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의 산 세바스티안 사람들처럼 [삶과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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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한번 감았다 뜬 것 같은데 한 해가 다 갔다.
1930년대 이곳 해변의 식당에서 알록달록한 재료들을 쌓아 올려 내놓은 것이 시초인데, 다 먹은 후에는 꼬치의 개수를 세어 계산하기도 편했다.
돌아보면 '언제 한번 보자'던 그 말이 거짓은 아니었다.
그 따끈한 감자오믈렛처럼 한번 보려면 어렵게 어렵게 약속을 잡아야 하고 오래오래 기다려야 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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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한번 감았다 뜬 것 같은데 한 해가 다 갔다. 밥 한번 먹자는 말이 대체 '언제' 인지 기약 없던 사람들이 일년 정산이라도 하듯 약속을 잡는 계절. 오랜만이라 거하게 앉아 먹을 식당을 찾다 보면 이미 예약전쟁이다. 만나는 장소 하나 고르는데도 이건 되고 저건 안 되고 진을 빼다 보니, 딱 맥주 한잔에 한 입 거리 안주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산 세바스티안이 그리워졌다.
스페인어로는 '산 세바스티안'이지만, 같은 나라라고 퉁 치기에는 이방인이 봐도 다른 구석이 많은 바스크 지역인지라 '도노스티아(Donostia)'라는 바스크어로 불러줘야 더 환영 받는 도시. 도시 이름도 달리 쓰는 곳에서 스페인 음식의 대명사 타파스를 같은 이름으로 부를 리 없다.
와인 잔에 벌레나 먼지가 들어가지 않도록 빵이나 햄으로 덮는 뚜껑(Tapa)에서 유래한 타파스를 바스크 지역에서는 이쑤시개 같은 꼬치(Pincho)에 재료를 꿰어 만든 핀초스가 대신한다. 1930년대 이곳 해변의 식당에서 알록달록한 재료들을 쌓아 올려 내놓은 것이 시초인데, 다 먹은 후에는 꼬치의 개수를 세어 계산하기도 편했다. '올해의 핀초'를 뽑는 대회 경쟁도 치열해 수백 개의 바마다 자신만의 레시피로 특제 핀초를 만들어내고, 그곳들을 둘러보는 안내서까지 있을 정도다.
스페인 북부의 작은 술집이 원조일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할 '바스크 번트 치즈케이크'도 바로 이곳 핀초 바 출신이다. 살짝 태워 짙은 갈색을 띠는 겉과 놀랍도록 촉촉한 치즈크림이 어우러지는 이 집의 케이크를 사러 전세기를 타고 온 투어단까지 등장했다. 아침마다 선반 가득히 구워낸 케이크는 광속으로 팔려나간다.
하루 딱 2판! 한정판으로 굽는 감자오믈렛을 먹으려면 핀초 바를 열기도 전에 예약리스트에 이름부터 올려야 한다. 스페인의 국민메뉴라 할 만큼 흔하디 흔한 감자오믈렛이지만, 감자수프를 농축한 듯 진득하게 구워내는 게 이 집 비법이라 따끈한 오믈렛을 자르면 주르륵 흘러내리는 속살이 영롱한 노란빛이다. 어렵게 얻은 오믈렛 한 조각을 먹고 나면 그날 여행이 꽉 찬 듯 행복해졌다.
얼마 전 인기 TV쇼에서 소개한 '핀초 포테'는 사실 생긴 지 10년정도 밖에 안된 최신유행이다. 주말이면 밤새워 이곳 저곳 옮겨 다니며 타파스를 맛보는 문화는 스페인 사람들의 즐거움 중 하나인데, 여기에 산 세바스티안은 평일까지 하루 더해 핀초와 음료를 특별할인하는 '목요일의 해피아워'를 만들어냈다. 전통 바 골목이 아니라 조금 외곽의 바들이 불황타계를 위해 만든 홍보전략이 역으로 퍼진 셈인데, 여하튼 덕분에 오래된 바들이 모여 있는 골목도 북적이는 날이 하루 더 늘었다.
돌아보면 '언제 한번 보자'던 그 말이 거짓은 아니었다. 이리 밀리고 저리 치여 실행은 못 해도 가슴 한 켠에 그리움은 있었다. 그 따끈한 감자오믈렛처럼 한번 보려면 어렵게 어렵게 약속을 잡아야 하고 오래오래 기다려야 했지만 말이다. "열매가 달렸을 때만 선인장에 다가간다"라는 스페인어 속담이 있긴 하지만, 잠시 방어용 가시는 접어 놓고 가진 열매는 중요치 않았던 시절로 되돌아갈 때가 옛 친구와의 만남이 아닐까 싶다. 옛 기억의 나를 만나 다시 비추어 보며 한번 더 깊이 반짝여 질 시간. 그러니 친구야, 우리도 산 세바스티안의 목요일처럼 만나볼까?
전혜진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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