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다리’···숨진 이들의 ‘소리’를 들어보세요

이영경 기자 2023. 12. 14.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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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2023’ 작가 4인
미라 다룬 한국·콜롬비아계 작가 갈라 포라스-김
근대화의 속도에서 이탈한 존재 탐구 전소정
퀴어 예술가들의 삶과 역사 복원한 이강승
로봇 설치로 인간·비인간 경계 묻는 권병준
갈라 포라스-김, 세월이 남긴 고색의 무게, 2023, 종이에 납화법, 흑연과 색연필, 228.6x182.8cm. 작가와 커먼웰스 앤드 카운슬 소장.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갈라 포라스-김, 우리를 속박하는 장소로부터의 영원한 탈출, 2022, 종이에 잉크, 마호가니 액자와 편지, 248x184x5cm, 29.7x21cm. 개인 소장.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서울 종로구)에서 열리는 ‘올해의 작가상 2023’ 후원작가 갈라 포라스-김의 전시관은 죽은 자들이 남긴 이야기가 가득하다. 문화유산이 돼 박물관에 전시된 누군가의 유해, 무덤, 제의적 용도로 쓰인 물건들을 과거와 연결시키고자 한다. 포라스-김은 과거와 현재에 다리를 놓는 중재자가 되고, 숨진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영매’가 되기도 한다. 이때 예술은 고대인들의 뜻과 현대의 제도를 화해시키고 연결시키기 위한 방법이 된다.

‘우리를 속박하는 장소로부터의 영원한 탈출’(2022)은 2019년 광주에서 발굴해 국립광주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기원전 1세기 미라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 작품이다. 유해들은 숨진 곳으로부터 옮겨져 낯선 박물관에 보존되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포라스-김은 박물관장에게 편지를 보내 유해들이 본래 있고자 했던 곳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합의점을 찾도록 제안한다. 매개자를 통해 영혼과 접신하는 주술적 행위로 영혼들에게 가고자 하는 위치를 묻고 페이퍼마블링 기법을 활용해 물 위에 뿌려진 안료들을 종이에 옮긴 ‘지도’를 만들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올해의 작가상 2023’ 갈라 포라스-김의 ‘영국 박물관의 이집트 제 5왕조 기자 석관을 위한 일출’ 전시 모습. 이영경 기자

‘영국 박물관의 이집트 제5왕조 기자 석관을 위한 일출’(2022)도 흥미롭다. 영국 박물관이 소장한 이집트 기자의 5세기쯤 왕조의 석관을 고대 관습에 따라 동쪽을 향해 재배치할 것을 제안하는 작품이다. 석관이 전시된 바닥의 화살표는 석관이 놓인 방향에서 회전되어야 할 거리를 나타낸다. 각 작품들마다 포라스-김이 박물관에 보낸 편지가 함께 전시돼 있는데, 유물의 본래 의도와 현재를 연결하는 편지 내용 또한 전시 일부다.

‘올해의 작가상 2023’에서 선보이는 신작 ‘세월이 남긴 고색의 무게’(2023)은 전라북도 고창에 위치한 고인돌을 바라보는 세 가지 관점을 나란히 배치해 보여준다. 흑연을 이용해 칠흙같이 어둡게 칠한 화면이 고인돌에 묻힌 망자의 관점에서 바라본 풍경을 보여준다면, 고인돌 그림은 문화유산으로서 고인돌을 바라보는 현대인의 관점이다. 돌 위에 핀 이끼를 그린 그림은 인간을 초월한 자연의 관점이다.

한국-콜롬비아계 작가 포라스-김은 유물이 현재와 맺는 관계에 주목한 작품들을 선보여왔다. 박물관이 문화유산을 분류하고 다루는 제도, 문화유산의 역사적 맥락과 의미 등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서울 용산구 리움에서도 포라스-김의 전시 ‘국보’(내년 3월31일까지·무료)가 열리고 있어 작가의 작품 세계를 한층 더 풍부하게 감상할 수 있다. 한국계 작가의 정체성이 한결 더 가깝게 느껴지는 전시로, 남북한 국보를 나란히 그린 ‘국보 530점’, 해외로 반출된 유물을 그린 ‘일제강점기에 해외로 반출된 한국 유물 37점’ 등을 통해 분단과 식민지배라는 역사의 부침 속에 변화해온 한국 문화유산의 특수성에 초점을 맞춘다. 리움이 소장한 국보 10점과 함께 전시된 작품들은 우리 문화유산의 의미에 관해 생각하게 만든다.

갈라 포라스-김, <국보 530점>(2023), 종이에 색연필, 플래쉬 물감. 패널 4개, 각 181x300cm. ⓒ Gala Porras-Kim. 사진: 양이언
리움에서 전시 중인 갈라 포라스-김의 ‘일제 강점기에 해외로 반출된 한국 유물 37점’ 전시 모습. 리움 제공

‘국보 530점’은 남한과 북한의 국보를 그린 그림이다. 숭례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등 친숙한 국보를 모두 그려넣었다. 등재 순서대로 남북한 국보를 나란히 나열한 작품을 통해 조선의 문화유산이 분단 후 둘로 나뉘어지고, 서로 다른 체계 속에서 분류 및 관리되어 온 역사가 드러난다. ‘일제 강점기에 해외로 반출된 한국 유물 37점’은 이병철 삼성 회장이 일본에서 들여온 고려 불화 ‘아미타여래삼존도’와 나란히 전시돼 식민지배를 겪은 나라들의 문화유산 반출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올해의 작가상 2023’ 후원작가로 선정된 전소정도 개인전 ‘오버톤(Overtone)’이 서울 종로구 바라캇 컨템포러리(내년 1월7일까지·무료)에서 열리고 있다. ‘올해의 작가상 2023’에 선보이는 신작 영상 ‘싱코피(Syncope)’(2023)와 ‘오버톤’은 연결·확장되는 작품이어서 함께 감상하면 감동의 폭이 크다. 근대화가 가져온 빠른 속도와 효율성에서 이탈한 존재, 경계에 선 존재들에 대해 탐구해왔던 전소정은 ‘싱코피’에서 프랑스의 한국계 입양아, 재일조선인 등 경계를 넘고 이주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타악기를 두드려 합주하는 인도네시아 전통음악 가믈란 연주를 매개로 연결한다. 시각 중심의 근대 문화에서 비켜난 소리의 떨림과 질감, 증강현실(AR)을 이용해 만든 덩굴식물 이미지가 시공간의 경계를 허문다.

전소정, 싱코피, 2023, 단채널 4K 비디오, 컬러, 스테레오 사운드, 29분 30초. 작가 소장.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전소정 ‘오버톤’, 스틸이미지, 2023, 3채널 4K비디오, 컬러, 스테레오 사운드, 1시간24분. 바라캇 컨템포러리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2023’의 후원작가 전소정의 전시 모습.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3채널 영상 작품 ‘오버톤’은 ‘싱코피’에도 등장하는 재일조선인 가야금 연주자 박순아를 중심으로 한·중·일 금(琴) 연주자들의 합주를 다룬다. 한국의 가야금, 중국의 고쟁, 일본의 고토를 연주하는 이들은 세 명의 작곡가가 만든 서로 다른 곡을 연주하는데, 각자의 전통적 주법을 벗어나 서로의 낯선 주법을 연습하며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악보만 보고 스스로 해석해 혼자 연주를 해보는 첫 번째 파트, 세 명이 만나 악기의 특성과 연주법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이해의 폭을 넓혀가는 두 번째 파트 끝에 마침내 합주를 이뤄내는 세 번째 파트로 이뤄진다. 세 명의 연주자의 손과 악기에만 초점을 맞춘 마지막 파트는 소리의 물성과 신체성이 극대화되며 언어와 문화의 경계를 넘어 함께함을 소리와 몸짓 그 자체로 보여준다. 일본의 고토 연주자 나부코는 “호흡 속에서 국경을 넘은 세계”, 가여금 연주자 박순아는 “변함없는 신뢰감”을, 중국의 고쟁 연주자 샤오칭은 “서로에게 응답”하는 것을 느낀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올해의 작가상 2023’ 이강승 전시 전경.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올해의 작가상 2023’ 후원작가 이강승은 한국의 퀴어 역사와 더불어 세계에서 가려진 퀴어 예술가들의 삶과 예술을 복원하려 시도한다. 전시에선 2021년 숨진 변희수 하사와 김기홍씨의 초상, 한국의 성소수자 관련 신문 기사 등을 옮겨 그린 작품 등을 볼 수 있다.

신작 영상 ‘라자로’(2023)는 싱가포르 출신의 세계적 무용가 고추산과 브라질 출신 개념미술가 호세 레오닐슨에게 헌정하는 작품이다. 레오닐슨이 드레스셔츠 두 벌을 붙여 만든 의상을 오마주해 제작한 셔츠를 입은 두 명의 댄서가 함께 추는 춤을 영상으로 담았다.

권병준은 로봇 설치작업을 통해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바닥을 기는 듯한 ‘오체투지 사다리봇’(2022)과 신작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로봇’(2023) 등은 쓸모와 효용을 위해 매끈하게 디자인된 산업용 로봇과는 거리가 멀다. 어딘가 부족하고 부실해 보이는 로봇들은 노동력의 가치를 잃은 인간의 모습과 겹친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올해의 작가상 2023’ 권병준 전시 전경.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올해의 작가상 2023’은 네 명의 후원작가들 신작뿐 아니라 기존 대표작들을 함께 전시해 그들 예술 세계의 출발과 과정, 도착점을 아울러 볼 수 있게 했다. 최종 수상자는 공개 워크숍과 2차 심사를 거쳐 내년 2월에 발표된다. 전시는 내년 3월31일까지. 2000원.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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