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생 앞세웠지만 권력 독점… 페이시스트라토스의 두 얼굴[조대호 신화의 땅에서 만난 그리스 사상]
각종 계략 통해 권력 장악
각종 계략을 통한 권력 장악, 그리고 정략결혼이 파국으로 끝난 뒤 11년의 망명 생활을 하면서 끌어모은 용병 부대와 함께 돌아와 실력으로 완전한 지배력을 손에 넣기까지 페이시스트라토스는 불굴의 권력 의지를 보여주었다. 그런데 권력 장악의 과정이 어떠했든, 그가 그 뒤 20년 동안 펼친 정치는 걸주(桀紂)의 폭정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그의 참주정치는 고대 그리스의 어느 시대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선정(善政)’이었다. 그는 전래의 법을 따랐고 다양한 정책을 통해 아테나이에 번영을 안겨주었다. 그 공적은 이루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이다. 농민들에게는 농기구 조달 자금을 제공했고 도로 개량 공사, 신전 건립, 상수원 개발 등의 토목 공사를 진행했다. 빈민을 위한 ‘뉴딜 정책’이었다. 영농 및 건설 공사에 필요한 자금은 공정한 세금을 통해 마련했다. 순회 재판 제도를 도입해 도시 밖에서도 재판이 공정하게 이루어질 수 있게 했다. 시민들이 참여하는 각종 문화, 예술 행사가 열렸고 이를 통해 아테나이는 당대 최고의 문화국가로 부상했다.
업적 많아 ‘황금시대’ 평가 있지만
페이시스트라토스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평가는 ‘참주적 선정’의 이면을 지적한다. 이 평가를 민주정의 이념을 설파한 페리클레스의 연설과 비교해 보자. “어느 누구도, 도시를 위해서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한, 가난이나 보잘것없는 평판 때문에 정치 활동에서 배제되는 일이 없습니다. (…)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정치(ta politika)에 무식하지 않습니다. 우리 아테나이인들만이 특이하게도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 자들을 ‘정치에서 자유로운 자들’이 아니라 ‘쓸모없는 자들’로 간주합니다.” 이런 민주정의 이념에 비추어 보면 결국 페이시스트라토스의 권력은, 그것이 아무리 선정이었다고 하더라도, ‘사유화된 정치권력’에 불과했던 것이다. 시민 대중의 정치 참여를 배제한 정치였으니까.
아무렴 어떤가? ‘잘살게’ 해주면 그것만으로 훌륭한 정치가 아닌가? 누군가는 이렇게 반문할 것이다. 이런 의문들이 잦아질수록 시민의 공공 의식과 정치 참여는 무시되고, 시민의 정치 참여가 부실해질수록 권력의 사유화를 노리는 개인이나 집단의 욕망은 더 커진다. ‘잘 먹고 잘살게 해줄 테니, 정치는 나에게 맡겨라.’ 하지만 이들이 말하는 ‘잘삶’에는 시민의 주권 행사, 정치 참여는 빠져 있다.
시민의 정치 소외가 부르는 위기
그렇게 사유화된 권력이 시민 전체의 공동 이익을 대변할 수 있을까? 시민들의 정치적 자기 소외를 대가로 요구하며 권력이 약속하는 ‘공익’은 어떤 것일까? 설령 그런 뜻에서 ‘공익’이 가능하다고 해도, 그것은 아주 드문 우연일 것이다.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정치가 그런 우연이었다. 하지만 어쩌다 그런 우연이 실현된다고 해도, 일인지배의 정치는 오래가지 못한다. 36년 동안 이어진 페이시스트라토스 가문의 권력이 그랬다. 기원전 527년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죽고 큰아들 히피아스가 권력을 물려받은 뒤 정치는 점차 폭정으로 변질되었다. 히피아스의 집권 후 13년째 되던 해 그의 동생이 피살되었고 몇 년 뒤 히피아스 자신도 추방되면서(기원전 510년) 참주정치는 종말을 맞았다.
우리 시대에도 대다수 시민들은 “사적인 일에 몰두하여 공적인 것에 관심을 가질 마음이나 여가가 없도록” 내몰린다. ‘민생’을 앞세운 정치적 구호가 시민들의 공적인 관심과 요구를 대신하고, 정치는 권력욕에 사로잡힌 개인들이나 집단의 전유물처럼 여겨진다. ‘정치는 모르겠고 나는 잘살고 싶어’처럼 시민의 정치의식을 모독하는 구호가 나오는 것은 주권재민을 핵심으로 하는 민주정이 빈껍데기가 되어간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인가?
민주정의 빈속을 어떻게 채울까? 시민들의 공적인 관심이 성숙되고 그에 뿌리내린 정치가 힘을 얻는 것 말고 다른 길이 있을까? 하지만 현실은 거꾸로 간다. 시민들은 사적인 관심과 이익에서 눈을 못 떼고 정치는 그런 이해관계에 기생(寄生)해서 권력을 얻고 지키는 데 몰두하고 있으니 2500년 전 참주의 선정보다 나을 게 없지 않은가.
조대호 연세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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