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청계산의 낙타
희붐한 햇살이 창문을 두드릴 때 배낭을 꾸려 청계산을 오른다. 식물탐사대의 송년 번개모임. 헐떡헐떡 순한 짐승처럼 정상 근처 돌문바위를 지나다가 아이쿠, 낙타를 만났다. 산중 가게 좌판에 몽골 낙타털 양말이 진열되어 있지 않겠는가. 발목 근처에 낙타가 선명했다. 그 어디에 있든 낙타는 힘이 세다. 상표와 로고만으로 자꾸 저를 생각나게 했다. 아침의 기립부터 지금의 융기까지, 오늘의 내 행각이 아연 낙타와 엮이기 시작했다. 맞춤하게 떠오른 한 편의 시.
“낙타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툭 던지는 저 첫마디가 참으로 아득하다. 그래, 오늘 나도 신분당선 전철을 타고 저승 근처인 듯 지하를 달려 여기까지 솟구치지 않았는가. 비딱한 경사와 깔딱고개마다 저 구절을 중얼거리면 어디선가 비상한 기운이 턱밑으로 올라왔다.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산에는 잠시 세상이 생략된 듯하다. 저마다의 사연은 집에 두고 산으로 잘 나왔다. 높이 오를수록 더욱 홀가분해지는 표정들. 뿌리 없는 웃음이 곳곳에서 눈처럼 터진다.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살다가,/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계절의 시간표가 뒤죽박죽, 겨울의 한복판이 너무 따뜻하다. 오늘은 불시화처럼 공중이 활짝 핀 셈인가. 울창하던 숲도 한 조각 낙엽으로 산산이 부서졌다. 앙상한 가지로 불안을 달래는 나무들 옆으로, 바보이면서 바보처럼 산 줄도 몰랐던 가엾은 바보 같은 낙타 되어 다시 걷는다.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길동무 되어서.” 청계산 원터골에서 매봉-석기봉-이수봉-국사봉으로 이어진 능선길. 이불 밖으로 한 걸음은 몹시도 힘들더니 산에서의 발걸음은 이리도 상냥하다. 낙타등처럼 오르락내리락하다가 드디어 하산. 이번엔 아침의 그 현관이지만 언젠가 나도 행선지가 달라지겠지. 그때 타박타박 홀로 걷다가 낙타라도 만난다면 오늘의 일을 전하며 짐짓, 아는 체…. (따옴표 속의 글을 연결하면 신경림의 시, ‘낙타’ 전문이 된다.)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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