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뜨며[안드레스 솔라노 한국 블로그]

안드레스 솔라노 콜롬비아 출신 소설가 2023. 12. 14.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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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올해 3월, 1994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였던 일본 작가 오에 겐자부로가 세상을 떠났다. 예전 그의 인터뷰를 읽다가 익숙한 문장을 발견했다. “매일 아침 나는 항상 읽을 책이 있다는 생각을 하며 잠에서 깬다.” 영화, 노래, 그림, 그리고 책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은 나에게도 삶을 지속하는 데 동기부여가 된다. 오에는 매우 심각한 인지 장애를 갖고 있는 아들과 평화주의 운동가라는 이유로 늘 그를 공격하는 주변의 경멸까지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할 이유가 많았지만, 이 단순한 신념에 의지해 삶을 이어갔다.

그리고 2023년, 아침에 눈을 뜨자 나에겐 이런 것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안드레스 솔라노 콜롬비아 출신 소설가
▽영화=셀린 송은 서울에서 태어나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가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극작을 공부했다. ‘패스트 라이브즈’는 두 편의 연극을 연출하고 만든 첫 영화로 로맨틱 코미디라고도 하기 어렵고 가슴을 울리는 드라마틱한 영화도 아닌, 로맨스가 없는 사랑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내용은 미국인 남편과 함께 뉴욕에 사는 중년의 한국 여성이 겪는 이야기로 간단히 요약할 수 있다. 어느 날 그녀는 12세 무렵 한국에서 공부하던 때 만났던 옛 남자친구에게서 한 통의 메시지를 받는다. 뉴욕을 방문 중이던 그 남자가 헤어진 지 20년 만에 그녀를 만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오랜만에 재회한 두 사람의 삶은 잠시 흔들리지만, 이미 그들의 길은 정해져 있다. 영화 중에 주인공이 옛 남자친구와 남편이 함께 있는 바에 앉아 있는 장면이 있다. 관객들이 과거가 사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충격적인 방식으로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와 함께 느끼게 되는 장면이다. 한국에서는 개봉하기 전 이 영화를 비행기에서 봤는데, 열렬한 키스 없이 훨씬 더 오래 지속되고 훨씬 더 진심 어린 포옹의 힘이 강렬하다는 걸 느꼈다.

▽미술작품=서울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콜롬비아인과 한국인 혼혈인 갈라 포라스-김의 작품을 알게 되었다. 나는 보통 매우 명확한 이론적 질문에서 출발하는 예술에는 조금 지루함을 느끼는 편인데, 이 작가의 경우에는 완전히 반대였다. 포라스-김의 질문은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고대 물건이나 유물의 의식적이고 종교적인 가치는 어떻게 되는가’였다. 작가는 이 유물들이 문화기관에서 소장되어 전시되기 전의 과거 모습을 상상한다. 이 재현 과정에서 세밀한 드로잉, 조각, 설치 작업을 통해 유물에 생명을 불어넣으며 2023년 올해의 작가상 후보에 올랐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전북 고창에서 발견된 고인돌을 소재로 한 대형 드로잉 3부작 ‘세월이 남긴 고색의 무게’다. 첫 그림은 땅에 묻힌 사람의 시점으로 아직 무덤의 역할을 하던 시절의 고인돌을 그렸고, 두 번째에선 유네스코 지정 문화유산이 된 현재의 고인돌을, 그리고 세 번째는 고인돌이 훼손에서 벗어나 자연으로 돌아가 이끼로 뒤덮인 모습을 표현했다. 이를 통해 포라스-김의 이론적 출발점은 의미와 가치로 가득한 아름다움으로 해소된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렇게 이 사물들의 미래에 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미래의 우리가 화신(化身)으로 만드는 건 무엇일까?

▽음악=한국의 싱어송라이터 씨피카의 콘서트를 처음 본 건 서울의 한 작은 공연장에서였다. 두 번째 그의 공연은 강원도 철원에서 열린 DMZ 피스트레인뮤직페스티벌 무대에서였는데 그 앞에는 수천 명의 관객이 있었다. 두 공연의 환경은 꽤 달랐는데, 씨피카는 두 공연 모두에서 관객들과 놀라운 수준으로 교감하는 모습을 보였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는 ‘멜로디’라는 곡인데 이 곡은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무언가가 있다. 1960년대 비틀스에 의해 탄생한 고전적인 팝송의 묘한 완벽함을 품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전자 음악의 소리와 한국어와 영어 가사의 조화는 마치 미래에서 온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해준다. 이 노래에서 나오는 영어 가사는 상업적 전략이 아니라 하나의 인간으로서만이 아닌, 복수의 인간이자 인류로서 공존할 수 있다는 감동의 표현으로 들린다.

모두가 인공지능과 그 인공지능이 남긴 결과에 집착하는 이 시대에, 위에서 언급한 영화와 미술작품과 음악은 과거를 매우 생생하고 가능성으로 가득 찬 무언가로 생각하게 한다. 오래전 연인이 후회 없이 삶을 이어갈 힘을 얻게 해주는 과거, 사물이 우리에게 남겨진 수많은 존재를 알게 해주는 과거이자 어쩌면 우리 곁에 없는 존재일 수도 있는 과거, 예전의 형식에 기반하지만, 미래가 가져올 모든 것에 열려 있는 노래의 과거. 그중 가장 흥미로운 점이 무엇인지 아는가? 이 셋 모두 해외로의 이주 경험이 있는 여성들이 만들었다는 것이다.

안드레스 솔라노 콜롬비아 출신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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