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한 달” 선고에도 노동법 강의…‘바보 거인’ 김민아 노무사

한겨레 2023. 12. 14.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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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이의 발자취][가신이의 발자취] 김민아 노무사를 추모하며
2009년 국회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는 고인.

김민아 노무사는 지난 7일 44년 길지 않은 삶을 마치고 떠나갔습니다. 한 줌 뼛가루가 되어 자기 마냥 키 작고 앙증맞은 나무 아래 묻혔습니다.

모든 인간이 그러하듯이 우주 같은 한 사람의 인생을 몇 자로 적다니요. 마지막 순간까지 남아 있던 삶에 대한 애착을 잘 알기에 더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이제 흙으로 돌아간 한 사람의 삶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려 용기를 냅니다. 그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따뜻한 마음으로 세상과 사람들을 지극히 사랑했음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외고 다니다 가난 탓 일반고 옮겨
대학 때 여성·환경·이주민 운동
2006년 노무사 되고 늘 노동자 곁에

가난했지요. 우린 모두 가난했지요. 그도 물론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외고 시절 가난을 싫어했고, 수두룩한 부유한 동급생들과 비교당하기 싫어했고, 지기 싫어했습니다. 외고를 좋아했지만, 가난이 싫어 졸업하지 못하고, 전학을 가게 됐습니다. 대학은 그에게 해방구가 되었습니다. 입학한 98년엔 학생운동이 잦아든 시절이었지만, 그가 입학한 법과대학의 학생회실은 여전히 그 문화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몸과 마음이 가난했지만, 가슴이 식지 않은 선배들이 서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공간과 분위기, 사람들을 좋아했습니다. 아마 가난을 비교당하지 않아도 되어서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선배들은 그의 가난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이상하게도 그는 항상 밝았기 때문입니다. 눈길과 미소가 따스했습니다. 자기 욕망을 표현하는 데도 멋지고 당당했습니다. 선배들에게 애교 부릴 줄 알았고, 사랑 받을 줄 알았습니다. 술자리를 좋아했고, 매번 귀엽게 취했습니다.

그가 대학에 들어온 아이엠에프(IMF) 구제금융 위기 직후에는 정리해고라는 이름으로 노동자들의 삶을 잘라냈습니다. 거리정화라는 이름으로 노점상을 내몰았습니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도시빈민을 내쫓았습니다. 호주제라는 이름으로 여성을 제도적으로 차별했습니다. 민족과 국민의 이름으로 이주노동자를 차별했습니다.

그는 선배들 덕에 거리에서 쫓겨난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더이상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거리에서 그들과 함께 눈물을 흘렸습니다. 약자를 억압하는 세상에 분노했습니다. 뒤에서 눈물만 흘리지 않고, 저항하는 사람들 곁에서 함께 했습니다. 작은 체구로 자본과 권력에 대항했습니다. 선전국장이 되어 분노와 정의감, 연대의 정신이 어우러진 선전물을 만들었습니다. 정책, 조직, 여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후배들을 조직하고, 학교를 넘어서는 운동을 기획했습니다. 노동과 통일 담론에 머물지 않고 여성, 이주민, 환경, 빈민, 장애와 같은 다양한 영역으로 운동 주제를 넓혔습니다. 불온하게도 이윤보다 인간이 먼저인 세상을 그렸습니다. 그렇게 그는 5년간 대학에서 활동을 통해 작은 체구에서 거인으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고 김민아 노무사.

그는 대학 졸업 후 법학 전공을 살려 실천하기 위하여 공인노무사가 되었습니다. 2006년 공인노무사 시험에 합격한 후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 그는 오롯이 ‘노동자의 벗’으로 살았습니다. 아니 그의 작은 체구를 보면, 온 힘을 짜내 ‘노동자의 벗’으로 살아 낸 것 같습니다. 조금 쉬었어도 되었을텐데요. 잠시 주변을, 아니면 딴길을 서성였어도 좋았을 걸요. 하지만, 그는 한결같았습니다. 세상은 그에게 너무 많은 짐을 지웠습니다.

그는 이명박, 박근혜 정부 시기 언론노조 조직국장으로 활동했고, 노무사 개업 후에는 한국방송, 문화방송, 와이티엔 노동조합의 투쟁과 파업을 자문했습니다. 법적 조언만이 아니라 투쟁현장에도 늘 함께했습니다. 건강하던 그는 2015년 위암이 발병했고, 절제수술과 항암치료를 받고 완치된 줄 알았습니다. 안도했습니다. 기뻤습니다. 다시 왕성한 활동을 했습니다. “그의 삶은 언론노조의 투쟁사였습니다. 그 자체로 국가 권력과 사용자들이 언론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권리를 짓밟고 말과 글을 난도질하고 폭력을 행사할 때 그 수많은 언론 노동자들이 이 작고 왜소한 그의 등에 기댔습니다.”(언론노조 위원장의 추도사) 언론노조는 추모 성명에서 그를 “거인’, “등불”, “방파제”, “버팀목”이라 칭했습니다. 스스로 거인이 되고파 감당할 수 없는 짐을 걸머진 것이 맞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더욱 슬프고, 안타깝습니다.

2017년 6월 문화방송 노동조합 집회에서 고인이 발언하고 있다.

“마지막 준비하라”는 주치의 말에도
노조간부 대상 노동법 교육 나서
“세상과 사람들 지극히 사랑한 사람”

2022년 봄 불행하게도 암이 재발했습니다. 그럼에도 투병과 활동을 병행했습니다. 그는 힘든 투병 생활을 티내지 않았고, 불꽃 같이 자신을 태워 활동을 했습니다. 그가 떠난 빈소에서 투병하는지 몰랐다며 오열하는 지인과 노동조합 간부들이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그는 언젠가 꺼질 줄 알면서도 자신의 몸을 태워갔습니다.

그는 희망의 순간과 암재발 진단, 뇌종양 발병, 흉막전이 진단 등 절망적인 순간이 번갈아 찾아올 때도 온 힘을 다해 다시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거인 같은 그도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떠나가기 약 한 달 전 “마지막을 준비하라”는 주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절망하며 필자에게 “이젠 더 이상 온 힘을 짜내 버텨 내고 싶지 않다”, “힘들다”고 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도 바보 같은 거인은 며칠 뒤 노조 간부들을 대상으로 노동법 교육을 했습니다. 그때 그는 자신이 곧 하늘나라로 갈 걸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죽음의 순간에도 ‘노동자의 벗’으로 살아 냈습니다. 세상 똑똑한 그는 스스로 바보거인이 됐습니다. “고통받는 사람들과 현장에서 함께하겠다”는 말을 실천해내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는 없습니다. 해주고 싶은 게 많이 남았는데 말이죠. 좀 쉬게 해주고 싶었고, 장하다고 칭찬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연대의 정신으로, 서로의 짐을 나누어 지자고.

김남주/법무법인 도담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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