조형파’의 활동을 소개한다. 또 하나, 한국의 기하학적 추상미술이 서구와 차별화되는 점은 자연과의 관계성. 서구의 기하추상 작가들에게 자연은 중요한 주제가 아니었지만, 한국 작가들은 자연의 형태를 단순화해 추상미술을 제작하거나, 자연을 대하는 서정적 감성을 작품에 불어넣기도 했다. 대표적인 작품이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불리는 유영국의 ‘산’이다.
단색화 거장들이 남긴 뜻밖의 작품을 발견하는 재미도 있다. 박서보가 1960년대 후반 제작한 ‘유전질’ 연작은 오방색과 한국의 전통적 패턴을 연상케 하고, 하종현의 ‘도시 계획 백서’(1968)는 반듯하게 구획된 서울이라는 도시 구조와 그 위에 들어선 건축물들을 평면에 담아냈다. 최근 10년간 한국 미술을 대표해온 장르는 단색화이지만, 단색화의 거장들 역시 기하학적 추상을 거쳐 지금의 작품 세계에 도달했음을 보여준다.
이번 전시를 통해 처음 공개된 작품들도 주목된다. 특히 윤형근이 1969년 제10회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출품했던 작품 ‘69-E8′(1969)은 그간 행방이 묘연했으나 지난해 유족들이 수해를 입은 작가의 작업실을 정리하다 둘둘 말린 상태로 발견했다. 노랑·빨강·파랑의 과감한 삼색으로 구획된 추상화로, 1970년대 이후 그의 대표작이 된 청다색의 어두운 색조 회화 이전에 그가 모색했던 작업 경향을 보여준다. 이승조가 1970년 제4회 오리진에 출품한 핵 ‘G-999′도 반세기 만에 다시 전시장에 나왔다.
김성희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이번 전시가 앵포르멜과 단색화를 중심으로 서술되어 온 한국 추상미술의 불균형한 지형을 되짚어 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내년 5월 19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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