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향 대구에 초겨울 피어난 전시 성찬
구한말 권력자 흥선대원군이 첨단 미디어아트 작품과 만나는 이색 역사무대가 차려졌다. 1700년 전 대구·경북 지역 선조들이 자기들 유골에 남긴 질병의 흔적을 선보이는 전시회가 손짓하며, 17세기 거리에서 오줌 누는 남자의 드로잉을 치열한 눈길로 좇아간 거장 렘브란트의 드로잉도 처음 찾아왔다.
한강 이남에서 가장 큰 문화예술 도시라는 자부심이 남다른 대구에서 양질의 전시 성찬이 펼쳐지고 있다. 대구 도심의 근대거리 탐방과 함께 1박2일 혹은 2박3일의 미술 문화유산 투어를 즐길 수 있는 현지 박물관·미술관의 특별하고 풍성한 전시 현장들이다.
먼저 들러야 할 곳은 대구 남쪽 수성구 황금동에 있는 국립대구박물관의 옛 현판 특별전(내년 2월12일까지)이다. 지난달부터 ‘나무에 새긴 마음 조선현판’이란 제목으로 열리고 있는 이 전시는 옛 조선시대 건축물의 간판 상징물이던 주요 전각의 현판 114건을 내놓았는데, 현판이라면 한자 일색의 어렵고 딱딱한 콘텐츠란 선입관을 날려버리는 예사롭지 않은 전시다.
무엇보다 일반 관객들에겐 미디어아트 정자공간 설치작품이 가장 매혹적인 볼거리로 다가온다. 안동시 풍천면 구담리에 있는 전각 취담정에 19세기 말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붙여준 현판을 작은 풀숲이 우거진 소정원 설치물 벽에 붙여 마치 정자를 거니는 듯한 흥취를 자아낸다. 광주아시아문화의전당에서 작업했던 미디어아티스트 문소현 작가가 만들어낸 역작으로, 싱그러운 저녁 고양이가 뛰어노는 산림의 정자를 절묘하게 재현했다.
취담정 현판 설치작품 뒤로 정조가 만갈래 강과 밝은 달을 보는 주인이란 뜻의 만천명월주인옹이란 호를 지으며 거닐던 창덕궁 전각을 아스라히 천조각들로 재현한 또다른 미디어아트 공간이 기다린다. 지난해 서울 경복궁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선보였던 현판전의 궁궐 전각 현판 콘텐츠에 영남 지역의 조선시대 민간 현판들을 합친 이 전시는 17세기 고도 경주의 객사 현판인 동경관 현판으로 시작해 영조·순조 등 임금과 원교 이광사, 미수 허목, 추사 김정희 등 명필들이 쓴 크고 작은 현판 글씨들을 다채로운 시각적 기법으로 망라해 보여준 뒤 대구 초등학교 현판과 전쟁 직후 국립박물관 현판 등 근현대기 간판으로 갈무리하면서 파란만장한 현판의 역사와 더불어 우리 미술사에서 현판이 얼마나 아름다운 시각적 창조물인지를 웅변한다.
대구 교외 경산시 조영동에 자리한 영남대박물관의 ‘뼈로 본 옛 사람들의 질병’ 전(21일까지)은 1600년전 경산에 살던 이 지역 선조들이 어떤 병과 외상에 시달렸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이색 전시회다. 그들의 무덤인 임당동 조영동 고분군에서 지난 80년대 발굴한 200점 넘는 인골들을 2010년대 이후 병리학적으로 분석한 결과물이다. 충치, 영양실조, 디스크, 골절 등 질병과 외상 양상들을 병의 흔적이 남아있는 이빨과 뼈의 주위 부위들을 실물로 생생하게 보여주면서 설명해 의료사 타임머신 여행을 하는 기분이 난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충치와 풍치로 어금니 등 이빨이 망가진 모습과 협착증으로 탁 붙어버린 척추골, 고된 노동으로 엄지 발가락의 중지골이 툭 튀어나온 모습 등을 보면서 노화와 병고 속에서 고뇌할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의 조건을 곱씹게 된다.
대구 맨 남쪽 삼덕동 산자락에 자리한 대구미술관에서는 세가지 대형 전시회가 관객들을 불러모으는 중이다. 해외교류전 ‘렘브란트, 17세기의 사진가’는 벨기에 판화 전문미술관과 손잡고 1년간 준비한 전시로 역대 국내전시중 가장 큰 규모로 그의 동판화 120여점을 소개한다. 당시 사진기가 없었지만, 거리의 사람들, 자화상, 풍경 등 7개 영역에 걸쳐 사진가 이상의 예리한 관찰력으로 당대 현실을 담은 렘브란트의 눈썰미를 섬세한 에칭 동판화로 살펴볼 수 있다. ‘거리의 사람들’과 ‘풍경’ 섹션이 가장 주목되는데 쥐를 잡는 사람, 늙은 거지 두 사람, 거리에서 오줌누는 중년 남자의 모습 등 17세기 네덜란드의 일상적 풍경을 훑어보았던 작가의 예리한 시선이 느껴진다.
1970년대 이후 미국 미니멀아트의 거장으로 우뚝 선 칼 안드레의 전시는 아시아 최초의 대규모 개인전(31일까지)이다. 1층 어미홀에서 벽돌, 나무조각, 철조각 등을 대구 수평구도로 늘어뜨려놓고 관객 자신의 주관적인 눈길로 해석을 권하는 특유의 조형물들을 만나게 된다. 수동 타자기로 친 26장의 시편으로 구성된 이색 드로잉 ‘유카탄’은 언어의 시적인 상상력과 심취한 작가의 또다른 면모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3층에 차린 원로 여성주의작가 윤석남씨의 23회 이인성미술상 수상 기념전(31일까지)에도 볼거리들이 넘친다. 수백여점의 형광핑크빛 종이드로잉을 오려 벽면을 채우고 바닥엔 유리구슬들을 깔고 앉지 못하는 의자를 놓은 대표연작 핑크룸과 1025마리의 유기견 이미지를 나무 부조조각들로 만들어 전시실을 가득 채운 대형 설치작품 ‘1,025: 사람과 사람 없이’가 재현됐다. 그가 2020년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한 여성독립운동가를 다룬 형형한 얼굴들의 채색 초상화 20여점도 감상할 수 있다. 이 전시에 연계된 청년특별전으로 소개되는 한국화가 이성경씨의 목탄 그림들도 눈여겨볼 만하다. 채색한 장지 위에 목탄으로 그리고 지우기를 되풀이하면서 표현한 현대적 일상 풍경이 강한 인상을 남긴다.
이밖에 도심 대봉동에 있는 리안갤러리에서는 박서보, 하종현 원로 작가 이후 단색조회화 후속 세대인 김근태, 남춘모, 김춘수, 김택상, 이진우 작가의 구작·신작 추상회화들을 신축한 새 사옥 공간에 함께 모아 선보인 ‘단색조 넘어, 너머로’ 전(내년 1월13일까지)이 차려졌다.
대구/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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