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과 옛 신문광고] 최초의 국산 미싱 '아이디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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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스한 봄바람이 불고 또 불어도/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서울 청계천 미싱공들의 삶을 노래한 노찾사의 노래 '사계'의 한 구절이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우리 산업의 중요한 축이었던 섬유와 재봉업의 핵심 도구가 미싱, 즉 재봉틀이다.
광복 후 1957년 '신한미싱'이라는 회사가 설립돼 국산 아이디알미싱을 최초로 판매했다.
신한미싱은 서울 용산에서 경기 부천으로 회사를 옮겨 상호를 아이디알공업으로 바꿔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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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유명한 미싱 브랜드로는 '아이디알' '부라더' '드레스' 등이 있었다. 밤에 서울역에서 남대문 쪽을 바라보면 미싱 광고 네온사인이 휘황찬란하게 빛났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미싱을 가진 가정이 거의 없지만,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해 옷을 만들거나 헌옷을 기워 입던 당시 그 수고로움을 덜어주었던 미싱은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였다.
두 가닥의 실로 바느질을 하는 현재 형태의 미싱을 발명한 인물은 미국인 일라이어스 하우다. 이를 같은 미국인인 싱어가 1851년 개량해 특허를 받았는데 두 사람 사이에서 소송이 벌어졌다. 하우가 이겼지만 제조업체를 세우고 미싱을 대대적으로 보급한 사람은 싱어였다. 미싱을 영어로는 소잉머신(sewing machine)이라고 하는데, '머신'을 일본인들이 '미싱'이라고 발음해 굳어졌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미싱이 처음 소개된 것은 19세기 말이다. 1896년에는 이화학당 교과목에 재봉과 자수가 등장했다. 1905년에는 미국의 싱어 회사가 한국에 지점을 설치·보급하기 시작했다. 광복 후 1957년 '신한미싱'이라는 회사가 설립돼 국산 아이디알미싱을 최초로 판매했다. 품질의 우수성을 인정받아 이란 등 중동 지역으로 수출도 했다. 제조업의 생태계가 형성되지도 않았던 시절, 정밀기계에 속하는 미싱을 우리 손으로 만든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예쁘게도 누비는 고운 솜 이불/ 돌아라 빨리빨리 돌아라/ 물레야 쉬지 말고 돌아라." 아이디알미싱은 이런 가사가 담긴 CM송으로 라디오 광고도 했다. "보고는 몰라요, 들어서도 몰라요"라는 샘표간장 CM송과 함께 가장 오래된 CM송이다. 신한미싱은 서울 용산에서 경기 부천으로 회사를 옮겨 상호를 아이디알공업으로 바꿔 달았다. 특이한 것은 이 회사가 라디오 생산에도 손을 대 수출도 했다는 사실이다(경향신문 1966년 1월 1일자·사진). 금성사가 최초로 개발한 국산 라디오가 잘 팔리자 아이디알공업 말고도 삼양전기, 태양전기 등 여러 업체들이 라디오 생산에 뛰어들었다.
미싱은 1990년대까지도 광고가 신문에 실리고 혼수품목에서 빠지지 않았다. 그러나 수요는 점점 줄어들었고, 업체들은 대부분 문을 닫았다. 드레스미싱은 김우중의 대우중공업에 인수됐다가 생산을 중단했다. 부라더미싱만은 건재하다. 베트남 공장에서 쓰기 편한 미싱을 생산하고 있으며, 2021년 창립 60주년을 맞았다.
tonio66@fnnews.com 손성진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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