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습지, 60개의 ‘직소 퍼즐’로 부활하다
5년 전 여행서 만난 습지 사진
60여개 조각 그림으로 재탄생
“이미지 구획하는 게 작가의 업
회화 질감과 ‘매너’에 천착 중”
‘Untitle 4819’ 연작에는 친절하게 번호가 붙어 있는데 1점은 어디로 갔을까. 없다. 맞은편 벽에는 12번 그림을 2배 정도 확대한 61번 그림이 걸렸다. 12번이 빠진 ‘빈자리’가 바로 거대한 연작의 화룡점정(畫龍點睛)이다.
“습지는 수평적 공간이고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 내려다보면 스크린 밖을 연상할 수 없는데, 그림 하나를 떼어내니 공간이 확장됐다. 습지 밖을 떠올리게 하는 이 확장이 갤러리 밖의 세계를 상상하게 만들 수 있다.”
‘선인장 작가’ 이광호(56·이화여대 조형예술대 교수)가 ‘습지’에 빠졌다. 국제갤러리는 올해 마지막 전시로 이광호의 ‘BLOW-UP’을 내년 1월 28일까지 연다. 사실적인 회화로 인물 정물 풍경 등을 넘나들며 ‘시선의 의미’를 탐구해온 작가는 습지를 그린 신작 65점을 걸었다. 이 화랑에선 9년 만의 개인전이다.
개막일인 14일 만난 작가는 “이 그림은 하나의 사진 이미지로부터 ‘구획’된 이미지다. 화가라는 업의 본질은 보이는 세계의 일부분을 구획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60점의 그림을 무작위로 그렸고, 어떻게 걸지 무엇을 비울지도 뒤늦게 결정했다”라고 설명했다.
K1 안쪽에는 본 적 없는 초대형 풍경 연작이 시선을 압도한다. 2017년 뉴질랜드 남섬 여행에서 우연히 만난 케플러 트랙이란 습지를 가볍게 찍은 사진에서 이 작업은 시작됐다. 처음엔 잊고 지나간 풍경이었는데 사진을 확대해서 보며 흥미를 느꼈고, 몇 년을 매달려 그리게 됐다. 작가는 “실제보다 크게 확대됐는데 이 정도면 ‘재현’이 아닌 ‘상상’의 풍경이다”라고 말했다.
교수님 작가의 입에서는 비유가 기가 막힌 ‘작품론’이 연이어 나왔다. ‘육수론’부터 들어보자. 작가는 “60개 캔버스가 질감이 다 다르다. 그림을 그릴 땐 올의 굵기나 연마도(Grinding)에 따라 다양한 효과가 나오는데, 동대문에서 새 천을 사서, 크기부터 연마도까지 손수 작업했다. 음식의 육수처럼 캔버스의 면이 물감의 흡수 정도를 다르게 만들더라”라고 했다.
‘매너(Manner)론’은 작가가 요즘 천착하는 화두다. 그에 따르면 영국 신사만이 아니라, 화가도 매너가 만든다. “2000년대 초반 덕수궁미술관 정점식의 개인전 때 매너를 만났다. 기술(Technic)과 구별되는 개념으로 가르칠 수도 따라 할 수도 없는, 지문 같은 고유한 회화의 흔적이다. 가수의 음색, 소설가의 문체 같은 게 회화에선 고유한 붓질을 구사하는 매너라고 생각한다. 저만의 붓질을 계속 연구해왔고, 2006년쯤에서야 어렴풋이 내 매너를 깨닫게 된 것 같다.”
60여개의 연작은 하나씩 보면 다 비슷해 보인다. 그럼에도 놓쳐선 안 될 이스터 에그(몰래 숨겨 놓은 메시지)가 있다. 작가의 아바타와 다름없는 ‘꿩’이다. 여행을 떠날 때, 꿩 인형을 가져가 풍경 사진과 함께 찍을 정도로 꿩을 아끼는 그다. 작가는 왼쪽 아래 구석에 꿩을 숨겨놨다. 뉴질랜드의 늪은 꿩이 자생하는 곳이지만 그는 한국 꿩을 슬며시 그려 넣었다. 작가는 “무서우면 머리를 박고 숨는 게 저 같아서 재밌다고 생각해 늘 품고 다닌다”고 말했다.
여백과 꿩. 이 한국적 ‘기지’를 통해 이 거대한 그림은 놀라운 이야기를 품게 됐다. 그렇다. 그림은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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