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프레소] 초등생 아이가 흑사병이 뭐냐고 물었다
서울 집중, 집값과도 관련 있고
유연한 직장 문화도 중요한데
단기 처방만 내놓는 건 아닌지
겨울방학을 앞두고 아이 학원 시간표를 조정하느라 아내는 골머리를 앓고 있다. 맞벌이하면서 아이를 빈집에 종일 혼자 둘 수는 없는 일이다. 스케줄이 완성되면 초등학교 2학년인 아이는 영어·수학 각각 두 곳씩에 피아노·미술 같은 예체능까지 총 열 곳 가까운 학원을 돌며 방학을 보내게 될 것이다. 아직 저학년인 지금이라도 친구들과 마음껏 뛰놀게 하고 싶은 생각이 왜 없으랴만 그 친구들도 다 학원에 있다. 흑사병만큼 심각한 한국 저출생의 원인으로 학원의 경쟁 문화를 언급했다는 외국 칼럼니스트도 학원이 보육의 한 축을 담당하는 한국 사정까지는 몰랐던 것 같다.
문제는 학원에 의존하는 육아 시스템이 자주, 쉽게 흔들린다는 점이다. 얼마 전 아이는 독감을 앓았다. 열이 40도를 넘는 아이와 병원 대기실에 앉아서 지면에 서평 쓸 책을 펼쳤지만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이번엔 이렇게 넘어간다 쳐도 비슷한 일이 또 생긴다면? 어떤 해법이 있을지 생각할수록, 저출생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육아 문제가 고차방정식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러울 뿐이었다.
부모 입장에선 이번처럼 ‘급할 때’ 아이를 부탁할 수 있는 누군가가 가까이에 있는지가 결정적이다. 한국에서 이 역할은 대부분 할머니·할아버지의 담당이다. 나의 경우 집은 분당인데 처가댁 어른들은 서울에 사신다. 근처로 이사할까 여러 번 고민했지만 서울 집값이 너무 올라서 엄두가 나지 않았다. 육아 문제는 부동산 시장의 문제다.
친가 부모님은 지방에 계신다. 그러나 우리 부부에게도 아이에게도 지방에 내려가 사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다. 나와 아내의 직장은 서울에 있고, 지방과 서울의 학력 격차도 점차 커지고 있다. 육아 문제는 서울 집중과 지방 소멸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런 고민은 그러나 근본적인 질문을 간과한 것이다. 조부모의 육아 참여는 당연한 것인가? 맞벌이 부부는 조부모를 포함한 조력자 없이 아이를 기를 수 없는가? 아이가 독감 진단을 받던 날, 회의에 빠질 수 없었던 아내는 사무실에서 병원 문 여는 시간에 맞춰 앱으로 접수 ‘오픈런’을 하고 실시간 대기 순번을 내게 공유했다. 진료 접수 시장을 장악한 이 앱에는 이처럼 순번을 ‘편리하게’ 공유할 수 있는 기능이 있는데, 이는 병원행을 결정하는 부모와 실제로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는 보호자가 다른 경우가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육아 문제는 일과 가정의 균형 문제다. 이것은 근로 시간이나 육아휴직 같은 제도의 문제이면서 의식의 문제이기도 하다. 예전보다 많이 나아졌다지만 이런 위급 상황에서 “아이가 아파서 가봐야겠다”는 말을 자연스럽게 꺼내고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정착됐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뉴스엔 수많은 ‘저출생 대책’이 오르내린다. 낮은 출산율이 문제이니 출산이라는 행위에 이런저런 금전적 인센티브를 주겠다는 것이 대부분이다. 아이 키우기 쉽지 않은 현실은 복잡한데 고차방정식 앞에서 요행수를 바라며 답을 찍고 있는 건 아닐까. 집값을 비롯한 삶의 비용을 낮추는 일, 수도권 과밀을 해소하고 지역을 살리는 일, 일과 가정이 양립하는 근로 문화를 정착시키는 일은 저출생 때문이 아니더라도 근본적으로 추구해야 할 지향점이다. ‘저출생 대책’이라는 말에서 비롯하는 조건반사적 조바심을 극복하고 급할수록 돌아가는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외신의 ‘흑사병’ 보도를 전한 신문을 들고 아이가 우리나라에도 흑사병이 있냐고 물었다. 그게 아니라고 말해주면서도 당혹스러웠다. 부모님은 베이비 붐 세대였고 그 자녀인 나도 초등학교 교실이 모자라 2부제 수업을 경험했는데, 아이가 맞이할 한 세대 후의 대한민국은 어떤 모습일지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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