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희의 커피하우스] 대통령에게 필요한 열 번째 사람
9명이 A 선택할 때 B라고 할 1명 정부엔 있나
영부인에게 ‘조용한 내조’ 직언하는 참모도 없어
대통령에게 쓴소리하는 것 쉬운 일 아니지만
일렬로 따라가다 망하는 일 막는 장치 있어야
최근 부산에서 만난 한 공무원은 부산 엑스포가 성사되리라 진짜 믿었다고 한다. 믿은 만큼 실망이 컸음은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다. 부산역 근처 호텔은 엑스포 홍보 팸플릿을 로비에 놔둔 채였고, 길거리에는 아직 거두지 않은 엑스포 휘장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기분 탓인가, 부산은 청소하고 정리할 기운이 없는 집처럼 어수선하고 조용했다.
부산 엑스포가 국가적 염원이 된 건 지난여름 출국하던 김건희 여사의 가방이 언론의 주목을 받았을 때부터였던 것 같다. 플라스틱 사용 자제 메시지가 담긴 에코 가방에 엑스포 유치 기원이 담긴 키링이 달려 있었다는 보도였다. 김 여사는 자신이 디자인 제작에 참여한 키링을 헝가리 총리에게 건네며 지지를 호소했다고 한다. 프랑스 한국문화원 곳곳에도 키링 이미지를 구현한 영상과 홍보 배너가 설치되어 눈길을 끌었다는 보도도 있었다. 부인의 이런 행보는 부산을 향한 용산의 ‘돌격 앞으로’ 메시지로 읽히기에 충분하다. 아니나 다를까 부산 엑스포 열기는 점점 높아지더니 투표 전야는 마치 한일 축구전처럼 후끈 달아올랐다.
이튿날, 119 대 29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 든 국민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낭패감에 휩싸였다. 기대를 하지 않았다면 실망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민-관 합동 유치전을 통해 얻은 무형 자산도 있다는 일부 평가에도 불구하고, 실망을 넘어 의아함까지 고개를 들었다. 우리 정부의 외교력과 정보력이 이 정도 수준이라면 대체 무슨 일인들 제대로 할 것인가. 엑스포 유치 결과야 투표로 드러났으니 망정이지, 결과를 알 수 없는, 그러나 실패를 향해 매진하고 있는 일이 이것뿐일까 하는 자연스러운 의심이다.
냉정히 따지고 보면 세상에서 이기는 게임만 하라는 법은 없다. 열세인 게임이라도 최선을 다해 임해야 하는 경우가 적지 않고, 진다고 무슨 죄를 짓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대통령이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도록 눈과 귀를 막고, 그릇된 정보 위에서 함께 춤을 춘 주변에 있다.
한비자에는 군주에게 영합하는 신하의 끔찍한 예가 하나 등장한다. 희귀한 음식을 맛보길 좋아하는 군주에게 자기 맏자식을 삶아서 바친 신하 이야기다. 그러니 군주는 좋아하고 싫어하는 표정을 내비치지 말라고 조언한다. 군주가 용맹을 좋아하면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 자가 많아지며, 허리 가는 사람을 좋아하면 굶는 사람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현명한 군주는 자신의 지혜를 버림으로써 총명해진다고도 했다. 그래야 지혜가 있는 신하가 지혜를 모두 짜내고, 슬기 있는 신하가 재능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위의 고사가 케케묵은 이야기로 들린다면, 좀 더 현대적인 예도 있다. 어떤 조직이든 성공하려면 필요한 ‘10번째 사람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조직 내 의사 결정 과정에서 9명이 모두 A를 선택할 때, B를 선택할 나머지 한 명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조직 내 편향 현상을 제거하기 위해 고도로 훈련된 이들을 ‘레드팀’이라고 한다. 이들은 같은 조직 안에서 모의 적군 입장에서 현 조직의 취약성을 먼저 파악하고 문제점을 살펴보는 사명을 지닌다. 보안 회사는 월급 받고 해킹만 하는 최정예 해커들을 두고 있다. 이들은 외부 해커 역할을 맡아 진짜 해킹을 예방하고 보안을 강화한다. ‘레드팀’을 우리말로 풀어 번역하자면 ‘올바른 쓴소리를 해줄 사람들’쯤 될 것이다.
대통령이 아니더라도 높은 사람에게 직언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진짜 민감하고 두려운 이야기를 해줄 사람은 아주 가까운 가족 외에는 없다. 권력자 입장에서 믿을 사람이 가족밖에 없기 때문이다. 대개 자녀나 부인이 그런 야당 노릇을 해야 하는데, 윤석열 대통령에게는 자녀가 없고, 야당 역할을 해야 할 부인은 야당의 먹잇감이 되어있으니 난감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투표함 뚜껑을 열어보고 화들짝 놀랐지만 사실은 정해진 패배였던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 이어 예상 밖의 저조한 성적표로 국민을 실망시킨 이번 부산 엑스포 유치전까지, 유사한 실패가 반복되는 걸 보면 지금 정부에 ‘레드팀’이 없음이 확실해 보인다. 만약에 있었다면 적어도 엑스포 유치 실패에 대비해서 “힘든 승부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부산 시민의 성원에 보답하겠다” 정도로 정직하게 메시지를 관리하고, 그에 따른 자원의 효율적 분배로 낭비와 허식을 줄였을 것이다. 그랬다면 저조한 성적표에도 국민의 실망감은 덜했을 것이다.
‘레드팀’이 없다는 심증을 더욱 확실하게 하는 건 ‘우려’에서 ‘리스크’로 확대된 김건희 여사 관련 이슈다. 당선 전 조용한 내조하겠다고 약속했으면 그 약속을 일단 지켜야 한다. 그래야 대통령의 약속도 국민이 믿을 수 있다. 그런 이야기를 주변에서 해주는 사람이 없는 것 같다. 정파를 넘어서 사람들은 김 여사에게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 그게 진짜 여론이다. 내부의 야당이 그런 이야기를 해주지 않으면, 결국 진짜 야당에서 들어야 한다. 그때는 이미 늦은 경우가 적지 않다.
‘대통령의 열 번째 사람’은 일렬로 줄지어 따라가다 함께 망하는 것을 막아주는 장치다. 지금까지 크고 작은, 드러나거나 드러나지 않았던, 여러 실수와 실패를 진단하고, 어디서부터 어떤 정보가 어떻게 꼬였는지 점검해야 한다. 분석을 바탕으로 실패 백서를 만들고, 유사한 실패의 반복을 막을 ‘레드팀’을 가동해야 한다. 무엇보다 윤석열 정부는 그렇게 만든 백서를 아직 활용할 시간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다행으로 여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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