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과 자연, 동·서양… 어색함 벗고 ‘절묘한 조화’

김신성 2023. 12. 14.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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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충섭 개인전 ‘획(劃)’
독창적 조형언어 본격적으로 드러낸
40여년의 작업들 돌아보는 자리 열어
작품, 관계 연결의 촉매제 역할 ‘강조’
나뭇가지·흙 등 재료선택에 제한 안 둬
산책 중 발견 오브제 전시장 한쪽 가득
바닥과 벽·천장 모두 구현의 공간 삼아

베틀처럼 보이는 구조물이 벽면에 기대어 있다. 바닥에서 올라오고 천장에서 내려온, 실과 나무로 이루어진 조형물은 서로 마주 보며 반대 방향으로 회전한다. 이는 씨실과 날실을 한 올씩 엮어 직물을 만들어내는 전통 베틀의 구조와 닮아 있다. 작품 아래로 펼쳐지는 영상 속에는 하와이의 밝은 달이 떠 있고, 작가의 작업실 근처 허드슨강이 조용히 흐른다.

전시장 바닥과 벽, 천장 모두를 구현의 공간으로 삼는 임충섭의 작품 ‘길쌈’이다. 자연과 여백을 통해 진리를 찾아가는 동양철학적 접근, 그리고 서구의 개념미술과 설치미술을 하나의 작품에 오롯이 차용했다.  
‘길쌈’. 갤러리현대 제공, Courtesy of the artist & Gallery Hyundai
수직으로 쌓아 올려진 사각의 흙덩이들도 눈길을 끈다. 주변을 마치 유적지처럼 바꾸어버린 이 ‘흙’ 작업에서 작가는 자연과 동양을 상징하는 곡선을 부여해 서구 건축의 직선 양식을 제거하면서 동시에 동서양 조화를 빚는다.

작품 ‘수직선상의 동양문자’와 ‘하얀 한글’은 부족마을의 입구를 지키는 토템처럼 관람객을 맞이한다. 두 작품에는 동양의 한자언어와 한글의 초성이 담겨 있다. ‘수직선상의 동양문자’에는 서구의 수직성, 수직구조(빌딩)를 상징하는 선들 사이로 한자들이 빼곡히 적혀 있어 동서양 미학이 어우러지는 이색 화면을 제공한다. 하얀 여백들 사이에 한글의 자음과 모음이 그려진 ‘하얀 한글’은 동양의 여백과 한글이 가진 조형성을 작가 특유의 해학에 버무려 낸다. 

작가는 문명과 자연, 동양과 서양 간의 공존을 위한 중간자, ‘사잇’의 역할을 수행한다.
‘흙’. 갤러리현대 제공, Courtesy of the artist & Gallery Hyundai
임충섭은 지난 40여년 동안 드로잉, 오브제, 설치, 사진, 영상, 음향 등 방대한 작업방식을 통해 한국(동양)과 미국(서양), 시골과 도시, 과거와 현재, 여백과 채움, 평면과 입체, 추상과 구상 등 양자 사이에 다리를 놓아왔다.

수직의 빌딩이 가득한 문명도시 뉴욕에서의 삶과 어린 시절 들판이 확 트인 자연의 기억 사이에서 작가는 그 둘을 잇는 ‘사잇’ 존재로 스스로의 정체성을 인식하며, 이 ‘사잇’ 개념을 창작의 원동력이자 시각적 모티프로 삼았다. ‘사잇’은 임충섭의 작품 세계를 함축하는 단어다. 두 장소나 대상 간의 거리·공간을 의미하는 ‘사이’와 그것을 연결하는 ‘잇다’를 결합한 뜻이다. 동양화의 여백이 미니멀아트와 연결되듯이, ‘사잇’ 존재로서 그는 자신의 작품이 양쪽을 동시에 이해하는, 그 사이 ‘관계’를 맺게 하는 ‘촉매제’라는 것을 강조한다.

원로작가 임충섭(1941∼ )이 ‘획(劃)’이라는 주제를 내걸고, 내년 1월21일까지 서울 종로구 삼청로 14 갤러리현대에서 개인전을 갖는다. 그가 1973년 뉴욕으로 이주한 뒤 독창적인 조형언어를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 1980년대 중반부터 2023년까지 40여년의 작업들을 돌아보는 자리다. 서양의 현대미술과 동양 서예예술의 조형성 사이를 다각도로 실험하며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한 미적 성취를 조명한다. 
‘무제’. 갤러리현대 제공, Courtesy of the artist & Gallery Hyundai
‘드로우잉-산꼭대기’. 갤러리현대 제공, Courtesy of the artist & Gallery Hyundai
그는 재료선택에도 제한을 두지 않았다. ‘모든 사물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말에서 영감을 받아 길거리에서 주워온 나뭇가지나 흙, 산업물품 등을 작품의 재료로 사용한다. 이를 통해 자연 또는 인간과 문명, 과거와 현재 사이의 익숙하면서도 낯선 정서, 감각의 여정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전시 제목 ‘획(劃)’은 한지에 그어지는 서예의 획과 더불어 동양철학의 ‘기’, 나아가 작가가 화면에 오일, 아크릴 같은 서양미술 재료나 개별적 역사가 담긴 오브제를 얹는 행위 전반을 포괄하며, 임충섭 조형미학의 핵심이자 근원까지 폭넓게 가리키는 말이다.

전시장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오브제들은 약 20년간 작가가 뉴욕의 길거리를 산책하며 발견한 오브제(found object)들이다. 그는 이들을 채색하고 조각한 뒤 나열해 새로운 서사를 만들었다. 파란색을 칠한 자전거 안장, 뉴욕의 오래된 건물에서 가져온 쇳덩이, 녹슨 철고리, 끊어진 운동화끈, 잡지가 콜라주된 낙엽 등 수많은 사물이 모여, 새 의미를 이룬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오랜 시간 쌓이고 풍화된 그의 기억에서부터 시작되는데, 연작 ‘화석–풍경@다이얼로그’에서 잘 드러난다. 뉴욕 거리를 걸으며 발견한 새의 깃털, 나무젓가락, 공업용 못과 지퍼, 자, 방충망, 두루마리휴지 등 성질과 쓰임새가 다양한 재료를 한 화면에 배치하거나 중첩한다. 이질성을 가진 정체불명의 다양한 오브제들이 마치 연극 무대를 꾸미듯 구성되어, 작가 내면에 가라앉아 있던 기억을 띄워 올린다.
‘화석–풍경@다이얼로그 6-13’. 갤러리현대 제공, Courtesy of the artist & Gallery Hyundai
‘무제–열.중.셛’. 갤러리현대 제공, Courtesy of the artist & Gallery Hyundai
어울리지 않는 오브제들의 공존과 조화를 도모하고 평면, 입체, 설치 등 장르를 넘나드는 면모는 ‘사잇’의 다리 역할을 하는 그의 작품세계 전반에서 보이는 특징이다.

‘무제–열.중.셛’은 군복무 시절 제식훈련에서 작가가 가장 편하다고 느꼈던 ‘열중쉬어’ 자세의 형상을 소재와 질감이 다른 투명한 물질들로 조합해 완성한 것이다.

평면과 입체의 경계를 오가며 회화로도 조각으로도 분류하기 어려운 임충섭 특유의 탈범주적 장르를 대표하는 작품들도 눈에 띈다. 그의 부조작업은 박제된 동물이나 식물의 일부를 형상화한 듯 특유의 조형성이 두드러진다.

김신성 선임기자 sskim65@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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