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의 미래] 2024년 한국노총에 거는 기대

2023. 12. 14.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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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 노동시장 치유 처방전
여전히 낡고 병든 과거와 싸워
기득권 지키기 ‘보수’가 된 노조
연대의 시간 돌아가 공존 찾자

2023년이 저무는 12월 한복판에서 기침, 오한, 근육통을 동반한 감기로 며칠을 고생했다. 병원에 두 번 갔고 그때마다 성분이 뭔지도 모르는 다량의 수액을 혈관에 쏟아부었다. 심신이 허해진 탓인지 물 한 모금 마셔도 온몸에 땀이 비 오듯 했고 이내 오한이 덮쳤다. 계절과 환경의 변화에 순응하지 못하고 육신과 정신을 제멋대로 굴린 대가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날로부터 정확히 1년 전인 2022년 12월12일, 미래노동시장연구회는 150여 일간의 숙고와 숙의 끝에 ‘권고문’을 발표했다. 우리 노동시장이 겪고 있는 아픔을 진단하고 병을 치유하기 위한 처방이었다. 근로시간과 임금제도 관련 개혁안이 권고의 핵심이었지만 두 가지 이슈가 노동시장의 활력을 제약하고, 일자리 분단과 격차를 구조화하는 원인이 되고 있음에 주목했다. 획일적으로 운용되는 근로시간의 보편적 관리체계는 일하는 방식의 다양화를 억제했으며, 호봉제의 연공형 인사관리는 일자리 공급을 방해했다. 수요자와 공급자 모두 철창에 갇혀 있는 셈이었다.
권순원 숙명여대 경영전문대학원장
꼬박 365일이 지났지만, 여전히 우리는 낡고 병든 과거와 싸우고 있다. 노동시장 제도도 하나하나 뜯어 놓으면 우리 육신의 장기와 다를 바 없다. 저마다의 기능이 하나로 통합되어야 사람 구실이 가능한 법인데 우리 시장의 제도들은 부적절하게 결합하여 기능부전의 상태다.

경제가 성장하던 시기 우리 기업들은 대학과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산업역군을 대규모 공채로 뽑아 기업특수적 훈련으로 숙련을 형성하고, 호봉을 체계화해 임금과 승진을 결정했으며 이를 미끼로 장기고용을 유도했다. 기업 조직은 군대식 위계와 조직문화를 동원해 헌신을 유인했으며 집단은 개인에 우선했다. 인사 관행과 조직문화는 하나의 묶음(bundle)으로 통합되었으며 이를 뒷받침한 제도가 고용의 법적 안정화, 근로시간에 대한 보편규제, 장기고용을 유인하기 위한 퇴직금, 호봉에 기반한 복잡한 임금체계 등이었다.

하지만 이 체제가 더는 작동하지 않는다. 저성장은 상수가 되었고 기업의 노동력 수요도 커지기 어렵다. 장기고용의 기회가 위축되고 자발·비자발의 이직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호봉과 기업특수적 숙련, 조직에 대한 헌신을 기대하는 건 난센스다. 이제 누구도 평생직장을 기대하기 어려우며, ‘어느 회사에 다니는가’보다 ‘무슨 일을 하느냐’가 중요해졌다. 조직문화는 관료제적 위계와 일사불란한 통제에서 아카데미를 메타포로 한 개방과 다양, 자율과 선택의 모델로 전환되었다. 혁신 기업 대부분은 그들이 일하는 공간을 모두 ‘캠퍼스’로 칭한다.

시장과 관행, 사람과 문화는 빠르게 변화하는데 제도 대부분은 앙시앵레짐에 머물러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정치적 지지시장에서 조직노동이 갖는 막강 파워 때문이다. 이들의 기득권은 구체제 유지에 연계되어 있다. 진보의 아이콘이었던 노동조합은 그들의 안녕을 위해 비정규직을 희생하고 하청업체에 비용을 전가한다. 1990년대까지 탈출하고자 노력했던 자신의 일자리를 자식에게 대물림하려 애쓰고 있다. 현재의 유지가 핵심적 가치인 진정한 ‘보수’가 된 셈이다.

지난 25년간 우리 노동시장은 외환위기, 금융위기, 팬데믹 등 고통의 터널을 지났으며 그때마다 노동시장 격차는 점점 더 벌어졌다. 보수화된 노동조합은 교섭력을 지렛대로 기득권을 공고히 했지만, 위험에 노출된 다수의 삶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자산, 소득, 출산, 교육, 취업 모두 격차가 심해졌고 건널 수 없는 상태의 양극화가 구조화되었다.

1997년, 30여년간 쉼 없이 돌려온 성장의 엔진이 멈춘 날, IMF가 우리에게 제시한 처방전에 적혀 있던 ‘노동시장 유연화’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근본에서 다시 고민해야 한다. 그들의 요구가 적절했는지 여부를 떠나 왜 노동시장 제도개혁을 담보로 설정했는지 원점에서 다시 성찰해야 한다.

무엇보다 노동조합의 역할이 중요하다. 각자도생의 기득권 보호 전략으로는 우리가 당면한 ‘노동시장 이중구조’ 문제를 해소하기 어렵다. 차가운 아스팔트에서 풍찬노숙하며 외쳤던 ‘연대’의 시간으로 되돌아가 모두가 공존하는 방법이 무엇일지 주도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마침 한국노총이 경사노위 복귀를 선언했다. 2024년, 그들의 역할에 희망을 걸어본다.

권순원 숙명여대 경영전문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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